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으로 하는 수행에 비해 염불이나 진언은 다소 쉬운 편입니다.
절 또한 그렇습니다. 많은 불자들의 경우, 대부분 몸과 입으로 하는 수행을 주로 합니다.
마음 수행이 어렵기도 하지만, 마음 수행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편입니다.
마음을 통해 하는 수행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마음을 이야기 합니다.
“오늘은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오늘은 즐거웠다”,
이렇게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는 이 마음의 실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존재에 대해 체험을 합니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상념(상想)이 생기게 하고,
행. 불행의 느낌과 감정들을 만드는 그 모든 것은 의식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의식을 분류해 보면 심왕과 심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의식’ 혹은 ‘마음’이라 하는 대상을 인지하는 것은 심왕이라 하고,
개별적인 마음 작용을 심소라고 합니다.
마이트레야께서는 [중변분별론]에서 “거기에 실체를 인식하니 의식이고,
그것의 차이, 마음에서 생겼네.”
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거기에 실체나 본질을 인지하는 것이 마음이며,
그 대상의 차별을 아는 것이 마음작용(심소心所)입니다.
‘그것’이라는 지시대명사가 마음을 가리킨다면 그 의식의 차별,
대상을 분별하는 것이 마음작용인 것입니다.
아상가께서 지으신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의식을 8식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6식으로 설명하는 분도 있습니다. 보편적으로는 우리 의식을 6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대상을 파악하는 5식과 의식인 6식,
이를 둘러싼 심소는 51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느낌(수受), 지각(상想), 의도(행行), 선한 것과 불선의 번뇌인 다양한 마음작용을 51가지로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의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란 무엇인가?
부파불교 가운데 설일체유부에서는 의식이 외부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통째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한편, 경량부에서는 의식에 형상이 함께 있어
의식에 대상의 상(像)이 비춰진 것을 인식한다고 주장합니다.
외부의 대상을 바로 인식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대상의 형상이 의식에 비춰진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像)이 있는 식(識)이라고 합니다.
설일체유부만이 상이 없는 식을 인정하고 나머지 학파는
영상(影像)을 가지고 있는 식(유상식有像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영상을 가지고 있는 (유상有像) 의식을 ‘명료한 의식’이라 한다면 감이 잘 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명료한 의식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식이 맑을 때 거친 분별들을 없앱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분별도 없앱니다.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일들이 많이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앞으로 이렇게 해야겠다.’ 하는 계획이나 결심 등 미래에 관한 분별 역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미래로 향하는 생각을 끊습니다.
즉 생각이 분산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다 보면
평소의 생각-외부의 대상의 모양(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접촉(觸)에 대한
분별이 끊어집니다. 현재는 물론 과거로, 미래로 넘나드는 생각과 내면에서
치닫던 감정과 안팎의 인식이 외부로 향하던 감각을 막으면 뭔가 비어있는 느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보통 의식의 본질은 안팎의 다양한 형상에 의해 가려져 있다고 봅니다.
바깥의 형상과 기쁨과 고통의 감정 같은 다양한 상들이 마음의 본질을 모두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깥 대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내면의 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모두 차단합니다.
그 상태를 점차로 늘여나가고, 그
것을 깊이 유지할 수 있다면 차츰 차츰 ‘명료한 의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이라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이 무엇인지, 마음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외도의 가르침에서도 마음의 본성에 의식을 두고 명상을 합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리 마음이 미세한 뇌신경에 의지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마음이 뇌에서 생성된 것, 혹은 뇌에 의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근래 와서 제기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2~3천 년 전, 외도들 가운데에도 전생과 내생을 인정하지 않는 외도들이 있었습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 몸에 있는 신경조직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래에 심도 있게 제기되고 있는 주장 가운데에는 ‘뉴런’이라는 뇌신경조직에서
의식이 생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사상의 뿌리는 2~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몸에서 비롯된 것이다. 몸이 없어지면 의식도 사라진다.
그러므로 전생과 내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의식을 단순히 ‘인식하는 것’이라 한다면 의식이
몸의 감각에 의지해 생긴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고 개별적인 인식을 하지 않은 의식 그 자체가 명료한 상태의
‘그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과학자들이 세밀한 시험을 통해 뇌신경의 변화가 의식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의식이 뇌신경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서서히 밝혀지고 있습니다.
