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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강 이남은 유량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해 심지어 3모작이 가능한 지역마저 있을 정도로 농사에 유리하다. 당연히 생산이 늘어나면 인구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고, 농업이 생산의 대부분이던 시대 풍부한 농업생산물은 경제의 근간이 되어 준다. 장강이야 말로 중국이 중국일 수 있었던 근원인 셈이다.
그러나 장강 이남이 처음부터 중국의 영토였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장강 중류의 초와 장강 하류의 오월이 중국문명에 흡수되기는 했지만 한무제가 장강 이남의 월족의 왕조를 멸망시킨 뒤로도 이 지역은 중국 왕조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사실상 무주지였다. 후한말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 동오의 손씨가 장강유역으로 세력을 뻗치고 있을 때에도 장강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는 산월족이 지배하는 그들의 땅이었다.
장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동오가 멸망하고 동오를 멸망시킨 서주가 오호십육국의 난을 피해 강남으로 도망쳐 동진을 세우면서부터였다. 사실상 동진은 강동의 토호들과 서진의 유신들과의 여합정권적인 성격의 나라였는데, 아직 대부분의 인구와 생산이 집중되어 있던 강북을 이민족들에게 빼앗긴 탓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장강 이남의 강남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그래도 역시 남송이 서고 나서도 장강 이남의 많은 지역은 중국왕조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무주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남북조시대 남조의 왕조들에 의해 강남의 개발이 본격화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중국의 생산의 대부분은 강북에 몰려 있었고, 인구의 상당수도 강북에 있었다. 제아무리 강남이 개발되어봐야 수천 년 중국의 중심이었던 - 그래서 중원이라고까지 불리우던 강북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북조를 통일한 것도 북조의 수였다.
그러나 수문제가 남조를 멸망시키고 가장 먼저 추진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황하와 장강을 잇는 운하를 파는 것이었다. 남조가 한줌도 안 되는 땅으로 북조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도 강남의 풍부한 생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고 보면, 강남이 갖는 가능성이란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다만 그것을 사용하려 해도 강북과 강남이 워낙 멀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으므로 운하로서 장강과 황하를 연결해 그것으로 물류를 이으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실상 강남의 개발은 바로 이 문제에서 시작해 양제에 의해 완성된 영제거와 통제거의 운하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할 수 있다. 강남에서 생산된 풍부한 물산은 운하를 통해 강북으로 옮겨지고, 강북의 인구와 문화와 정치는 다시 운하를 통해 강남으로 이동하고,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도 그같은 물류와 인구의 이동이 활발하던 것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왕조는 북쪽의 유목민족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아무리 농경이 유목보다 생산에서 유리하다고 하지만 그만큼 병력동원에서 구성원 대부분이 말을 탈 줄 아는 전사였던 유목민족에 비해 크게 불리했다. 그래서 한나라 때는 흉노에 조공을 바치기도 했고, 서주는 다섯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여 강북을 그들에게 내주기도 했었다. 고구려 역시 영토면에서 북조의 왕조들에 비해서도 한참 작았음에도 결코 쉽게 여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러나 강남이 개발되면서, 그리고 강남의 풍부한 생산이 강북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 생산이 인구의 증가와 재정의 확충으로 이어지면서 중국의 왕조와 북방 유목민족과의 차이는 크게 벌어지기 시작한다. 인구에 있어서도 수나라때에 이미 4천만을 넘어서고 있었으며,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는 150여만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동원력에서 주위의 어느 민족, 어느 나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록 수양제 자신은 고구려원정에 나섰다 실패하면서 결국 오명만 남기고 죽었지만 그가 완성한 운하로 인해 중국문명은 비로소 주위 여러 민족들을 누를 수 있는 경제력과 인구와 무엇보다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강남개발이 완료된 것은 남송이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북송까지도 중국의 중심은 강북이었고, 경제의 중심도 어디까지나 강북이었다. 그러나 북송이 금에 쫓겨 임안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남송이 멸망하고 몽골족인 원의 치세가 이어지는 사이 중국문명의 중심도 강남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중국경제의 중심도 강남으로 옮겨갔다. 원을 멸망시킨 한족의 봉기가 주로 강남 - 특히 강동에서 주로 일어난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고구려가 당에 멸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인구면에서 불과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고, 생산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에조차 쌀이 아닌 잡곡을 주식으로 먹었던 서북지방이 고구려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더 많은 인구에 더 풍부한 생산에, 더구나 비단길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의 새로운 문물은 고구려에 비해 보다 유연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가능하게 했다. 원래 중기병이나 중보병도 그렇게 중동에서 발생한 것이 비단길을 따라 전해진 것이고 보면 그 차이는 분명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그렇게 버틴 자체만으로도 놀랍다 할 정도였다.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건 중국문명의 더 많은 인구, 더 풍부한 경제력, 그를 활용한 더 많은 병력을 더욱 강력하게 무장시킬 수 있었던 데에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운하였다. 수양제가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었던 것도 당이 한 번 보내기도 버거운 수만의 병력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몇 차례고 보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당의 경제력 때문이고, 당의 경제력을 만든 것은 수의 양제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죽은 수양제가 살아 이룬 업적이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것으로 열매맺었다고나 할까?
물론 고구려 멸망은 부수적인 것이다. 원을 거치면서 더욱 발전한 강남은 명이 건국하면서는 이미 중국 경제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고, 청왕조에 있어서도 제국을 지탱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었던 것이 강남의 부였다. 아니 무엇보다 원이 대도를 도읍으로 정한 이래 북경이 역대 왕조의 - 심지어 지금의 중국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로 중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강남의 생산이 바로 북경에 닿을 수 있도록 했던 운하의 힘이었다.
두 말 할 것 없이 수양제는 폭군이었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중국역사상 보기 드문 폭군이고, 그만큼 당시의 중국은 혼란스러웠으며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그래서 반란으로 제대로 무덤조차 남기지 못하고 신하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것이었고. 그러나 그의 난폭함으로 인해 중국은 강남과 강북의 경제를 이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주위를 압도할 수 있는 경제력을 지닐 수 있었고, 다른 경쟁자를 누르고 동아시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강남의 힘이고 운하의 힘이고 수양제의 업적이었다.
하여튼 역사를 보면 원래 그러고자 한 것이 아니었어도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놓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은 터라 수양제도 그런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수양제가 거기까지 보고 그리 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수양제가 마무리지은 통제거와 영제거의 운하로 말미암아 중국문명은 주위의 여러 민족과 문명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게 되었고, 수양제의 숙원이던 고구려 역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랄까? 아마도 누가 했어도 했을 운하, 수양제로 하여금 가장 욕을 들어먹게 만든 그것이 사실상 수양제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고 하는. 하기는 그래봐야 폭군은 폭군,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나라를 망치고 자신마저 반란군에 목숨을 잃은 어리석은 군주였다는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을 테지만. 아이러니도 뭣도 아닌 역사의 냉엄함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