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존의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제고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고구려의 적국이었던 신라와 중국 측의 기록만이 남아있다. 그러니 이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특히 중국의 역사서술 특징은 춘추필법(자국의 수치스러운 역사는 숨기고, 중국의 역사는 높이고 외국 역사는 깎아내리는 전형적인 역사왜곡 수법)이다. 그러니 중국 특에서는 당나라 군대를 괴멸시킨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한 가지 웃긴 것은 당 태종이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자, 안시성주가 연개소문 정변이 일어났을 때도 저항을 하여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연개소문이 안시성주의 성주 작위를 수락하고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여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걸 우회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소가 웃을 노릇이다. 연개소문에 대항하던 안시성주가 어찌 당에 저항을 하겠는가? 또한 연개소문 정권을 안시성주가 반대했다면,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을까? 이는 한 마디로 말해 자신들의 패전을 숨기려는 중국인들의 못된 습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중국 측의 기록에 답습하지 말고 옥석을 구별해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는 연개소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조대기에 가로되)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義表雄偉)하고 의기호일(意忌豪逸)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마시며, 무리 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에는 반드시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 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緯)로 삼고, 하늘을 경(經)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온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써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없이 모두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삼국사기』 「열전」을 보면 연개소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의표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기가 장하여 작은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송나라 신종(神宗)이 왕개보(왕안석)와 국사를 의논할 때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다가 어째서 이기지 못했는가?'하니 왕개보는 '개소문이 비상(飛上)한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고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소문도 또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기록을 볼 때 연개소문은 무자비하고 포악한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국난에 처한 고구려를 구한 영웅이자., 부하들과 백성들을 사랑한 정치가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패자는 역사에 아무런 말도 못하는 법이다. 승자인 당과 신라는 자신들의 기록을 남길 때 그들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을 흉포한 인물로 깎아내렸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껏 알고있는 연개소문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지양하고 객관적으로 연개소문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2. 연개소문과 다섯자루의 칼
삼국사기를 보면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중국 사서를 인용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씩이나 차고 다녔다는 것에 대해 독재자로서의 위엄과 과시를 나타낸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니는 것이 연개소문이 독재자의 증거가 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독재만 생각했지, 왜 그가 칼을 다섯 자루 씩이나 차고 다녔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연개소문은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그 답은 바로 『한원』이라는 사서에 있다. 『한원』 「고려조」에는 고구려 남자들이 허리에 은띠를 차는데,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고구려 남자들은 무엇 때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이를 밝혀줄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다음과 같이 유추할 수 있다. 구당서를 보면 고구려에서는 혼인 전 자제가 경당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나라이니, 아무래도 일반 백성들의 무술 연마에 사용했을 것이다. 즉 이 칼은 장식품이 아니라 생활상의 필요와 함께 성인이 되고 나서도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등 각종 무술을 연마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로 쓰였을 것이라 추측해볼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는 것은 삼국사기 개소문전에 기록된 대로 독재자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고구려 남성들의 평범한 일상사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가지고 독재자의 증거로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가 아닐 수 없다.
3.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 요청을 거절했나?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신라가 구원요청을 하러왔을 때 신라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한 걸 가지고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그가 왜 무슨 목적으로 신라의 구원을 거절했으며 왜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달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과연 연개소문은 왜 신라의 구원을 거절했을까?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구원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신라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돌려주는 문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고구려의 안보와도 직결되는 백제 때문이었다. 고구려는 더 큰 이득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는 신라 대신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를 보면 의자왕이 643년 11월에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을 취해 신라가 당과 통하는 길을 막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가 철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었음을 가리키는 기록이다. 양국이 동맹을 체결하고 공동 출병을 했다는 것은 643년 11월보다 이른 시기에 두 나라 사이에 교섭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협상하러 간다는 사실을 백제에서 알았다면, 백제 또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협상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김춘추에 대한 정보를 얻게된 것은 혹자(或者)를 통해서이다. 혹자, 즉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필시 고구려인이 아닌 백제인일 가능성이 크다. 신라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갔고 있던 백제가 고구려-신라간의 협상을 결렬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김춘추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은 크다. 이런 가능성을 좇는다면 연개소문은 백제와 신라 양국을 저울질하면서 어느쪽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한 가를 판단했을 것이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당과 일전을 겨룰 것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동맹국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선택된 국가가 백제였다. 당시 백제는 신라보다 국력이 강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할만큼 해양강국이었다.
만약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한다면 백제는 당과 연합을 할 것이고, 그리 된다면 고구려는 서해 상에서 적의 군대를 막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안보 차원에서 백제를 선택하는 것이 신라를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는 백제를 동맹국으로 선택함으로써, 자연히 왜국과의 교섭 또한 활발해졌다.10)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을 맺자, 신라가 왜국과 교섭할 것을 우려해 왜국과의 외교 정상화에도 빠르게 움직인 탁월한 외교가이기도 하였다.
한가지 말해둘 것은 김춘추가 거짓으로 고구려의 옛땅을 돌려준다는 편지로 고구려로부터 빠져나온 것을 가지고 연개소문을 구전 설화인 구토설화에 나오는 용왕과 비유하여 어리석은 인물이라 치부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당의 대군을 물리친 전략의 귀재인 연개소문이 그깟 한낱 어린애의 말장난을 믿었으랴...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놓아준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춘추는 협상실패로 인해 정치적 입지가 고구려에 가기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게다가 고구려인의 반(反) 신라 감정이 고조되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전선이 구축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결국 연개소문은 김춘추에게 속은 것이 아니라 더 큰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그를 놓아준 것이며, 협상을 통해 충분한 실익을 얻은 셈이었다.
4. 연개소문, 만리장성을 넘어 저 멀리 강소성까지 가다
안시성 싸움에서 패배한 당군은 결국 퇴각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안시성 싸움에서 고구려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지금의 북경지방을 차지했다는 전설과 함께 연개소문이 저 멀리 산동성과 강소성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는 전설이 내려져오고 있다.
“연개소문은 요동의 싸움을 양만춘 · 추정국 두 사람에게 맡기고 정병 3만으로 적봉진(赤峰鎭:상곡, 지금의 하간) 등지를 습격하니 당의 태자 치(治:당 고종)가 어양(漁陽)에 머물러 있다가 크게 놀라 급함을 알리는 봉화를 들어 횃불이 하룻밤에 안시성까지 연락되었다. 당태종은 곧 임유관(臨渝關:산해관) 안에 변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곧 군사를 돌이키려고 하였다. 오골성주 추정국과 안시성주 양만춘은 그 봉화로 연개소문이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음과 당태종이 장차 도망할 것을 짐작하고 추정국은 전군을거느리고, 양만춘은 성문을 열고 급히 내달아 공격하였다.
