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읽는 공주 100년
윤여관
지금까지 수집된 공주를 찍은 제일 오래된 사진은 약 100년쯤 전인 것 같습니다. 공주를 찍은 사진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과 여행기록, 일제의 식민사업 기록용으로 촬영된 것들에서 시작됩니다. 지금은 위성사진과 위성과 연동된 여러 종류의 지상사진, 스마트폰을 이용해 개인의 일상까지도 중계되는 가히 사진의 시대가 됐습니다. 이 100년의 사진기록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가 놓치고 미처 마음 쓰지 못했던 ‘도리’나 ‘이치’혹은 ‘섭리’ 같은 덕목에 대해 뒤 돌아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공주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난 100년은 그 전까지 지속됐던 수많은 100년들과는 확연히 다르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전시된 사진 속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입은 옷과 도로, 건물들도 어떤 방향으로 변해 왔습니다. 낮았던 집들은 높아졌고, 한복이 양복으로, 장발이 단발로, 흙길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좁고 구불거렸던 길이 넓은 직선의 길로, 도보 중심에서 자동차 중심으로, 우물에서 수도로, 호롱불에서 전등으로, 동네에서 어깨너머로 배우던 것을 학교에서.
신학문, 신작로, 신식교육……, 충청도의 도청이 있던 공주는 이 모든 것의 첨단 현장이었습니다.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1920년대 제민천 하구와 금강에 데부둑이 놓이면서 그 전까지 지녀왔던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무너져만 갔습니다. 서양에서 시작된 근대가 일제를 통해 복제되고 자발적으로 근대화되어가는 과정쯤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겁니다. 지정학적 영향일 수도 있는 한국인들의 부지런함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이제껏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축약적 성취를 이룬 것 같습니다.
이제 세계는 문화다양성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서구중심의 일방적 문화파급력이 세계 각 지역의 토착적인 문화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는 위기감에서 나온 요구인 것이겠지요. 일본의 무형문화재 제도, 이를 모방한 한국의 무형문화재 제도나 최근 공주, 부여, 익산, 경주에 적용되는 고도보존사업 같은 것이 그러한 맥락 위에 있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이 문화다양성이라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만 익숙한, 뚝딱 만들어 팔 수 있는 문화상품권 같은 것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신식, 신학문에 젖은 우리가 지난 100년간 쓸모없다고, 귀찮다고, 미신이라고 천시하고 내다버린 것들 속에 있었던 것은 혹시 아닌가 합니다. 애를 씻기고 땟물만 버려야 하는데 애까지 버리고 있는 형국은 혹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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