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0월 23일 조창호 소위의 귀환
1951년 5월에 벌어진 현리 전투는 한국군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된다. 일부 중공군의 경이적인 전선 돌파는 한국군 3군단을 공포 속에 와해시켰고 군단장은 비행기 타고 도망가고 예하 사단장들은 계급장을 떼고 패잔병들 사이에 끼었고 병사들은 장비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 군단장이 얼마 전 작전통수권 반환 반대 운동에 앞장섰던 유재흥이다. 현리 전투 이전에는 미군이 작전권은 보유하고 있었지만 형식적으로나마 한국군 육군본부를 거쳐 명령을 내리는 식이었는데 목불인견의 패전을 목도한 이후 미군은 3군단을 해체해 버리고 모든 명령을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 내리도록 한다. 유재흥은 여기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고 호호백발이 되어서는 그 작전권을 미국이 계속 가져야 한다고 우겼으니 요즘 말로 “이건 뭐지?”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하겠다.
이 전투에서 특히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부대가 3사단과 9사단이었는데 9사단 소속의 한 포병 소위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된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에 입대한 홍안의 장교였다. 이름은 조창호. 그는 전쟁포로였지만 ‘석방’되어 인민군 특공대로 차출된다. 그는 여기서 탈출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한다. 13년을 살았으니 나름 장기수였다. 출감한 후 그는 조선인민공화국 공민이 되어 간호병 출신의 아내도 맞고 아이들도 여럿 낳아 기르게 된다. 하지만 삶은 순탄치 않았다.
탄광에서 일하면서 규폐증을 얻었고 사고로 왼쪽눈을 잃었다. 교통사고로 다리도 불편했다. 그리고 아내는 정신이상을 일으켰고 이혼했다. 아들 딸과 함께 터전을 잡은 곳이 평안북도 중강군. 우리나라에서 가장 춥다는 압록강가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조창호는 그의 말년을 바꿀 수 있는 끈을 잡게 된다. 북한을 드나들던 조선족을 통해 남한의 가족들과 끈이 닿은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가 운이 좋았던 것은 남한의 가족들은 꽤 유복하게 살고 있었고 북한이라는 금단의 땅에서 그를 빼낼 정도의 경제적 지원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그 사촌 중의 하나의 이름은 최필립. 얼마 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이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 선친의 이름을 말하고 싶지만 이 정권에선 금기라 관둔다.
조창호 소위는 북한에서 탈출해서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을 전전하던 그의 곁에는 남한의 신문사 기자였던 조카도 따르고 있었다. 배를 구해서 서해 바다를 가로질러 한국에 올 생각을 했으니 남한 가족들의 지원은 대단한 것이었다.
안기부 직원이었던 김기삼의 회고에 따르면 이 사실을 안기부 역시 알고 있었으나 도와 주려는 움직임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 사건이 터지면서 안기부는 그 태도를 180도로 바꾸게 된다. 그건 1994년 10월 일어난 성수대교 붕괴였다. 격포에서 배가 가라앉고 구포에서 열차 사고가 나고 목포에서 비행기가 떨어지던 사고의 연속의 시기, 급기야 한강 다리가 끊어지고 수십 명이 죽자 인심은 흉흉해졌고 고위층은 이를 덮을 뉴스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조창호 소위가 탄 배가 풍랑으로 실종되자 안기부는 전력을 다해 수색에 나섰고 마침내 조창호 소위의 배를 나포 (구조?) 하게 된다.
이후 스토리는 유명하다. 43년만에 귀환한 전쟁 포로 조창호 소위의 이야기는 화제의 중심에 선다. 국방장관에게 거수경례로 복귀 신고를 하는 노병의 모습은 연출된 흔적이 있을망정 감동적이었다. 전사자 명부에서 스스로의 이름을 지우고 중위로 승진했고 전역식을 가지게 되는데 위관급의 전역식 치고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호화판으로 치러졌을 것이다. 모교의 교장과 고위 관료와 기타 번쩍이는 별들이 총출동한 현장이 되었으니. 그의 사연은 차인표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그는 한국군 전쟁 포로가 북한에 남아 있다는 것을 알린 첫 번째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2등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삼성의 카피처럼,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넌 한국군 포로들은 그런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어떤 이들은 한국 대사관 직원들로부터 귀찮은 존재로 취급당하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조창호 중위는 행운아였다. 그 또래 수십만의 불행한 인생들에 비해서는......
그러나 조창호 중위는 불운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한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며 설득했지만 끝내 거절하고 북한에 남았던 자식들을 여생 내내 그리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함께 살던 가족들을 한 번은 타의로 한 번은 자의로 버려야 했던 인생이 어디 그리 흔했을까. ‘고난의 행군’이 북한을 휩쓸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를 떠나 보내던 아들과 딸은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앞서 언급한 김기삼에 따르면 남한의 가족들과 조창호 본인은 떠들썩한 언론 노출 등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남한 정부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탈북 무렵 조창호 소위의 나이는 예순 넷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경로 우대도 못받는 나이였다. 그러나 지금 그가 살아 있다면 여든 넷이 되고 그의 증언이나 기타 자료들에 나타난 한국군 출신 포로들은 이제 거의 죽었거나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변했다. 가끔 한국의 ‘진보’들이 좀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비전향 장기수들의 북한 귀환을 촉구하고 그것이 인도주의임을 설파하면서도 왜 북한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군 포로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되레 외면해 버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그 중의 하나다. “이념을 초월하여” 전쟁으로 인해 삶이 뒤틀리고 내팽개쳐진 사람들의 권리와 소망을 들어주는 것만큼 인도적인 일은 없지 않을까. 보수가 정략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한다면 진보는 인도적으로 그들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하지 않았을까. 허기사 탈북자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진보정당 당직자 자격 없다고 우기던 사람들에게서 뭘 기대할까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