오랜 수행을 통해 경지에 도달한 수행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을 때,
생각이 뇌신경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 의식에는 거칠고 미세한 다양한 의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5식의 경우, 눈. 귀. 코. 혀. 몸(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오근과 같은 몸의 감각기관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5식은 분명 뇌신경에도 의지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형상을 보고, 색. 모양을 감지하는 것은 뇌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뇌신경이 부분손상이라도 입으면 보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
섯 감각기관에 의지해서 생기는 거친 의식 대부분이 분명히 몸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과 연결되어 있으며,
몸에 의지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의식에는 거친 의식과 미세 의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깨어있는 상태가 현재 의식의 상태입니다.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는 현재 의식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없습니다. 꿈속에서는 꿈속의 색깔과 모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에 거침과 미세함이 있는 것이 꿈과 깨어있을 때의 경험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혼절한 상태에서도 다시 깨어날 수 있는
의식의 잠재된 씨앗이 있습니다.
의식의 연속성이 존재하며 미세한 의식이 있습니다.
대개 인간이 죽는 순간, 가장 미세한 의식 상태가 됩니다.
예를 들어 몇몇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데,
죽은 후 바로 육신이 부패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제 스승이신 링 린포체의 경우, 13일 동안이나 유체가 전혀 부패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제가 아는 어떤 이들은 2~3주 가 지나도록 유체가 썩지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에 대해 미세한 의식이 유체에 머무는 동안에는
육신이 부패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뇌 조직은 죽은 상태입니다.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미 죽은 상태인 시체입니다.
그런 시체가 부패하지 않는 것은 아주 미세한 의식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칠거나 미세한, 다양한 의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청정한 성질을 가진 의식에는 다양한 의식 상태가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의식 가운데에는 오온에 의지하는 거친 의식이 인식하는 의식으로 변하는 것은
이전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조건이 되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친 의식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미세한 의식의 흐름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혼절했다 다시 의식이 돌아올 때
그 이전의 미세한 의식의 흐름이 없으면 다시 깨어날 수 없습니다.
* 등무간연(等無間緣)
설일체유부의 아비달마에서 말하는 네 가지 조건(사연 四緣) 가운데 하나. [구사론]에서는
인과 연을 자세히 분류하여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했다.
여섯 가지 원인은 능작인(能作因). 구유인(俱有因). 상응인(相應因). 동류인(同類因). 편행인(遍行因). 이숙인(異熟因)을 말하며, 네 가지 조건은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육인(六因) 가운데 능작인은 4연의 증상연이며, 나머지 오인은 4연의 인연이다.
그러나 유식학파에서는 육인 가운데 동류인을 인연과 증상연에 통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오인은 증상연이라고 했다.
인연은 직접적이며 내적인 원인을 말한다.
등무간연은 앞의 마음이 소멸하는 것이 다음의 마음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정신적인 현상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앞 순간의 마음과 바로 다음 순간의 마음은
시간적인 간격 없이 바로 연속해서 일어나며, 앞의 마음이 다음 순간의 마음의
등무간연이 되는 것이다.
소연연은 인식의 대상이 인식을 생기게 하는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증상연은 앞의 3가지 조건 이외의 모든 원인을 말한다.
여기에는 다른 것이 생기는데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경우(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와 다른 것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원인으로 된다는
소극적인 경우(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의 2가지가 있다.
의식의 전후는 하나의 흐름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미세한 의식의 경우에는 의식의 계속적인 흐름이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앞 의식이 없으면 뒤 의식도 올 수 없는 것입니다.
모태에서 수정체에 의식이 깃드는 순간이 바로 인간이 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느낌(수受)과 지각(상想)과 의지(행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은 의식의 흐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의 의식 흐름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태에 막 깃든 의식 이전에 의식이 없었다면,
그것이 뒤 의식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전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아닌 것이 의식의 가장 가까운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달마카르티(Dharmakirti, 법칭法稱)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미세한 의식이 의식의 원인이며
의식이 아닌 색이 의식의 근취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미세 의식에서 볼 때,
마음을 일으키기 이전에 마음이 없다면 다음 순간의 의식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마음 그 자체의 본성인 명료한 의식 상태에는 허물이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51종의 심소(심리현상)에는 근본번뇌 여섯 가지와
부수적인 번뇌 스무 가지가 있습니다.
51종의 심소와 연결되어 번뇌를 일으킬 때, 마음은 번뇌로 물드는 상태가 됩니다.
번뇌가 심소와 연결되어 일어날 때는 심왕이 번뇌에 물든 상태가 됩니다.
믿음과 자비도 심소와 연결되어 일어납니다.
믿음과 자비의 마음이 일어날 때 이와 상응하는 심왕은 선한 마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심왕 그 자체는 선. 악 그 이전의 것입니다.
