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의 견해
붓다의 수명에 대한 <법화경>의 입장은 불신상주(佛身常住)이다. 석가모니불은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붓다로서, 성불한 때부터 지내온 세월은 한량없으며, 상주 불멸한다는 사상이다. <법화경>의 견해는 [여래수량품]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성불하여 지내온 세월이 매우 오래되고 멀어서 수명은 무량한 아승지겁이라, 항상 머물고 멸하지 않느니라. 내가 본래 보살도를 행하여 이룬 수명은 아직도 다하지 않았으며, 또한 위의 수보다 배가 되느니라. 여래는 실로 멸도함이 없는데도 멸도한다고 하느니라. 여래는 이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약,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머무른다면, 박덕한 사람은 선근을 심지 않고 빈궁하고 하천하면서, 5욕에 탐착하여 기억과 생각이 허망한 견해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게 되느니라.
경에서는 무량한 수명을 가진 붓다가 80세에 열반에 든 것은 단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밝히고 있다. 깨달음은 생멸을 초월한 본질적인 것이며, 그것은 멸하지 않으며, 그 수명은 무량하다는 것이다. 히라가와 아끼라[平川彰]는 석가세존이 구원실성의 수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계시는 것은 그 만큼 교화해야 할 중생이 끊임없다는 의미가 된다고 했다.
대승불교는 보살교단의 성격이 강하여 중생을 유익하게 하는 보살행이 크게 요구받고 강조되었다. 따라서 대승경전에서 붓다의 수명이 무량하다는 것은, 그만큼 중생을 구제하려는 붓다의 자비심이 무량하다고 볼 수 있다. 미토모 켄요(三友健容)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법화경>에서 붓다의 무량한 수명은 중생구제라고 하는 자비의 서원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붓다의 무량한 수명과 중생교화를 위한 붓다의 열반시현을 경에서는 양의(良醫)의 비유로써 설한다. 의사인 아버지가 외출한 사이, 독약을 먹고 미쳐버린 아들들이 아버지가 처방한 좋은 약을 먹지 않고 병세가 심해지자 그들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버지는 죽은 것처럼 위장한다.
"내가 이제 노쇠해져서 죽을 때가 되었다. 이 좋은 양약을 여기에 둘테니, 너희들이 먹게 되면 차도가 없을까를 염려하지 말라." 당부하고 다시 외국으로 가서 "너희들 아버지가 결국 운명하였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그때 자식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마음이 크게 괴로워하여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가 계셨다면, 우리들을 사랑으로 가엾게 여겨 구호해 주셨을 텐데! 지금은 우리들을 버리고 멀리 타국에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혼자가 되어 의지할 데 없고 다시는 믿고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고 항상 슬픈 생각만 했다. 마음이 드디어 깨쳐져서 곧 이 약의 빛깔과 맛과 향기의 아름다움을 알고 복용하여 중독된 병이 다 나았다. 그 아버지가 아들들이 이미 병이 나았음을 듣고는 곧 바로 돌아와 함께 보게 되었다.
붓다의 입멸은 중생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중생들은 붓다의 지혜를 알기 어렵고, 붓다의 설법은 난해하다는 것을 [방편품]에서 전제하였다. 길장은 <법화론소>에서 붓다가 열반을 보여 대승의 제일가는 약을 복용하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친이 <법화론>에서 근기가 아직 순수하게 성숙하지 않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기 위하여 열반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 주석한 데 대하여, <법화론소>에서 길장은 근기가 아직 미숙한 것을 성숙하게 하려는 까닭은, 아직 약을 복용하지 않은 미친 아들이 약을 복용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열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아들로 하여금 약을 복용하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죽음을 나타낸 것과 같이, 붓다도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아 알게 하고자 열반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법화경>은 중생교화의 입장에서 붓다의 무량한 수명을 설하고 있다. 붓다와 법신(法身)은 동격으로서 시방세계에 상주한다. 깨달음에 수명의 한계가 없듯이 구원실성의 붓다도 수명이 없다. 이러한 사상은 <대승열반경>에 계승되어 불타관과 열반관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붓다의 수명에 대한 제(諸) 해석/ 박지영(명오) 동국대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