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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천모임(신약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기독네티즌
세월을 아끼라(에베소서 5:15-21)
(에베소서 5장)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묵상/ 엡 5:15-21)
◆ 세월을 아끼라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성도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어떡해야 하는가에 대해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조언을 하고 있다.
'세월을 아끼라' - 이 말은 오해받기 쉽다. 일벌레들은 이 말을 열심히 일하고, 노는 시간이 없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과연 이 말씀이 쉬지 않고 일하라는 의미일까?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 '엑사고라조'인데, '에크'는 '~~으로부터'라는 의미이고, '아고라조'는 '시장에 가다'인데, 한마디로 '시장에 가서 사 오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이 단어를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에서 '속량'으로 번역했다. 노예 시장에 붙잡혀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해방하셨다는 의미다. 영어 성경은 '아끼라'나 '속량'이나 일관되게 'redeem(되찾다)'로 번역했다.
따라서 '아끼라'는 말씀은 엉뚱하게 쓰이고 있는 시간을 보람된 시간으로 되찾아오라는 의미다. 인터넷 기사에서 오만가지 잡다한 뉴스를 읽는 데는 아낌없이 시간을 투자하면서 정작 하나님 말씀을 읽는 데는 5분도 투자하기를 아까워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천둥처럼 울려야 한다. 쓸데없이 낭비되는 시간 중의 일부라도 되찾아서 말씀에 투자해보라.
어떡해야 세월을 아끼는 것일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는 시간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그것은 사역이나 일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 가령 나이가 구십이 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내가 주님을 묵상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나는 알차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며,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다음의 말씀들은 세월을 아끼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론으로만 알지 말고, 실제로 결심하고 실천하자.
◆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8)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담대해진다는 점이다.
성령 충만하면 담대해진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전한다. 이런 점 때문에 성령 충만한 사람은 종종 술 취한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차이점은 술 취하면 판단 능력이 떨어지고, 방자해지며, 방탕해지는데, 성령 충만하면 판단 능력이 뛰어나게 되고, 직관이 발달하며, 관용의 마음이 생긴다.
성도들은 성령 충만하면 행복해진다. 모든 것을 가진 느낌이며, 세상의 누구도 부럽지 않다. 그리고 믿음이 충만해지니 기도 응답의 확신이 생기고, 예배가 기쁨이 된다. 그러나 자칫 교만하게 되면 성령 충만이 사라지니 조심해야 할 일이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충만을 일시적인 성령 충만과 지속적인 성령 충만으로 나누어서 설명했다. 일리 있는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일시적인 성령 충만은 스나미처럼 몰려와서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되지만, 지속적인 성령 충만은 감정적인 부분보다는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의 진심을 잃지 않는 삶으로 이어진다. 사도바울은 지속해서 성령 충만했는데, 가끔 일시적으로 더욱 충만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기도 했다(행 13:9).
그런데 어떤 성도는 평생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해보자. 쓸데없는 것을 버킷리스트에 넣지 말고, 성령 충만을 버킷리스트에 넣어라. 이런 것을 체험해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것이야말로 정말 후회할 일이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신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무릎꿇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원하시고, 내가 원하는데 성령 충만하는 것이 어려울 리가 있겠는가? 문제는 내가 진심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세속적인 마음과 아집을 회개하고 주님께 성령 충만을 구하자.
◆ 신약 시대의 예배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오늘날 교인들의 예배는 도저히 예배라고 할 수가 없을 정도다.
예배는 모름지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늘날 신자들은 자신들이 예배를 받고 있다.
오늘 설교가 참 좋았다.
오늘 성가대 노래가 감동이다.
오늘 찬양 인도가 참 인상적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좋은 말들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예배의 초점이 누구를 향하고 있느냐이다. 도대체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한 예배란 말인가? 예배를 드린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지,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이런 수준이니, 설교는 사람의 기호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찬양도 사람의 기분에 맞추게 된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찬양보다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는 찬양이 더 많다. 기도, 간증, 회개…. 모두 좋다. 그러나 정작 예배받으셔야 할 하나님은 실종되고, 오로지 내 마음을 위로하는 찬양, 교양 강좌처럼 생활에 유익한 설교, 기분 좋은 교제 등으로 꽉 차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예배가 어떠해야 함을 아주 잘 알려주고 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당신은 예배 시에 주님을 시로 높이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찬양하고, 영으로 노래하는가?
온통 하나님을 높이는 것으로 꽉 찬 예배를 드려보았는가?
어떤 사람은 예배의 핵심이 '설교'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사실 예배의 핵심은 설교가 아니다. 충격이겠지만, 사실 그렇다. 설교가 쓸데없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에게 매우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에 포함될 것이 아니라, 예배와 별개로 다룰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를 연구한 로버트 뱅크스와 같은 신학자는 초대교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설교'가 없었다고 한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가끔 교사들이 나타나면 그들의 가르침을 들었다고 했다. 설교 중심의 예배 형태는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된 후에 생긴 전통이라고 한다. 당시 로마 사람들의 오락 중의 하나가 웅변을 듣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드려지는 예배가 즐기는 예배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배의 핵심이 설교라고 믿으니까, 예배 모양을 갖추기 위해 설교하는 시간을 넣는다. 가정예배에서도 설교, 구역예배에서도 설교…. 설교가 넘쳐난다. 설교를 빼고 예배를 주님을 경배하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시간으로 채우면 왜 안 되는가? 하긴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어있으니, 찬양과 경배가 신날 수가 없을 것이다. 찬양하는 것보다는 그냥 잡담이라도 나누는 것이 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면 그것이 예배에 포함되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설교는 정말 한심할 정도다. 그 아까운 시간에 정치 선동이나 하고 있고, 설교자가 자기 신변잡기 이야기나 하고 있다. 그래도 교인들은 웃으면서 '아멘'을 남발하니 야바위꾼 설교자들이 더욱 날뛴다. 찬양까지는 은혜로웠는데, 설교자가 나서서 자기를 불편하게 한 성도들을 야단치느라 온 교회를 얼어붙게 한 교회도 있다고 들었다. 이것은 하나님께 범죄다. 하나님의 제단에 돼지 피를 뿌리는 격이다. 나는 설교자들의 상당수가 예배 방해죄를 범하고 있다고 믿는다.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은혜에서 멀어지게 했으니 그 죄가 어찌 작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구색 맞추기 위해 억지로 설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예배드린 후에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나는 전심으로 예배를 드렸는가?
남을 의식하지 않고 내 마음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했는가?
찬양할 때 마음을 다했는가?
만일 이 질문에 '아니오'가 된다면 당신은 예배드린 것이 아니다. 회개해야 한다.
◆ 범사에 감사하라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 것'을 요구하셨다(요 4:24). 그것은 예배 시간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진리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예배자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바로 교회의 예배다.
평소에 영과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을 가질까?
'범사에 감사하는 자'들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특별히 좋은 일에만 감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이번 승진에서 내 이름이 빠졌어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하는 자가 진정한 성도다.
'하나님 아버지, 이 일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선하시다는 사실과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감사합니다.'
◆ 피차 복종하라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형제를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섬기려고 하자. 그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 내가 성경을 가르친다고 선생 노릇 하려고 하지 말자. 선생님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며 우리는 모두 동기들일 뿐이다(마 23:8). 사도 바울처럼 '돕는 자'(고후 1:24)로 형제들에게 다가가자. 그것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의 올바른 태도다.
주님,
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세월을 아끼며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출처] 엡 5:15-21 / 세월을 아끼라|작성자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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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천모임(신약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기독네티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