(중략)
“연개소문이 지나(支那:중국)에 침입한 것도 기록에는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오늘 북경 조양문(朝陽門)외 7리지(里地)의 황량대(詤糧臺)로 비롯하여, 산해관까지 이르는 동안에 황량대라 이름하는 지명이 10여 처인데, 전설에 ‘황량대’는 당 태종이 모래를 쌓아 양식을 저장해놓은 것이라고 속여 고구려 사람이 습격해오면 복병으로 맞아 공격한 곳이라 하니 이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북경까지 추격한 유적이고, 산동(山東) · 직예(直隸:하북성) 등지에 띄엄띄엄 고려(高麗) 두 글자를 위에 붙인 지명이 있어 전설로는 그것이 다 연개소문이 점령하였던 곳이라고 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북경 안정문(安定門) 밖 60리 쯤에 있는 고려진(高麗鎭)과 하간현(河間懸) 서북쪽 12리쯤에 있는 고려성(高麗城)이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지역 깊숙이 들어갔다는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북경시 순의현의 고려영(高麗營) 유적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채호는 고려영은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성으로 보았다. 『북경 순의현지』에는 당나라 때 지금의 북경에 고구려인이 이주해왔다는 단 한 줄의 기록이 남아있다.
연개소문이 북경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을 넘어야했다. 그런데 당시 만리장성은 그리 대단한 장벽이 아니었다. 5호 16국시대, 남북조 시댕 많은 북방민족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만리장성같이 일직선상에 쌓은 성은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적군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성으로서의 의미를 잃는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기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었을 것이다.
최근 북경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북경 동북쪽의 황량대에서 ‘고려포보(高麗鋪堡)라 새긴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는 연개소문의 중원지역 공략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구려 정복을 운운하던 당 태종이 이런 쇼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적어도 1일권 안에 있었음을 반증한다고 했다. 그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군이 활동하던 것은 북경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있어 보인다.
그런데 위의 전설 말고 산동성과 강소성에는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이 무려 6가지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① 산동성 봉래시의 전설: 봉래 인근에서 당 태종과 연개소문이 전쟁을 벌였는데 이 때 당태종의 형이 전사를 한다
② 산동성 즉묵시의 전설: 당 태종이 산동성 즉묵 마산에서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어 사로잡힐 뻔 할 때 신라출신 용양장군 김걸이 당 태종을 구하고 자신은 연개소문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는 전설
③ 강소성 비주의 전설: 고구려군과 당의 설인귀군 간의 격전
④ 강소성 숙천의 전설: 연개소문이 당의 설인귀군과 전쟁에서 연전연승했다는 전설
⑤ 강소성 염성: 염성 건호현에는 몽롱탑(蒙朧塔)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달아나다가 거미줄이 쳐진 빈 우물에 숨어 살아났는데 나중에 이 은공을 잊지 못해 그 우물이 있는 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어둡고 어려움(朦)에 처해 있을 때 우물 속 거미줄이 몸을 보호해 줘 목숨을 건진대서 몽롱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⑥ 강소성 금호: 고려성이 있는 지역
위의 전설들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수군으로 중원의 산동.강소성 일대를 대대적으로 침략을 했으며이에 당태종은 친히 정벌코자..나섰지만도리어 연개소문에 전략에 휘말려 당태종 자신이 죽을 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위 전설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 지역에 한 인물에 대해 그것도 6가지나 내려오는 건 어찌 설명해야 할까? 현학계에서는 이런 사실을 얼토망토 않은 사실이며 또한 기록에전하는 바가 전혀 없다 하여 한같 재야사학의 엉뚱한 주장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설로만 치부하기에는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너무 많다. 위의 전설 말고 어니하, 독목관, 분하만 등 연개소문에 관련된 전설은 중국 각지에 퍼져있다.
중국은 소위 춘추필법이라고, 자국의 불리한 역사는 기술하지 않았다. 일례로 고구려와 후한의 대전쟁인 좌원대전 역시 기록하지 않은 그들이 과연 그들이 우러러보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겼다는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을까?
연개소문이 고구려 수군을 통한 중원 정벌시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흔히 고구려하면 막강한 기마병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당시 강력한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수군을 활용하여 백제와 후연을 굴복시켰고, 고수대전 시 건무(영류왕)는 수군으로 패강에서 수나라 수군을 몰살시켰다. 게다가 보장왕 때 고구려는 신라와 당의 교역을 방해했는데 이는 강력한 수군이 뒷받침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연개소문의 수군을 통한 중원에 심장부로 통할수 잇는 요충지산동과 강소성일대 침공은 그냥 전설일까? 전설역시도 그 이유와 원인이 있으니전하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쓰여지기 때문에 오히려 위와 같은 전설, 신화 등이 그 역사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본다. 연개소문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그리고 연개소문이 위 지역에서 얼마나 큰 활약을 떨쳤으면 연개소문과 관련된 전설이 저 멀리 중국 산동성과 강소성 일대에 나타날까?
위와 같은 전설을 단순한 전설로 치부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분명 연개소문이 위 지역에 쳐들어갔고, 그랬기 때문에 위와 같은 전설이 남아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어니하라는 전설에서는 어니하에서 당 태종의 말이 진흙수렁에 빠져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사로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강소성 몽룡탑 동북방에 세니하라는 강이 있는데 이 세니하가 어니하에 등장하는 어니하는 아닐까?
참고로 현재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한단고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도망가는 당 태종을 추격하여 결국 당 태종을 사로잡아 수도 장안성에서 당 태종의 항복을 받고, 하북, 산서, 산동, 양쯔강 이북을 전쟁 배상으로 받아냈다고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한단고기는 위서라며 위 내용은 거짓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 태종이 고구려 침공 실패 이후 연개소문에게 궁복을 내렸는데, 연개소문이 이를 받고도, 당 태종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기록과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고구려 사신이 가지고 온 글 또한 궤변으로 가득찼음, 당나라 사신을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고구려가 전승국으로서, 당에게 전쟁 배상을 물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승국인 고구려가 패전국인 당으로부터 전쟁을 일으킨 대가로, 당의 영토를 이양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노릇이다.
