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랑히톤(1497-1560)이 2월 16일 독일 브레텐에서 태어났다. 5척 단신이지만, 그의 명석함은 어릴 때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월반하여 일찍 학위를 따려 했지만, 나이가 적다는 것이 문제가 될 정도였다. 정조 시대의 황사영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우병우의 소년급제, 조국의 서울법대 최연소 졸업기록과 비견할 수 있는 재능이었다. 독일 겨레의 스승이라는 별명이 그의 역할과 업적을 말해 준다. 루터와 더불어 쌍두마차로 종교개혁을 견인하였다.
비텐베르크에서 그의 인기는 상한가였다. 루터보다도 더 많은 학생이 그의 강의실을 매웠다. 목사도 박사도 아니었지만, 그의 권위는 루터와 나란히 서기에 부족함이 없다. 루터가 해석했다고 알려진 부분 중 적지 않게 그 지적소유권은 멜랑히톤에게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혼동되어서, 멜랗히톤을 공격하는 루터교 신학이 결국 자승자박의 막다른 골목에 선 꼴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미신이 그의 삶을 지배하였다. 물에 빠져 죽을 점괘가 있었기에, 멀리 여행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깔방과 교류하면서 그의 실력을 알아채고 “참 신학자”라고 칭찬하였다. 그 교유는 오래 가지 못하고, 깔방이 슈트라스부르크에 체류하던 시절로 한정된 것이 아쉽다.
멜랑히톤의 아내는 동갑의 귀족출신 카타리나였다. 루터의 아내보다 두 살 많았는데, 루터의 아내 케테는 늘 박사부인이라 뽐내었기에 카타리나는 속상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의 이름은 같이 카타리나이기에 오히려 사이는 나빴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