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균은 출산을 하는 주민에게는 쌀 닷되와 미역을 보냈으며, 상을 당한 사람에게는 옷감과 목관(木棺)을 보내 도왔다고 한다. 또한 구례지역에 화재가 나고 풍수해를 입는 재해가 발생하였는데 수백호를 구휼했다고 한다. 또한 독서를 좋아하여 선비들과도 교류하였고 시를 남기기도 하여 <국포실기(菊圃實記)>5)가 전한다. 특히 마산 냉천리 경관을 중심으로 팔경시를 남긴다. 구례 선비들의 활동공간인 용호정 중수때에는 거금을 후원한다. <국포실기>에는 김택균의 사회사업과 구휼활동을 칭송하는 송혜비명(頌惠碑銘) 10개소6)의 비문이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구례, 순천, 하동에 걸쳐 있으며, 1944년 3월에는 구례 전군(全郡) 명의로 세워지기도 한다.
5) <국포실기(菊圃實記)>는 1946년에 간행한 석인본(石印本) 2권 1책이다. 29.3×18.1m. 아들인 김종필이 편찬하였다. 서문(金文鈺), 유묵(遺墨), 시문, 제문, 송혜비(10), 만시, 가장(김종필), 유사(노태현), 행장(柳泳), 묘갈명(鄭琦), 묘지명(李玄圭), 묘표(金奎泰), 발문(李建浩, 盧泰鉉) 등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9I-419) 등에 소장되어 있다.
6) 김택균의 손자 김원배옹에 따르면 공덕비가 12곳이었다고 한다.
○ 구례 간문면립(艮文面立), 토지면립(土旨面), 마산면립(馬山面), 산동면립(山洞面)
○ 구례 마산수립조합립, 광의용방양면립(光義龍方兩面立), 구례전군립(全郡立, 갑신[1944], 金祥國 撰)
○ 순천 황전면(黃田面), 월등면(月燈面)
○ 하동 악약면(岳陽面)
건립자 김택균의 아들 김종필(1904~1990)대에도 국포고택은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 된다. 1936년 설립한 금란회(金蘭會)는 구례지역 지식인과 문인들의 모임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종필은 금란회의 활동공간을 제공하고 자금담당을 한다. 한편으로 고아원을 운영하고 대지주로서 소작인에게 분배하는 등 사회사업으로 이웃사랑을 실천했다고 한다. 구례읍에 구례주조합명회사를 설립하는데 이곳과 국포고택의 사랑채(현 성륜사 육화당)가 활동 공간이었다고 한다.7) 국포고택은 목조와가로서 전통한옥에 근대기의 건축양식이 반영된 건축유산이다. 건립자의 손자인 김원배(86세, 경기고 고양시 거주)의 증언과 그가 제공한 1984년 촬영된사진을 보면 안채(몸채, 팔작집), 사랑채(T자형), 바깥대문(소슬삼문), 소마굿간이 딸린안대문, 안대문과 사랑채 사이의 중문, 안대문과 바깥대문사이의 샛문 등으로 구성되었다.
<국포실기>(김택균 문집, 1946년 간행) 표지
김택균 가장(1946, 김종필 찬) - 고양 출생(9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