즉, 당 태종의 항복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구려가 당의 영토를 차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였다는 기록은 무엇을 말할까? 혹시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지는 않았을까? 물론 이 기록은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려는 저의에 빚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을 했기 때문에, 연개소문이 당에 대해 그들의 기록대로 교만하고 오만하게 대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로 어니하에 빠진 당 태종이라는 전설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어니하에서 당 태종을 사로잡아 당 태종을 위협하며 항복문서 쓰라고 강요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런 내용의 전설이 남아, 소설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이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중국이 역대 최고의 황제로 숭상하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붙잡혀 항복문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전설이 내려올 수 있을까? 이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항복문서를 바쳤다는 것과 더불어 넒은 중원대륙을 고구려와 당이 양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당 태종의 항복기사를 다룬 『한단고기』는 그 내용 자체가 역사적 사실면에서 세인으로부터 찬반론을 일으키고 있고, 요동침공 관련 기사에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국 사서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당 태종과 요동침공 관련 기사의 석연찮은 태도나 삼국사기의 미묘한 의문 등을 보건대, 『한단고기』의 관련 기사를 무시하기보다는 일단 관심을 갖고 검토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연개소문을 중국인의, 신라인의, 유학자의 눈이 아닌 고구려인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기상을, 고구려인의 발자취를 저 멀리 중원에 떨친 일대의 호걸이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고당대전이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간 것은 비단 고구려와 당뿐만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 정세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이 패전함으로써, 동방지역(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동쪽지역)을 직접 영유하려던 당의 계획은 좌절되었는데, 이는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문화권, 당 중심의 천하질서로 묶으려던 당의 계획이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고당대전의 승리로, 고구려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동방의 패자임을 실력으로 입증한 셈이다. 고당대전의 승리는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승리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고당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개소문이야 말로 “조선 4천년 역사상 첫째 가는 영웅”이라 할 만하다.
참고문헌 및 사이트
신채호, 조선상고사 이덕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김용만,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서병국. 대제국 고구려사 서병국, 고구려인의 삶과 정신 임승국, 한단고기 역사스페셜 www.coo2.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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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글쓴이 : 이문규 / 2006-05-29 오후 1:3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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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여 우리의 역사인 고구려사를 자국사라 해석하고, 빼앗아가고 있다. 이는 김씨가 이씨의 집에 살고 있으니 이씨의 족보는 내 것이다라는 억지 주장과도 같다.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우리 국민들의 고구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고구려와 관련된 드라마(연개소문, 주몽, 대조영, 태왕사신기:개인적으로 맘에 안드는 작품이 바로 이 태왕사신기이다. 김 진 작가의 바람의 나라 모방, 어처구니 없는 배우 설정,, 배용준이 광개토태왕 역을 제대로 소화할 것 같나?)들이 방영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연 고구려 그것도 고구려 말기의 집권자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고구려를 영류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차지한 독재자라 치부하고 그를 고구려 멸망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있다. 고구려사를 새롭게 쓰자고 하는 현 강단학계도 연개소문에 대해 7세기 동아시아의 급변적 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가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그것에 맞추어 비판하고 있으니 당연할 수 밖에...
하지만 필자는 연개소문은 새롭게 재평가 되어야 할 위인으로 본다. 그리고 그는 필자가 존경하는 위인 중에 몇 안되는 위인이다.
만약 연개소문이 정변에 실패하고 영류왕이 계속 정권을 잡았더라도, 고구려는 이미 외교적으로 고립이 되어 있었고 이후 당태종의 동북아 제패야심에 의해 결국 사대의 예를 갖추다가 결국 멸망을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대개 연개소문에 대해 비판적 시각과 평가를 내리는자들의 공통분모는 다음과 같다.
/ 영류왕을 시해한점... / 그로 인해 당에 침략에 구실을 줬다고 이유를 되는 점 / 독재를 단행했다는 점 / 고구려 멸망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들을 / 마지막으로 경직된 외교정책
위에 열거한 것들을 공통으로 든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과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왕을 시해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포악한 사람, 영류왕은 그런 포악한 사람에게 시해당한 불쌍한 군주, 평화를 사랑한 군주로 알고 있는데 이는 큰 오산이다. 당시 영류왕은 고구려의 외교노선과 반하는 외교노선을 택했고, 국제정세에도 어두운 멍청한 군주였다.
일례로 그는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를 당에 보냈다. 국가의 기밀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를 보낸 임금이 제정신이라 생각하는가? 게다가 당시 당이 구축한 세계질서, 주변 북방민족과의 관계등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본다면 영류왕은 중요한 국제정세에 둔감했고 고구려는 점차 위기를 맞이할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고구려와 당의 전쟁 시 중요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돌궐이 당에 멸망하자 당에 사신을 보내 축하를 했다. 이는 선대왕인 영양태왕과 대비된다. 영양태왕은 수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주변 국가와의 연대를 돈독히 했는데 영류왕은 자신의 잠재 적국인 당과의 전쟁시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돌궐을 멸망시킨 것에 대해 축하나 하는 한심한 추태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그는 고구려의 상징인 전승기념관 경관을 헐어버리고, 진대덕이 내방했을 때 진대덕으로 하여금 고구려 기밀을 알릴 정도(물론 직접 알린 것은 아니다. 진대덕이 뇌물로 고구려 관리를 매수하여 고구려의 기밀을 알았다. 하지만 이런 자들을 관리로 둔 영류왕은 고구려 기밀을 알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간신배들을 등용한 군주였다)로 멍청한 임금이었다. 불안한 국제정세와 멍청한 군주의 실정....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멍청한 군주 영류왕을 시해한 것이다.
고구려 멸망이 연개소문 단 한 사람에게만 있을까? 물론 모든 권력이 연개소문에게 집중됨으로써, 연개소문 사후 그 아들들간의 다툼으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멸망 징조는 선대왕인 영류왕의 실정으로 인한 내부문제에서 싹틔웠다고 볼 수 있다. 선대의 영류왕의 실정으로 인한 고구려 멸망의 근본적 내부문제와 그로 인한 멸망에 단서를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을 핵심문제로 부각 7세기 한반도에 운명을 패인을 모두 연개소문에 뒤집어 쒸우려는 속사정도 결코 없다고는 볼수 없다.
역사에는 사면되고 복권되어야 할 위인들이 많다. 단지 패자라는 이유로 오욕을 뒤집어쓴 위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안타까운 영웅이 바로 연개소문이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무인이자, 정신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 한반도는 당나라의 야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천가한이라 자처하며 주변 유목종족을 정복하여 동아시아 재패라는 망상에 꿈꾼 그의 야욕을 잠재운 연개소문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이 나라의 역사는 중화족의 더러운 칼 날 아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미친 아이 당 태종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연개소문 밖에 없었다. 신채호가 평가한 대로 그는 조선 4천년 역사상 제일 가는 영웅이었다. 민족을 구한 영웅을 난신적자로 표현하는 작자들의 붓장난에 놀아나야 되는가?
역사는 과거의 현재의 대화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강단학계의 주관적, 독단적 역사 해석이 과연 역사를 옳게 보는가? 이는 역사가 가진 속성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어긋난다. 이제부터 우리는 연개소문 그를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정립이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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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글쓴이 : 이문규 / 2006-07-13 오전 11:5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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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왕을 죽인 난신적자면 명림답부, 창조리도 난신적자인가?
