[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 ] 봄이다. TV와 신문에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재난영화의 종말론적 풍경을 암울하게 펼쳐보이고, 봄햇살은 우리 주변의 부정과 오욕들을 환히 비추고 있으며, 노랫말처럼 개같은 세상에도 꽃들은 어김없이 피어나는, 그런 봄이다. 이 봄, 밖에선 촛불 1년을 맞아 조금씩 들썩이는 것 같고, 난 수감 10개월째에 접어들면서 기결수로 살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여름 뜨거웠던 기억과 이후 계절이 한번씩 지나는 동안 우리가 만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보기에 적당한 시간인듯 보이지만, 그러기엔 지금 여기 일상의 형상이 너무도 잔혹하다. 눈을 뜨면 강요된 현실의 비루함과 씁쓸한 냉소가 아리게 파고들고, 눈을 감으면 비겁한 체념으로 엮인 올가미들이 온몸을 죄어든다. 그야말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다.
[말도 안되고 괜찮지도 않다] 그래도 아직은 무언가 얘기를 하자. 대법원 재판까지 오는 열달여의 수감기간 동안, 난 지금까지 가까이서 살을 부대끼며 마주할거라 생각도 못한, 중년의 경제인들과 함께 지내오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성격좋은 사람, 조용조용한 사람, 농담주고받기 좋은 사람, 다소 까탈스러운 사람... 그런데 어느 쪽이건 나와는 생각하는게 참 다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평균이나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에 거리를 두고 지내왔기 때문일까. 밖에선 그냥 그렇게 지나치던 사람들인데, 여기선 그럴 수 없으니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공존하는 법에 대해 온 몸으로 배우고 있다. 그런 이질감을 느끼는 순간들 중 하나가 몇몇 사람들이 습관처럼 대꾸하는 '말 되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이다. 별거 아닌데, 그 말을 들을 때면 괜히 불편하다. 그 말이 표상하는 세계를 보는 방식이란게, 미지의 것을 만나면 우선 자신이 아는 것과 비교해보고 닮았으면 납득하고 편을 갈라두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해서이다. 이 납득을 움직이는 동인은 안주하려는 마음이다. 자신의 편안한 삶이 유지되고 있다는 환상을 위해 막장 드라마도, 뉴스 속 부조리도 말이 되는 것이 되고, 의미있을 사변도 말이 안되는 것이 된다. 순간의 만족감이라는 환상을 위해 가림막을 쌓는 동안, 우리 삶의 조건들은 타들어가고, 다른 것들을 꿈꾸면서 이 조건들을 바꿀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는 상상력은 질식한다. 한편으로 수감된 뒤 내가 입버릇처럼 하게된 말이 있다면 '괜찮다'는 말이다. 가족, 친구, 날 응원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많이들 걱정스레 안부를 물어오곤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난 잘 지내고 있다. 뭐 그리 즐거울 수만은 없는 곳이지만 긍정적인 부분들을 보려고 노력하고, 작게나마 깨달음을 얻게되는 것들도 있다. 이렇게 '괜찮다'고 하면 정말 모든게 괜찮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 때면, 좀 괜찮지 않을 필요도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안에서도 편안함을 위해 부조리를 외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재판 때마다 이감을 가고 재판 결과도 안좋게 나오는게 어떻게 보면 자극이 될 수도 있지않나 싶다. 이제 난 대법원 재판도 끝났고, 기소사실은 모두 유죄가 되었고, 2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괜찮냐고 물으면 글쎄, 마음 편하게 아무렇지 않게 잘 진고 있지만, 만족하거나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말이 된다며 괜찮다며 지나가는 오늘의 풍경들을 보면, 우리가 만든 도구들은 곧 있을 집회에서 사람들 잡아들일 생각에 신났고, 용산에서 사람들이 죽은지 100일이 지났는데 달라지는 것 없이 잊혀지고만 있다. 여배우를 죽음으로 내몬 이리떼들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비극적 조건에서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에겐 무관심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公교육은 空교육이 되어가고, 노인네들은 그저 강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먹는 물 더럽힐 생각 뿐이다. 말이 되냐고, 괜찮냐고 물으면, 글쎄, 그렇게 생각하려면 한없이 그럴 수 있고 얼마든지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아니라면 어쩌겠는가.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물론 아니라면 뭔가를 해야겠지. 무엇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그것을 꿈꿀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해 자신만의 목소리로 얘기할 수 있다. 삶을 궁지로 내모는 생계의 위협에 대해, 윽박지를 줄만 아는 외로운 권위에 대해 우리가 들 수 있는 최선의 무기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내가 그리도 되려했고,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던게 바로 잠수함 토끼이다. 잠수함 토끼, 숨쉴 수 있는 공기가 부족함을, 세계의 폐경색을, 결코 괜찮지 않은 세상의 일면을 그대로 온몸으로 드러내보이는 작고 여린 개인. 