심왕 그 자체는 선한 마음으로도, 악한 마음으로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번뇌는 좋지 않은 것(불선不善)이고 믿음 같은 것은 좋은 것(선善)입니다.
물론, 이때 믿음은 바른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잘못된 믿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있는 믿음과 자비는 이유가 타당하기 때문에 뿌리가 탄탄합니다.
이와 반대로 지식도 번뇌를 일으키는 지식은 허물이 되며 뒤집힌 견해입니다.
바른 지식은 실상을 파악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바른 생각은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올바른 근거가 없는, 잘
못된 생각은 그 뿌리가 탄탄하지 못합니다.
타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생기는 특성이며,
심왕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무시이래無始以來) 그 흐름을 지속해 왔습니다.
지금의 우리 몸은 한 생뿐입니다. 또한 우리 몸은 거친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몸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능력- 예를 들면 높이뛰기. 달리기 같은 운동은
몸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 몸은 거친 물질이며,
흐름이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친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뿐더러 ‘최고점’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비롯되는 자비나 믿음, 지혜 같은 미세한 흐름은
습성에 따라 ‘최고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청정하여, 본래 허물이 없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경지인 불지(佛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장이라 이름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본래부터 허물없이 청정하여 일체지를 이루는데 그 근거에는 여래장이 있습니다.
이것을 부처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어떤 중생이건 여래장이 있기에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번뇌에 물들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고통의 원인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선한 쪽으로 흘러 선업을 짓는다면 행복의 씨앗을 심는 것이며 나아가 불과(佛果)를 얻을 것입니다.
윤회와 해탈 모두 마음에서 비롯되며, 마음을 다스리고,
못 다스리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중생의 고통의 뿌리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것에서 생긴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삼계의 고통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거친 형체를 가진 존재들은 의지처가 필요합니다.
바깥의 세상과 청정하지 않는 우리 육신은 업과 번뇌로 인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의지처인 안팎의 세계 또한 업과 번뇌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거친 육신뿐만 아니라 외부 세상 역시 업과 번뇌로 인해 생성된 것입니다.
우리의 업에는 신(身), 구(口)의 업과 마음으로 짓는 의업(意業)이 있습니다.
번뇌라는 것은 의식입니다.
의식이 어떻게 형체가 있는 물질의 원인이 되는가?
앞에서 의식의 씨앗은 반드시 의식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형태를 가진 물질의 씨앗은 물질이어야 합니다.
의식의 씨앗은 의식이어야 하고, 형체를 가진 물질의 씨앗 역시 의식이라면
의식의 씨앗이 반드시 의식이 아니어도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형태를 가진 물질의 경우, 씨앗이 그와 비슷한 종의 물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아닌 물질이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의식도
그것을 있게 하는 원인이 의식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거친 물질인 우리 육체의 경우도 씨앗은
이전의 사대(지수화풍地水火風)와 사대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사대로 이루어진 거친 물질이 생성된 원인을 찾아
그 이전의 형태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물질은 사대원소에 의해
생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질의 최초 형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의식에 시작이 없다.’고 하듯이 사대요소에 의해
생성된 물체 역시 처음의 시작점을 정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외부 환경이든, 인간이든
이전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태초에 세상이 생기기 이전은
공의 상태이며 아주 미세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륜경전에 서술되어 있듯이, 세상을 이루는 요소는 큰 허공(허태공虛太空) 상태입니다.
이것이 외부환경을 만드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만든 생성물질이 ‘업의 결과’인지는 저 역시 확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이치를 해명하는 4가지 논리가 있습니다.
‘물의 젖는 성질’, ‘불의 뜨거운 성질’, ‘땅의 견고한 성질’,
‘바람의 움직이는 성질’은 자연의 상태, 속성이지 업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물체로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지 업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성이 업에 의해 좌우될 수는 있습니다.
아주 미세한 씨앗인 큰 허공에서 비롯된 하나의 요인이
외부 환경을 생성하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진화하는 가운데 진화 조건이 생명체의 업에 의해 좌우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중론]에서 “마음 그 자체가 중생계와 사대의 갖가지를 이루니
그것은 중생의 업에서 생기는 것이네. 마음이 없다면 업 또한 없다.”고 하신 것처럼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정화되지 않은 업에 의해 생성된 것입니다.
여러 조건 가운데 번뇌와 업에 의해 생성된 것입니다.
이것의 근취인(씨앗)을 본래 있던 것이라 해야 할지는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 달라이 라마 존자님의 《입보리행론》법문 중에서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세요_()_
감사합니다 옴아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