우리는 연개소문을 희대의 독재자, 고구려 멸망의 주역이라 인식하고 있다. 해방 후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을 무도한 난신적자라 가르쳐왔다. 게다가 고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그들의 유교 이념에 맞추어 임금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를 멸망하고 고구려에 대한 기록을 적국이었던 당과 신라가 기록함에 따라 고구려의 진정한 역사는 알려지지 못했다.
적국의 붓에 의해 연개소문은 의도적으로 폄하되었고, 그렇게 폄하된 연개소문이라는 군상이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임금을 시해한 역적 운운하는데, 고구려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왕을 죽인 신하들이 여럿 있다.
모본왕을 시해한 두로, 차대왕을 시해한 명림답부, 봉상왕을 폐위시킨 창조리 등이다. 근데 이들에 대해 독재자, 난신적자, 극악무도한 패륜아라 하는 사람이 있는가?
유독 연개소문에게만 패악하고 포악한 독재자가 끊임없이 붙어다닌다.
이는 연개소문이 당시 적국인 당을 공격한 유일한 인물이었고, 자신들이 성군이라 추앙받는 당 태종을 무너뜨린(개관광시킨:디씨 햏자들 어법을 따르면)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이 무도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임금을 시해하고 폐위시킨 위 인물들 역시 그러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는 연개소문과는 사못 다르다. 명림답부는 폭정을 행한 차대왕을 시해하여 고구려를 국난에서 구했고, 좌원에서 한나라군을 몰살시킨 명장이라 칭송을 받는다. 창조리같은 경우는 미천왕을 옹립시키고, 백성들을 구한 국상이라 평을 받는다.
모본왕을 죽인 두로는 그 벼슬이 시종인 점을 미루어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모본왕을 죽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모본왕은 한나라를 공격하여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차지한 정복군주의 위상을 보여준 용맹한 군주였다. 게다가 가뭄이 들자 나라 곡식으로 백성을 구제할 만큼 현군이었다. 이런 군주가 단지 폭군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위의 열거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당의 침입을 분쇄시키고 당을 공략한 고구려의 자랑 연개소문은 그러한 대접을 받기는 커녕 무도한 인물이라는 수식이 붙어다닌다. 이는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가 망하고, 고구려가 망한 후 연개소문의 적이었던 당과 신라가 고구려 사적을 불태우고, 그에 대한 의도적 깎아내리기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왜 모본왕, 차대왕, 봉상왕은 시해를 당했을까?
모본왕은 그 성이 해씨라고 한다. 고구려 초기 역사를 살펴보면 초기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배출되다가 계루부에서 왕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고구려 6대 태조대왕 때부터 고씨에 의한 왕위계승이 이루어진다. 그의 시호가 태조인 것도 그가 고씨의 천하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결국 모본왕은 소노부의 해씨세력 임금으로, 계루부의 고씨 즉 궁(태조)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차대왕과 봉상왕은 왜 축출당했을까? 그건 바로 왕권강화와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차대왕은 태조대왕 시절 한나라를 자주 공격하여 맹위를 떨친 장수요, 왕의 동생이었다. 반강제적으로 왕위에 오른 그는 자신의 왕권강화를 꾀했고, 이 과정에서 반정에 참여한 어지류, 양신 같은 이들이 명림답부 편에 붙었다.
봉상왕 역시 숙부 달가, 동생 돌고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만큼, 그 역시 왕위를 강화하려 했을 것이다. 무리한 토목공사를 행한게 그 증거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호족공화제를 그 정치로 삼았다. 이는 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귀족간의 합의에 의한 정치체인데 왕권이 강화된다는 것은 곧 호족공화제가 약화됨을 뜻한다. 결국 차대왕과 봉상왕은 왕권강화를 반대하는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영류왕은 왜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연개소문이 권력에 욕심이 있어서일까?
그건 바로 영류왕의 정책 때문이다.
패수대첩의 영웅 건무는 영양태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바로 영류왕인데, 그는 수가 망하고 들어선 당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강경파라 하는데 이는 삼국사기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독단적,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가 강경파라는 주장은 근거없는 낭설일 뿐이다.
영류왕은 북수남진책(북쪽은 지키고 남쪽으로 진출한다)
연개소문은 남수북친책(남쪽은 지키고 북쪽으로 진출한다)
이 상반된 정책을 취했다.
즉 영류왕은 당과의 화친을 주장한 반면, 연개소문은 당은 침략해올게 뻔하니 당과의 전면전을 대비하자고 했다. 하지만 영류왕은 당과의 화친책에만 신경쓸 뿐 정작, 그 대비책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에서 전승대탑인 경관(수나라 전사자 유해를 모아 쌓은 탑)을 헐어버리라 명했다. 이는 고구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요, 동시에 고구려의 국정을 간섭하는 행위다. 당시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이라 자처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류왕은 국가의 자존심을 짓밟아 가면서까지 경관을 파괴했다.
이로 인해 그는 백성들과 무장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더불어 그는 노자의 도덕경 등 도교 수입에 적극 권장했다. 도교는 그 가르침이 무위자연이다. 즉 모든 것은 자연에 돌아간다는 사상인데 자칫하면 이는 고구려의 상무정신(다물정신)을 해할 수 있었다.
한심한 건 고구려의 지도인 봉역도를 당에 바친 것이다. 물론 영류왕으로서는 봉역도를 보냄으로써, 고구려가 당과 전쟁을 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비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이 어느 한쪽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서 안 일어나는가? 당은 호시탐탐 고구려 침략을 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류왕은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영류왕은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당시 당이 구축한 세계질서, 주변 북방민족과의 관계등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본다면 영류왕은 중요한 국제정세에 둔감했고 고구려는 점차 위기를 맞이할수 밖에 없었다. 그는 고구려와 당의 전쟁 시 중요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돌궐이 당에 멸망하자 당에 사신을 보내 축하를 했다. 이는 선대왕인 영양태왕과 대비된다. 영양태왕은 수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주변 국가와의 연대를 돈독히 했는데 영류왕은 자신의 잠재 적국인 당이 전쟁시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는 돌궐을 멸망시킨 것에 대해 축하나 하는 한심한 추태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견해 차이, 그리고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영류왕의 실정으로 연개소문은 고구려가 머지 않아 망할 것이라 예측하고 그를 시해한 것이다. 그리고 늦었지만 고구려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
연개소문은 설연타를 포섭하였고, 백제와 동맹을 맺어 전쟁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고, 결국 645년 안시성에서 그들을 물리친 뒤 지금의 북경, 어양 등지를 휩쓸었다. 그리고 북경 인근 지방에 고려성을 쌓아 북경 인근 지방을 고구려 영토로 정했다.
