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하며 가는 길
도종환<시인,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연두색 잎을 피운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청안하게 흔들리는 동안에도 맨 위쪽의 줄기들은 푸른 꿈틀거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갓 부화한 딱새부리보다 작은 새순을 하늘로 밀어내놓고 봄 햇살을 쪽쪽 빨아 마시려는 듯 입을 옴쭐거립니다. 오월의 그 단풍나무 어린 새 잎에 절합니다.
땅에 바짝 몸을 붙이고 금장식 같은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는 이미 씨앗을 멀리멀리 날려 보냈는데도 또 꽃을 피웁니다. 씨앗을 바람에 날려 보낸 뒤, 씨앗이 날아간 허공을 오래 지켜 본 날은 뿌리를 땅속 더 깊은 곳으로 내립니다. 가만히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민들레에게 절합니다.
대지에 절한다는 것은 대지를 높이고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그동안 지나치게 인간을 높은 곳으로 올려놓았으므로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제비꽃에게도 절하고, 금낭화에게도 절하고, 조팝나무에게도 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물천(物物天)이라 했습니다. 모든 사물 안에는 작은 하느님, 작은 우주가 그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가슴 속에만이 아니라 그 작은 것들의 안에도 들어가 계시는 하느님께 절하는 것입니다.
대지에 절한다는 것은 천지만물을 향해 참회한다는 것입니다. 대지는 생이불유(生而不有)합니다. 그곳에 온갖 생명이 자라고 살게 하지만 그것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제 안에 자라는 풀과 나무, 거기 깃들어 사는 새와 짐승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지 않습니다. 인간만이 소유를 두고 다투고 짓밟고 죽이며 전쟁을 불사합니다.
칼 폴라니는 사고팔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과 자연과 화폐가 그것입니다. 노동하는 인간과 대지를 사고판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화폐마저 사고파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가 이제 파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케인즈의 제자, 하이예크의 제자들은 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파산해도 자신은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으며 더 큰 파멸을 향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할 것입니다. 결코 뉘우치지 않을 그들, 그 끝없는 탐욕과 벼랑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를 향해 참회합니다. 할 줄 아는 게 삽질밖에 없어 강이고 길이고 끝없이 파헤치고 뒤집어엎는 21세기 오늘의 이 나라를 향해 절합니다.
대지에 절한다는 것은 땅과 하늘에 기원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세상은 불평등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인간은 평등을 요구합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를 받기 원하고, 정규직이 되지 못한 노동자들도 노동의 주체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소수자들도 똑같이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똑같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하나씩 실현되어온 역사입니다. 그것을 조정하고 타협하며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정치입니다. 어느 한쪽 편만을 드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한 노력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게 해 달라고 대지에 절하는 것입니다.
정작 절해야 할 사람들이 절하지 않으므로 스님과 신부님들이 대신 절하는 것입니다. 매 맞아야 할 사람들이 회초리를 피하고 있으므로 대신 매를 맞는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도록 절하는 것입니다. 허리가 휘도록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이 참으로 바보 같이 대신 절하는 것입니다. 눈물겹도록 절하는 것입니다.
#부탁: 운영자님, 이 글을 추천칼럼 난으로 좀 옮겨 주세요. 이원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