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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4:22~29 / 성경적 십일조와 올바른 헌금관
(신명기 14장)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묵상/신 14:22~29)
◆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한국교회는 십일조를 무척 강조한다.
그래서 한국 교인들은 정의보다는 십일조에 더 큰 의무감을 가진다.
정의로운 그리스도인보다는 십일조 바치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더 인정받는다.
사이비 이론에 대해서도 관용하는 신자가 십일조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상을 바꾸지 않으려는 것을 보고,
종교인들의 세뇌가 참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올바른 십일조에 대해 배웠으면 한다.
각 백성은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바쳐야 했다(22).
십일조는 농산물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소나 양같은 것도 포함되었다.
소나 양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번 째마다 하나님께 돌렸다(레 27:32).
한마디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린 셈이다.
오늘날의 소득의 십일조는 어디까지일까?
책방에서 '온전한 십일조'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 보니 지인이 사과 한 상자를 선물하면
그것의 가격을 알아내어서 그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이 온전한 십일조의 자세라고 가르쳤다.
정말 그렇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온전한 십일조일까?
구약에서조차도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군대가 미디안을 쳐서 멸한 뒤에 탈취물들을 나누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명하신다.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이 얻은 탈취물의 오백분의 일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에게 주라고 했고,
백성들이 얻은 탈취물의 오십분의 일은 레위지파에게 주라고 하셨다(민 31:25-31).
십일조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국가에 세금바치듯이 십일조도 하나님 나라의 세금이라고 생각한다.
십일조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표시다(신 26:10, 잠 3:9).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레위지파에게 돌려졌다.
백성들이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을 섬기는 레위지파에게 준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은 십일조를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함을,
레위 지파는 십일조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감사함을 표시해야 했다.
레위지파가 백성들에게 직접 감사함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헌금이 아니라 구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십일조 중에서 함께 간 가족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할 것을 명하셨다.
오늘날에는 그런 행위는 마치 온전한 십일조를 떼어먹는 것처럼 비난받을 것이다.
삼년째되는 해의 십일조는 예루살렘으로 가져가지 말고,
각 성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레위지파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쓸 것을 명령하셨다(29).
나는 이 부분이 오늘날 교인들에게 각성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는 오로지 교회당에만 바쳐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그것은 종교인들이 만든 세뇌일 뿐, 성경적이 아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훨씬 더 유연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인들이 십일조의 절반만이라도 이웃을 위해 썼더라면,
한국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평가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어떤 형제는 크리스마스 때
자기 병원에서 일하는 용역자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헐어서 선물을 돌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병원에서 근무했지만, 의사에게 선물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감동했다.
이것은 성경적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29절)
◆ 신약적 헌금
신약에 와서도 십일조는 유효한가?
신약에 와서는 헌금의 양상이 바뀌었다. 이것을 모르고 구약시대를 흉내내서 드리면 안된다.
일단 율법적 십일조는 폐기되었다.
율법적 십일조는 레위지파에게 드려지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레위지파가 없지 않은가?
예수님 당시에는 레위지파도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다.
그래서 당연히 십일조는 드려져야 했으며,
예수님께서도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인용해서 신약시대에서도 십일조가 폐지되지 않았음을 애써 강조한다.
그것이야 말로 궤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제자들도 십일조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제자들도 단 한번도 십일조를 받은 적이 없음을 아는가?
당시에는 레위지파가 있었기에 유다지파이셨던 예수님이나 다른 지파였던 제자들이 십일조를 받을 수도 없었다.
만일 받았다면 그들은 즉시 율법을 어긴 죄로 처형당했을 것이다.
어떤 분은 목사나 선교사는 레위지파는 아니지만,
레위지파처럼 하나님을 섬기니 우리도 구약을 응용해서 그처럼 대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한다.
맞다. 그림자인 율법을 응용해서 이것 저것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드리되,
십일조를 받는 대상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십일조를 성경대로 하라고 강요하려면, 받는 대상도 성경대로 레위지파이어야 한다.
만일 레위 지파를 신약적으로 해석하려고 든다면, 레위 지파는 목사나 선교사로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며(계 1:6), 모든 성도가 다 주의 종이다.
따라서 신약적으로 해석하려면, 성도의 십일조는 모든 성도에게 향해야 한다.
신약시대에 와서 사도 바울은 올바른 헌금관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나는 십일조라는 율법적 용어를 사용하지 말기를 권한다.
많은 사람이 정확하게 '십분의 일'이 아니면서도 십일조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고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무려 십분의 오를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었다.
비율의 문제가 아니라 정직의 문제다. 이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십일조라는 말이 타당한가?
우리 교회는 마음에 정한 헌금이란 의미로 '심정헌금'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어떤 교회는 '사랑의 실천 헌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비록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소득의 십분의 일을 일정하게 바치는 일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다.
이런 헌신 때문에 교회가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사역자들과 형제들이 공동체를 통해 힘을 얻는 것이다.
다만, 십분의 일이라는 강제규정에 매이지 말고, 각각 마음에 정한 대로 하자.
가난한 사람은 백분의 일을 해도 되지만, 부자는 십분의 일도 모자르다.
연초에 헌금 비율을 마음에 정하고 일년 동안 실행해보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해서(눅 16:14) 십일조를 약대로,
공의와 자비와 믿음을 하루살이로 취급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순위를 바로 잡으셨다.
공의와 자비와 믿음이 약대이며, 십일조는 하루살이다(마 23:23-24).
오늘날 십일조를 신자의 최대 의무인 것처럼 포장하고,
십일조 떼어먹는 도둑놈이라고 일갈하며 공포감까지 조장하는 교회는 솔직히 무지한 교회다.
이런 교회에서 종교인으로 사느니, 과감하게 나와서 제대로 된 공동체를 찾을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일은 믿음이 없는 종교인들은 십일조를 안 바쳐도 된다는 말에는 무척 기뻐하지만,
그보다 정의와 자비와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정의와 자비와 믿음을 실천하려고 하고,
물질을 통해서 주님 사랑과 공경을 표시하려고 할 것이다.
소득의 일정부분을 따로 저축하자(고전 16:2).
구약의 성도들이 십분의 일을 했다면, 적어도 신약의 성도는 더 헌신되고 더 충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헌금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자.
예배 시간에 예배당 헌금통에 넣어야만 헌금이 된다는 사고방식을 버려라.
신약에서는 그런 식으로 헌금을 정의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신약에서는 진정한 헌금이란,
어려운 형제들을 돕는 것(마 25:40),
가난한 이웃이나 친척들을 돌보는 것(눅 12:33, 딤전 5:8),
사역자들을 후원하는 것(빌 4:18),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사명을 이루는 데 함께 하는 것(마 28:19-20) 들이다.
아끼지 말고, 인색하지 말고, 억지로 하지도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주는 삶을 살자.
하나님께서는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셨다(고후 9:7). 아멘.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아멘.
[출처] 신 14:22-29 / 성경적 십일조와 올바른 헌금관|작성자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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