고구려의 기상을 중원에 진동시킨 연개소문
하지만 그에게는 항상 왕을 죽인 난신적자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고구려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을 죽인 신하들이 있었다. 전체적인 틀을 살펴보지 않은 채 무조건 그를 비난하는게 과연 옳은 일인가?
신채호 선생의 말대로 그는 과보다는 공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없었다면 정신병자 전쟁광 이세민을 막을 자가 누구였을까?
역사에는 사면되고 복권되어야 할 위인들이 많다. 단지 패자라는 이유로 오욕을 뒤집어쓴 위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 제일 안타까운 영웅이 바로 연개소문이다. 그는 고구려의 마지막 무인이자, 정신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우리 한반도는 당나라의 야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과거의 현재의 대화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중국측과 신라측의 붓장난에 놀아나며 연개소문에 대한 주관적, 독단적 역사 해석이 과연 역사를 옳게 보는가? 이는 역사가 가진 속성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 어긋난다. 이제부터 우리는 연개소문 그를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 정립이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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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글쓴이 : 이문규 / 2006-07-13 오전 11:5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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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인가?
『舊唐書』, 卷185上, 「列傳」, 第135上, 〈蔣儼〉, p4801 "蔣儼, 常州義興人.貞觀中, 爲右屯衛兵曹參軍. 太宗將征遼東, 募使高麗者, 衆皆畏憚, 儼謂人曰 主上雄略, 華夷畏威, 高麗小蕃, 豈敢圖其使者. 縱其凌虐, 亦見吾死所也. 遂出請行. 及至高麗, 莫離支置於窟室中, 脅以兵刃, 終不屈撓. 會高麗敗, 得歸, 太宗奇之"
『新唐書』, 卷 105, 「列傳」, 第30, 〈李義琰〉, p4034 "初義琰使高麗 其王據榻召見 義琰不拜 曰吾天子使可當小國之君奈何倨見我 王詞屈爲加禮 及義琛再使亦坐召之 義琛匍匐拜伏 時人由是見兄弟優劣"
고구려가 당의 지방정권이고, 당에 조공한 나라였다고 중국학계는 주장한다. 그래서 고구려는 당의 번속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종주국과 번국과의 전쟁은 내적 통일 전쟁이다. 이런 식의 말을 한다.
하지만 이런 중국인의 발상 자체는 사료를 왜곡하고, 현재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저들이 만든 허구의 역사상일 뿐이다.
연개소문은 당나라를 적국으로 여겼고, 저들의 우월성을 인정하기는커녕 저들을 격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644년 당나라는 상리현장을 비롯한 여러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거부했다. 연개소문은 당의 내정간섭을 좌시하지 않았으며, 당의 사신을 가두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장엄(蔣儼)이다. 장엄이란 자는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라면 모두들 고구려에 사신가기를 두려워하고 꺼렸는데, 오직 이 자는 스스로 자청하여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
기록에는 연개소문이 그를 굴속에 가두고, 칼로 위협하기도 했지만, 그가 굴복하지 않았으며, 마침 고구려가 패배하여(會高麗敗), 당으로 귀국할 수 있었고, 이세민(李世民)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太宗奇之) 고 기록하고 있다.
장엄은 6년 만에 고구려에서 돌아왔다. 이세민(李世民)이 649년 5월에 죽었으므로, 그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간 시점은 그 보다 6년 전인 644년이 된다. 또 고구려에 사신 가기를 두려워한 시점을 고려할 때 644년 2월에 돌아온 상리현장보다도 늦게 파견된 사신임도 알 수 있다.
위 기록에서 고구려가 패배하였다는 것은 뒤에 이세민(李世民)이 기이하게 여겼다는 문장으로 볼 때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즉 장엄의 귀환을 기대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고구려가 뜻밖에 그를 풀어준 것에 대해서 놀라워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649년을 전후해서 고구려가 당에게 패배한 사실이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구려가 사신을 풀어주는 아량을 베푼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고구려가 마치 굴복한 것처럼 기록하려다가 한 수 더 나아가 고구려가 패배함을 당하여 당에게 사신을 풀어준 것처럼 기록하는 것은 지나친 중국인들의 주관과 편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연개소문은 상리현장의 방문을 계기로 당나라 사신 접대에서부터 더욱 강경하게 나갔다. 장엄(蔣儼)의 기록에서 보듯 상대국의 사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 또한 서슴지 않았다.
당에서 중서시랑을 지낸 이의염(李義琰)과 형부시랑을 지낸 이의침(李義琛)은 형제간인데, 이들은 각기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된 바가 있었다. 기록에는 이들이 파견된 시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으나, 이들이 대개 640년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므로, 이 무렵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사신으로 간 형 이의염(李義琰)은 고구려왕이 의자에 앉아서 부르자, 절을 하지 않고 당나라 사신의 자존심을 지켰다고 한다. 반면 동생 이의침(李義琛)은 고구려 왕이 부르자, 포복을 하며 엎드려 절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를 보고 형제간의 우열을 보았다고 한다.
형제간의 서로 다른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자질 문제만은 아니다. 이의염에게 강제로 절을 받지 않았던 고구려왕은 영류왕이라고 판단된다. 영류왕은 당과의 관계에 금이 가지 않도록 노력했기에 다소 무례했던 이의염(李義琰)의 행동을 묵과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이의침(李義琛)이 사신으로 갔을 때에 고구려왕은 보장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행동은 고구려에서 정권이 바뀐 상황을 알고 자발적으로 굽신거리며 절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엄(蔣儼)과 이의침(李義琛) 등 당의 사신들은 고구려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당나라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세계 최강의 나라,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라고 굳게 믿었지만 그 믿음이 통하지 않는 곳이 고구려였다.
조선시대 왕은 대국의 사신을 맞이할 때 동등한 자격으로 대해주었지만, 고구려는 오히려 저들의 사신을 잡아 가두고, 기어서 절하게 했다. 그럼에도 어찌 고구려를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를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한다면, 조선 역시 당의 지방정귄이고, 우리 역사는 결국 중국사란 말이냐. 중국인들은 역사 왜곡을 하려고 하지만, 분명 위와 같은 사료는 그런 중국인의 시도를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신당서 - 이의염(李義琰)]
李義琰, 魏州昌樂人, 其先出隴西望姓. 及進士第, 補太原尉. 李勣爲都督, 僚吏憚其威, 義琰獨敢廷辨曲直, 勣甚禮之. 徙白水令, 有能名, 擢司刑員外郎. 義琰姿體魁秀, 博學, 有智識. 累遷中書侍郎. 上元中, 進同中書門下三品, 兼太子右庶子.
