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훈련을 시작할 때 자주 인용하는 시가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이라는 시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변화시켜보기를 권한다. 일상의 심드렁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자세히 보고, 오래 보라고 권한다. 이 시는 발터 부그하르트(Walter Burghardt)가 관상을 “현실을 바라보는 긴 사랑의 응시(A long, loving look at the real)”라고 설명하는 것과 닮아있다. 이런 설명은 영성 훈련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영성훈련은 이 세상을 초월하여 어딘가에 있는 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영성훈련이 말하는 초월은 이 세상에 대한 잘못된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잘못된 집착에서 벗어나서 다시 세상을 보면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슬쩍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집착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보기 위한 훈련은 새로운 정보의 습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을 들여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과정에서 불현듯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우리의 일상 사물을 쳐다보게 되면 그것이 어떻게 보여지게 될까? ‘김선우의 사물들’이라는 책은 우리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숟가락, 거울, 의자, 반지, 촛불, 못, 시계, 바늘, 소라껍데기, 부채, 손톱깍이, 걸레, 생리대, 잔, 쓰레기통, 화장대, 지도, 수의, 사진기, 휴대폰이라는 20개의 사물들을 아주 오랫동안 쳐다보면서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주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깊은 사랑의 응시를 통해 숟가락이라는 일상의 사물에서 건져올린 단상을 살펴보자.
“숟가락은 뜬다. 젓가락은 집는다. 숟가락으로는 물을 떠먹을 수 있다. 젓가락으로는 물을 집을 수 없다. 뜬다는 것은 모신다는 것이다. 양손 혹은 한 손을 둥글게 오므려 샘물이나 약수를 떠 마실 때, 그 행위는 단순한 ‘먹기/마시기’를 넘어서선다.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켤 때와 행위의 결과는 같다 하더라도 과정은 다르다. 찰나일지라도 그 순간에는 어떤 경건함이 스며 있다. 무엇인가 숟가락으로 떠서 입속에 넣을 때 우리는 반드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무엇인가 젓가락으로 집어서 입속에 넣을 때 반드시 고개를 숙여야 할 필요는 없다. 손을 오므로 약수를 떠먹을 때처럼, 숟가락은 공경을 내포한다.”
시인 김선우에게 숟가락을 사용한다는 것은 일상의 기도를 드러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숟가락을 사용한다는 것은 뭇 생명을 통해서 내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은근하게 감춰 나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김선우의 사물들’은 소설책을 읽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훅 읽어나갈 필요는 없다. 아니 그래서도 안된다.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를 하듯이 사물 하나의 이야기를 읽고 긴 시간을 묵혀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루 혹은 그 이상을 공글려 본다면, 일상의 사물들이 슬며시 열어주는 실재(the Real)의 모습을 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책을 다읽고 난 후에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사물 하나를 택해 융숭하게 바라보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김선우의 사물들’이 아니라 ‘나의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가 쓰여질 수 있을 것이다.
김오성 목사(한국샬렘 프로그램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