하지만 그 여린 개인들의 네트워크가 가진 탄탄함은 음침한 잠수함을 끌어올려 그럴듯한 노천정원으로 바꾸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거리엔 결코 괜찮지 않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위해 사람들이 모였다. 잠수함 토끼들도 여럿 모여들었지만 거리는 고통에 찬 울부짖음으로 가득하지 않았다. 내가 만난 것은 각기 다른 음들이 이런저런 화음으로 공명하는 노래였다. 정말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다양한 가치관들이 공유하는건, 무력함과 냉소를 넘어 우리 삶을 우리가 통제해야한다는 열망이 아니었을까. 그 열망의 연대 속에 서보았고, 그때의 기억들은 여전히 고맙고 위안이 되고 있다. 이제 1년이 지났다. 우리가 잠시 암중모색을 하는 사이 사회분위기는 더 살벌해졌다. 지난 1년을 평가하면서 앞으로의 탄력을 받아야할 때지만, 난 '촛불1년'이라는 기획이 탐탁치 않다. 아직 생존자의 회고록을 쓸 정도의 뻔뻔함을 갖추지 못해서인가보다. 촛불이 지나간 시간 속의 어느 한 사건이 되기엔 지금 내 곁은 너무도 서늘하다. 양자역학에서 세계가 가진 중첩된 파동성은 관측을 통해 단일한 세계로 수축된다. 우리가 열심히 규정짓기를 하는 동안 공동체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들은 수축된다. 내가 용기있는 거부자나 철없는 아이같은 말들로 규정될 수 없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간인 것처럼, 촛불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뒤섞인 신나는 무도극이고, 짜릿한 에너지였다. 소중한 기억이지만, 거기에 매어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촛불이라는 상징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것들, 그러니까 더 나은 공동체에 대한 그림, 소통과 연대에 대한 믿음, 상호전이 되는 희망의 감각, 결코 놓치지 않는 세련된 유머 같은 것들이다. 우린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그것들을 통해 우린, 윤이형이 [피의 일요일]에서 펼쳐보이듯, 멋대로 호명하려는 시스템을 향해 성난 얼굴로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Why don't we do it in the road?] 한국에 제대로된 광장이 없기도 하지만, 난 도로를 점거하고 펼쳐지는 집회가 참 좋다. 도로는 자동차들을 위한 공간이라는 개념을 뒤집고 소통의 통로로 의미부여를 해내는 불온함이 맘에 든다. 이것 또한 뒷목잡고 쓰러지길 잘하는 저쪽 노인네들이 보기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불온한 취향인지 모르겠지만, 뭐 어때? 무게잡고 있어봐야 쥐날 일 밖에 없다. 지금보다 더 불온함이 넘쳐나는 세상은 그만큼 더 살기좋은 곳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혁명을 표절하라]를 보고 있다. 이제야 시작될 새 봄의 초입에서 난 이제 곧 표절된 혁명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길 기다려본다.
첫댓글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빨리 잊혀지고 있습니다. 잊지 않는다면 하루를 살아가기도 너무 괴롭네요. 단순히 내가 아주 잘 살고 있다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듭니다. 당신을 꿈결에나 언뜻 본듯이 잊고싶었지만, 결국 찾아왔습니다. 내가 해야할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라고 자문합니다. 연행되어 벌금을 받고, 자기검열에 시달리며 몸은 점점 안으로 굽어드는데, 다시 여름이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 역시 저마다의 작은 삶들이 세상을 부드럽게 만들것이라 믿습니다. 힘을 내세요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네요. 대신, 힘을 내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촛불이라는 상징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것들, 그러니까 더 나은 공동체에 대한 그림, 소통과 연대에 대한 믿음, 상호전이 되는 희망의 감각, 결코 놓치지 않는 세련된 유머 같은 것들이다. 우린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귀한 말씀입니다. _()_
첫댓글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빨리 잊혀지고 있습니다. 잊지 않는다면 하루를 살아가기도 너무 괴롭네요. 단순히 내가 아주 잘 살고 있다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듭니다. 당신을 꿈결에나 언뜻 본듯이 잊고싶었지만, 결국 찾아왔습니다. 내가 해야할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라고 자문합니다. 연행되어 벌금을 받고, 자기검열에 시달리며 몸은 점점 안으로 굽어드는데, 다시 여름이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 역시 저마다의 작은 삶들이 세상을 부드럽게 만들것이라 믿습니다. 힘을 내세요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네요. 대신, 힘을 내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촛불이라는 상징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것들, 그러니까 더 나은 공동체에 대한 그림, 소통과 연대에 대한 믿음, 상호전이 되는 희망의 감각, 결코 놓치지 않는 세련된 유머 같은 것들이다. 우린 이미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걸로 충분하다." 귀한 말씀입니다. _()_
많이 퍼 올렸습니다. 귀하고 따를만한 젊은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