[신당서 - 이의염(李義琰), 이의침(李義琛)]
義琰從祖弟義琛. 義琛擢進士第, 曆監察禦史. 貞觀中, 文成公主貢金, 遇盜於岐州, 主名不立. 太宗召群禦史至, 目義琛曰:“是人神情爽拔, 可使推捕.”義琛往, 數日獲賊. 帝喜, 爲加七階. 初, 義琰使高麗, 其王據榻召見, 義琰不拜, 曰:“吾, 天子使, 可當小國之君, 奈何倨見我?”王祠屈, 爲加禮. 及義琛再使, 亦坐召之, 義琛匍匐拜伏. 時人由是見兄弟優劣. 累遷刑部侍郎. 爲雍州長史, 時關輔大饑, 詔貧人就食商、鄧, 義琛恐流徙不還, 上疏固爭. 左遷黎州都督, 終岐州刺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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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글쓴이 : 조무현 / 2006-07-17 오후 4:0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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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그는 누구인가?
중국이 조선을 넘어다본 것은 하루 이틀의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프로젝트로 고구려를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역사조작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남의 민족역사를 도적질함은 물론 결국 제 뿌리까지 잡아먹는 환부역조(換父易祖)의 대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삼키기 위해 ‘국내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전쟁이,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이다. 여기서는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의 중심인물인 연개소문 (603~657)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 연개소문 은 한민족 본연의 신교(神敎) 문화의 상무(尙武)정신을 크게 떨쳐 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대영웅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병법가로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당나라는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에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연개소문 의 신출귀몰한 전략에 말려들어 수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참패하고 말았다. 연개소문 이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임이 명백함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며 극찬한 바 있다.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그는 오히려 역적으로 더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그에 대하여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악평으로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에 대한 평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돌려놓았을까? 당시 동아시아 전쟁사 속으로 들어가 역사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있는 그의 존재감을 느껴보기로 하자. 천자의 나라, 고구려
기원후 581년, 수나라는 한나라 멸망 이후 369년간의 분열의 남북조시대를 끝막고 광활한 중국 땅을 통일하였다. 한껏 위세를 떨치고자 하는 그들은 대륙의 패자를 자임하는 고구려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만만치 않은 나라였다. 고구려는 광개토열제(재위 391~413)가 만주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이래 안정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국시는 개국초기부터 배달국, 단군조선 시대의 방대한 영토와 신교문화를 다시 부흥시켜 회복한다는 ‘다물(多勿)’이었는데, 광개토열제는 이러한 고구려의 꿈을 실현한 위대한 황제였다. 중국은 요순 이래로 중국의 사방에 위치한 민족을 오랑캐로 불렀다. 그러나 고구려는 중국 한족이 부르듯이 자신을 동쪽 오랑캐, 동이(東夷)로 인식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을 천하의 주인으로 인식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는 “옛날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우셨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라고 쓰여 있다. 그들은 나라의 종통을 지키는 것을 하늘을 지키는 것, 즉 ‘수천(守天)’이라고 하였다. 삼신상제 신앙을 바탕으로 뭇 천지의 성신과 조상신명과 한마음 되어 역사를 펼쳐가는 신교 문화에서, ‘천(天)’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인간과 교감하며 앞길을 일러주는 ‘부모’와도 같은 존재이다. 고구려 황제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서 만주벌판에 군림하고 있었다. 역사의 운명은 두 패자를 동시에 인정하지 못했다. 고수(高隋) 전쟁이 막 일어나려는 때 연개소문 이 태어났다. 강화도의 전설에 따르면, 그는 강화도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단재선생은 「갓쉰동전」, 「규염객전」과 같은 중국 소설이 연개소문 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연개소문 은 청소년기에 중국의 상황을 자세히 살피고 귀국했다고 한다. 연개소문 (淵蓋蘇文)은 스스로 ‘김해병서(金海兵書)’를 지어 후세에 남겼다. 고려 때까지도 병마절도사가 지방에 부임할 때 한 벌씩 하사받았으나 오늘날은 유실되었다. 당태종 때의 명장이며 24장 중 한 사람인 이정(李靖)은 연개소문 에게서 병법을 배워 당나라의 제1명장이 되었다. 그가 지은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중국에 이름 높은 7종(種)의 병법서의 하나로 손꼽힌다. 단재 선생이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전하기를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에게 연개소문 에 대해 물었는데, 이정이 답하길 ‘ 연개소문 의 병법은 수많은 장수 가운데서도 적수가 없고, 하늘의 위엄으로 임하더라도 이기기 어렵다’고 아뢰었다”고 한다. 대당 굴욕외교를 펼친 고성제
20대 장수제(재위 413∼491)의 평양 천도 이래로 안타깝게도 고구려의 국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었다. 26대 영양제(재위 590~618) 때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공격을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27대 고성제(재위 618~642, 일명 영류제)는 당에 대해 우호정책을 펴나갔다. 그는 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를 귀환시키고 중국 역서(曆書)를 반포했으며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천리장성을 축조하여 전쟁에 대비하고, 중국의 도교까지 수입했다. 고성제가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강성해가고 있는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고성제가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할 수 있는 전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당에 보내자 고구려의 강성파들은 모두 분개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중국과 전투하였는데 고구려의 지도를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를 침투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631년에는 당 사신의 요청에 따라 평양의 경관(京觀)을 허물어 버렸다. 경관은 수나라와의 전쟁 때의 전몰장병의 유해를 묻은 기념묘지·탑과 같은 것으로 고구려인의 자부심이 담긴 성역이다. 여기에서 연개소문 이 등장한다. 고성제에게 사사건건 반대의 의견을 내는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 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고성제는 연개소문 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장성(長城) 축조 감독이라는 한직에 임하게 하고 임지로 출발하기 전 황제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올 때 그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를 미리 알게 된 연개소문 은 평양성 남쪽에서 크게 열병식을 거행하면서 참석한 180여 명의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황궁에 있던 고성제도 찾아내어 살해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당시 시대상황에 따라 이 사건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이 사건이 단순한 쿠데타라기보다는 대당 굴욕외교로 일관한 고성제에 대해 고구려의 건국이념을 되살리자는 대당강경파의 ‘반정’, ‘혁명’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풍전등화의 민족을 깨웠던 연개소문 의 절규
