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백마강변에 지어진 백제문화단지를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입으로는 천년고도의 재현이나 복원을 운운 하며 실재로 구현해 놓은 현장을 보면 영화세트장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은 참담 자체입니다. 부여나 공주의 백제고도는 오랜기간 서서히 파괴되어 초라해 졌지만 그렇다하여 지금의 복원이란 허명으로 진행되는 사업들은 문화유산을 불가역적인 파괴로 이끄는 것이여 두렵기 까지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공주 왕릉 부근의 공주관아 건물일겁니다. 공주관아 건물이라고 지어 놓은 그곳에 가 보변 어이가 없다 못해 졸도할 지경입니다. 역사의 복원이 가능한 걸까요. 더구나 역사의 현장을 가시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포정사 선화당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있고 이스라한 공주관아의 스토리텔링을 졸속으로 재현하는 관이 망치는 것은 아닌지 참 안탑깝습니다.
1624년 2월 14일 인조임금은 이원익과 이귀를 대동하고 공산성 북루에 오릅니다. 북루는 지금의 쌍수정으로 생각됩니다. 인조는 하루전 14일 공주로 들어와 14일 산성을 돌아본 후 오후 선화당에서 회의를 하는데 참석자가 이원익 이귀 김자점 김상용입니다. 인조는 13일 충청도 직산으로 들어와 충청감사 이명준 공주 목사 송홍주의 안내를 받아 공주로 들어온 후 불과 3박4일만에 한양으로 돌아 갑니다.
송홍주의 자료를 얼마전 입수했는데 인조를 수행한 며칠간의 내용으로 조만간 공개하겠습니다.
공주에 감영이 설치된 것이 1603년이니 감영설치후 20년만에 국왕이 공주를 방문한 셈이 됩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감사와 목사가 공주감영에 있었던 시절입니다. 공주의 이야기는 참으로 찰지고 융승하지만 우리가 잘 못 아는 펙트에 기반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 대통사지로 연구가 모아지는 공주교대나 백제 왕궁으로 주목 되는 공주고등학교등 ... 틈 날 때 마다 짧은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글 몇년간 읽은 보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