민족사서인 『태백일사』는 연개소문 의 면모에 대해 보다 자세히 일러주고 있다. 고성제는 당에 사신을 보내 노자상(老子像)을 구하여 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청강하게 하고 수십만의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축조하게 했다. 이에 연개소문 이 도교 강론을 파하도록 하고 장성 부역을 그만두도록 간언하자 황제는 그를 죽이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에는 “ 연개소문 이 또 동북·서남에 장성(長城) 쌓기를 주청하였다 하여 장성을 쌓는 것이 연개소문 의 주청에 의한 것이라” 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단재선생은 ‘ 연개소문 이 노자상과 도사(道士)를 청하여 왔다는 말과 함께 무설(誣說)이니라’고 단호히 비판하고 있다. 연개소문 은 철저한 반당(反唐)주의자였다. 그러한 그가 명백히 적국인 당의 종교인 도교를 받아들이자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연개소문 은 나라를 위해서는 홀로 허망하게 죽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문 앞에 맹수가 가까이 오는데, 이를 막지 않으면서 도리어 나를 죽이려 하는가?” 연개소문 의 이 말은 민족의 주체성을 스스로 내주고 바람 앞에 서있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에 대한 절규였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 이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하나 『태백일사』에서는 황제가 몰래 송양(松壤)으로 피신하였으나 백성들이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붕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연개소문 은 군사와 정치를 함께 통솔하는 대막리지(大莫離支)에 올라 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는 백제 상좌평(上佐平) 성충과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으며, 또 신라 사신 김춘추에게 자신의 사저에 머무르게 하고 삼국연합을 권유했다. 그러나 김춘추는 끝내 듣지 않고 결국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보장제 3년(644년), 불과 3년 만에 당은 연개소문 의 쿠데타를 이유로 침략해 들어왔다. 당은 수나라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랜 기간 준비를 하고, 훈련된 정병(正兵)을 차출했으며, 수나라가 대군으로 바로 평양으로 진격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을지문덕에 패배한 것을 반성하여 요동성부터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전략으로 삼고, 동시에 수군은 군사와 군량미를 실어 나르게 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전략을 눈치 채고 여러 성을 지는 듯 내주었다. 그러나 당군이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는 3개월에 걸친 치열한 대접전 끝에도 성을 빼앗지 못했다. 당군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이에 연개소문 이 말갈병까지 동원하여 총공격을 단행하자 당군은 안시성을 공략할 엄두를 못내고 퇴각한다. 퇴각하려는 와중에 하늘에 띄운 안시성주 양만춘의 화살에 당태종의 왼쪽 눈이 빠져버린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때 당군이 얼마나 퇴각을 서둘렀는지 좋은 길을 놔두고 진흙수렁으로 변한 요수 하류에 길을 만들어 건너야할 정도였다. 당시 당태종 스스로도 말채찍 끈으로 나뭇단 묶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이처럼 급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수나라가 을지문덕의 전략에 참패했던 것처럼 전쟁을 총지휘하던 연개소문 의 전략에 빠져 배후를 공격당하고 퇴로를 차단당하는 등 큰 위기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당태종은 원정실패에 깊이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으면 나로 하여금 이번 걸음을 하지 않도록 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태백일사』에는 이후 상황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연개소문 은 당군의 뒤를 계속 추격하여 요동성을 회복하고 당 장안 인근 용도성(桶道城)2)에 일군을 보내 당태종을 계속 추격하자 궁지에 몰린 당태종은 어찌할 방도가 없어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애걸하였다. 그리고 649년 당태종이 52세 나이로 숨을 거둘 때, ‘파요동지역(罷遼東之役), 다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말라. 아비의 실패를 되풀이하면 사직을 지키기 어렵다.’는 유언을 남겼다.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는 당시 고구려군의 장안 입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막리지는 추정국, 양만춘 등 수만 기를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치고 피리 부는 취악대를 앞세워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을 하였는데,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의 전 영토가 모두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삼국사기』에도 “고혜진이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惠眞竟至長安)”고 하여 고구려 장수 고혜진에 의한 당 본토공략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실은 ‘중국을 위하여 수치를 숨긴다’고 하는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의 역사기술로 모두 숨겨놓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연개소문 이 657년에 사망3)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 이 사망하자 연개소문 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 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 의 묘소가 운산(雲山)의 구봉산(九峯山)에 있다고 하였다. 단재 선생은 ‘ 연개소문 이 혁명가의 기백과 재략은 갖췄으나, 조선 만대의 행복을 꾀할 수 있을 현재(賢才)에게 대권을 물려주지 않고 불초한 아들에게 넘긴 것을 보면 야심은 많으나 덕이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고 평하고 있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연개소문 이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역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조의선인 연개소문
연개소문 은 중국 경극(獨木關) 등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그 줄거리는 당태종이 봉황산에서 연개소문 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가 구해준다는 내용으로 연개소문 과 설인귀가 주인공이고 당태종이 조연이다. 경극에 나온 연개소문 은 용맹한 장군이지만 잔인하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된다. 얼굴은 푸른빛으로 화장하는데, 푸른빛의 얼굴화장은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삼국사기』는 고구려의 적이었던 당나라인들이 변모시킨 연개소문 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려의 김부식이 ‘묘청의 난’4)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쓴 역사서로서, 중국을 사모한 김부식이 사대주의 눈으로 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태백일사』는 전혀 다른 면에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여기서 ‘조의선인’이란 말에 우리가 그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핵심이 깃들어 있다.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과 비교할 수 있는 고구려의 낭가(郎家) 제도이다. 이들은 삼신상제님 신앙을 바탕으로 천지의 성신과 하나 되어 국가와 민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목숨을 던져 살신성도(殺身成道)하는 것을 삶의 이상과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역사를 이끄는 주역들이었다. 백성들이 조의선인으로 선발되면 왕의 사자와도 같은 자랑으로 여겼으며, 이들이 전쟁터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 대중의 조소를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역사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연개소문 은 한명의 조의선인으로서, 잊혀져가는 신교(神敎) 문화의 민족정신을 되살려 수천(守天)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일어나 분투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뿌리문화와 단절되어 가는 역사의 대세를 이기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흐르는 망각의 강 위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연개소문 의 죽음과 함께 고구려의 정신도 죽고 말았다. 또한 그의 이름도 역사 속에 묻혀 버렸다.
연개소문은 조의선인이다 연개소문은 한민족의 순수한 정신맥을 이어받고, 고구려 말의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초연히 일어선 당대 동북아 희대의 대영걸(大英傑)이었다. 피끓는 마음으로 응원하는 붉은 악마의 열정을 그의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 붉은 악마는 축구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으나, 연개소문의 열정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길이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말, 살아있는 고구려의 정신이었다. 고구려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망해가는 민족정신의 맥에 불씨를 띄워올려 백전백승의 전과를 이뤄냈으니, 그를 따를자 아무도 없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두 영웅, 연개소문과 당 태종 이세민의 충돌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릇 고구려와 당은 피차 강약을 다투는 양립할 수 없는 나라요,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서로의 우열을 겨루는 양립할 수 없는 인물이니, 이 같은 두 인물이 두 나라의 정권을 잡았으니 양국 전쟁의 폭발은 조만간 필연적인 사실이라.’
당 태종은 처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빌미로 고구려를 침공하려다 장손무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침공을 연기했다. 그 후 고구려가 신라 사신의 당나라 조공을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보내 협박했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일축했다. 태종은 다시 장엄(莊儼)을 보내 최후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오히려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이로써 양국의 외교적 타협은 결렬된 것이다.
연개소문은 일전도 불사한다는 정신으로 당의 협박을 무시하고, 사신을 토굴에 가둔 것이다. 당의 위세에 벌벌 떨었던 고성제(영류왕)에 비하면, 연개소문은 당을 그렇게 볼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문화의 자존심이었으며, 고구려의 역사성에 대한 자부심이었으며, 고구려민의 우수함에 대한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고구려 보장제 3년(644) 11월 원정 명령을 내린다. 정벌의 명분은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응징하고 백성을 구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삼국사기가 베껴 쓴 이러한 내용은 구당서, 신당서에 있는 것으로 당태종 자신의 얼굴을 더럽힐 뿐이다. 제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당태종이란 작자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천자를 참칭하는 자가 어떻게 얼굴빛을 붉히지도 않고 양심에 털난 소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병법의 달인, 연개소문
당태종은 당의 위세가 커지가 고구려를 우습게 본 나머지, 휘하 장수 이정의 충고도 무시한다. 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라고 사양했다는 것이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태종이 “개소문의 병법이 과연 옛 사람의 누구와 견주겠느냐”라고 묻자 이 정은 “옛 사람은 알 수 없으나 오늘날 폐하의 모든 장수 가운데에는 적수가 없고, 비록 천위(天威)로 임(臨)하실지라도 가히 승리하기 어려울까 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천위, 하늘의 위엄! 천자를 자칭하는 당태종에게는 자손심을 거스르는 소리다.
이에 태종이 “중국의 거대함과 인민의 수로나 병력의 강함으로 어찌 일개 개소문을 두려워하랴”라고 불쾌해하자 이 정은 “연개소문이 비록 1인이나 재주와 지략이 만인에 뛰어난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돌궐렴岳瀁?吐谷渾)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중국 능연각(凌煙閣)에 초상화가 걸린 24공신의 한사람이며, 이적(李勣)과 함께 2대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 정을 가르쳐 이 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 정이 저술한 ‘이위공병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이위공병법’의 원본에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렐?때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 최고의 명장을 키워낸 병법의 달인이 연개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연개소문이 제자를 허투로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승도 몰라보고 배신할 제자를 키워내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당의 명장이 될 것을 짐작하고서도, 비법을 전수한 것은 그의 인격을 믿기 때문이다. 단순히 병법의 전수가 아니고, 세상을 도와 다스리는 도법(道法), 그리고 심법(心法) 전수의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병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정신 세계의 본질, 구조를 꿰뚫어보고 전쟁에서 군사를 움직여 최소한의 희생을 자국과 타국이 함께 이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의선인 연개소문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그 병법을 어떻게 배웠을까? 규원사화에는 그가 봉황산에서의 10년 수도 끝에 도를 통하여,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 국선(國仙), 조의(皂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일찍이 조의(皂衣)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연개소문은 한명의 조의선인(皁衣仙人)으로서 민족의 국통을 지키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모든 노력을 기울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조의선인은 신라의 화랑과 비교할 수 있는 고구려의 낭가(郎家) 제도이다. 검은 옷을 입었기 때문에 조의라고 부르는데, 평소에는 무예를 닦고 수도를 하고 국가종교인 환인,환웅,단군의 삼성조를 모시는 신교(神敎)로서 백성을 계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신교란 이들은 삼신상제님 신앙을 바탕으로 천지의 성신(聖神)과 하나되어, 세상의 모든 성신을 성스럽게 받든다. 성신에는 자신의 조상신도 포함되어 있다. 국조삼신은 민족과 국가의 기틀로서 어찌 중요하게 받들지 않았을 것인가? 즉 조의선인은 민족과 진리를 수호하는 것을 지상 목적으로 한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으로, 한민족 역사 개창의 주역들이었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앞서서 나라를 구한 용사들이었다. 수의 130만 대군을 격파한 이들도 고구려의 조의선인 20만이었다. 이들은 신교의 종교정신으로 무장한 군대였던 것이다.
백성들이 조의선인으로 선발되면 왕의 사자와도 같은 자랑으로 여겼으며, 이들이 전쟁터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 대중의 조소를 받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역사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조의선인은 제가 혼자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나라에서 임명함으로써 될 수 있는 자리다. 태백일사에서는 그가 불과 9살에 조의선인으로 ‘선발’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인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의표(儀表)가 웅위(雄偉)하고 의기가 호협하여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상을 줄 때는 반드시 고루 나누어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해 주었으며, 자기의 처지를 미루어 남의 심정을 뱃속에 갈머두는 아량을 가졌다. … 한번 기쁨을 나타내면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들도 가까이 할 수 있었고,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아울러 태백일사에서는 멸망위기에 처한 고구려를 구하기 위해 초개와 같은 굳은 신념으로 고구려 백성을 이끌어 당과의 전쟁을 치룬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양을 할해하여 서술하고 있다.
태백일사가 그리는 한 인간의 모습은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다. 단재는 연개소문이 조의선인의 우두머리로서 모든 조의선인들로부터 숭모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 장면 그림, 칼 한 자루를 쥐고 말 탄 장수가 연개소문이고, 화살을 겨누는 장수는 설인귀, 칼 4자루가 날아가는 곳에 있는 말 탄 사람이 당 태종 이세민이다.
민족을 구한 의기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역적이라 한다. 물론 쿠데타를 통해 나라의 국왕을 폐위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였으니 잘못되었다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이 일어선 것은 당대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연개소문만 나무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연개소문에 의해 폐위된 영류왕 고성제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와 맞처 고구려를 지킨 명장이었다. 을지문덕이 살수대첩의 승리와 함께 중국 본토를 치자고 주장했던 강성파였다면, 고성은 당과의 화친을 주장한 온건파였다. 그런데 고성제가 보장제의 위를 이어 열제의 위에 오르자, 화친을 넘어서 역사의 전통을 중히 여기는 고구려인이라면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굴욕적인 외교를 펼친다.
그는 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의 귀환시키고 중국 역서(曆書)를 반포했으며 중국에 유학생을 파견하고, 천리장성의 축조하여 전쟁에 대비했다. 고성제가 중국의 요청이라면 모든 것을 들어줄 자세가 되어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중국과 평화정책을 유지하는 한 적어도 중국이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급기야 고성제 11년(628)에는 고구려의 일급비밀이라 볼 수 있는 전 영토의 지도인 봉역도(封域圖)를 | | |
첫댓글 우아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