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열반경의 견해
<대승열반경>은 여래의 상주 법신에 입각하여, 붓다의 무량한 수명을 설한다. 붓다는 법신으로서 영원하며, 여래의 상주(常住)가 곧 대열반이라는 입장이다. <대승열반경>은 <법화경>의 법신상주와 붓다의 입멸이 중생교화를 위한 방편이라는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법신사상의 논리체계를 세우고 있다.
<대승열반경>에서는 생신(生身)을 초월한 초역사적이고 초인간적인 개념으로써, 불타관과 열반관을 정립하고 있다. 붓다의 역사적인 죽음은 존재의 무상함과 인간의 생로병사를 중생들에게 인식하게 하여 보리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순타품]에서 순타(純陀)는 설득력 있게 붓다의 수명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
천인들의 수명은 매우 긴데, 하늘 중에 하늘인 세존의 수명은 어찌 백년도 안 됩니까? 여래가 행법과 같다면 삼계 가운데서 하늘 중의 하늘로 자재하신 법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중략) 여래는 번뇌의 마군, 5음의 마군, 하늘의 마군, 죽음의 마군을 항복받기 때문에 삼계에 가장 높은 이라 합니다.
위의 질문에 대하여 붓다는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열반에 들고자 한다고 해명한다. 그리고 "붓다가 장수하거나 단명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모든 법은 환상과 같다."고 설한다. 결국, 순타 자신은 붓다의 열반이 방편인줄 알게 되었지만, 성문이나 연각의 지혜로는 그 이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장수품]에서는 불신상주(佛身常住)를 중심으로 한 붓다와 가섭보살과의 문답이 계속된다. 대가섭은 어떻게 하면 장수, 금강신, 견고한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생사윤회에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반면, 5음의 모든 법을 묻고자 하지만, 지혜가 없고 부처님 경계를 모르며 지혜의 힘이 없어 깊은 이치를 물을 수 없다고 한다. 붓다와 가섭의 문답을 살펴보도록 하자.
붓다: 평등한 법을 잘 닦아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므로 장수함을 얻고 지난 세상의 일도 잘 안다.
가섭: 장수함을 얻고 전생을 잘 아시는 붓다는 당연히 세상에 항상 머물러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인데 지금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수명이 중생들과 같이 짧습니까? 전생에 무슨 악업과 많은 생명을 죽였길래 백년도 장수하지 못하는가? (중략) 어떻게 여래께서 장수를 얻었다고 하십니까?
붓다: 모든 인간, 천상이나 땅, 공중에 있는 생명의 강들이 모두 여래의 목숨 바다로 들어가듯 여래의 수명은 한량없다.
가섭: 여래의 수명이 한량없다면 한 겁쯤 살면서 설법하시면 안 됩니까?
붓다: 여래는 온갖 목숨은 낸다. (중략) 여래는 모든 항상한 것 가운데 제일이다. (중략) 여러 중생들 가운데 여래의 수명이 제일이다. 여래에 대해 없어진다는 생각을 내지 말라. 5신통을 얻은 사람은 한 겁 가량 살 수 있다. (중략) 일체법에 자재함을 얻은 여래는 항상 머무는 법이고 바뀌지 않는 법이며, 변화한 몸이고 잡식하는 몸이 아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부러 모든 것을 버리고 열반에 듦을 나타낸다.
위의 문답에서는 생신으로서의 붓다에서 법신으로서의 붓다로 전환되는 불타관을 나타내고 있다. 가섭은 지극히 중생의 관점에서, 업에 대한 결과에 자유롭지 못한 생신으로서의 붓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생신은 중생들과 똑같은 잡식의 몸으로서, 불성을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붓다의 몸은 법신이기 때문에, 잡식으로 길러진 번뇌의 몸이 아니다. 붓다는 인과를 초월했으므로, 잡식의 몸이 아닌 것이다. 계속되는 대화를 살펴보자.
가섭: 몸을 버리는 것이 법의 성품이고 몸을 버리는 것이 무위라고 한다면, 무위인데 몸이 어떻게 존재하며, 몸이 없다면 어떻게 몸에 법의 성품이 있다고 하며, 몸에 법의 성품이 있다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붓다: 법의 성품은 멸이 있지 않다. 여래의 몸은 멸하는 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여래의 멸하는 법은 부처의 경계이며, 붓다의 법신과 갖가지 방편은 2승(二乘)은 모른다.
가섭은 육신에 대해 묻고, 붓다는 법신에 대해 답하고 있다. 가섭의 질문은 중생의 입장에서 설득력을 갖춘 보편타당한 물음이다. 반면, 붓다가 설하는 법신의 경계는 2승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단정한다.
[금강신품(金剛身品)]에서 여래의 몸은 법신으로서 항상 머물고 깨뜨릴 수 없으며, 금강같은 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붓다의 입장에서 보면, 여래신은 무량무변한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항상한 몸인 것이다. 여래의 법신은 미묘하고 한량없는 공덕을 모두 성취하였으며, 여래가 일부러 병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은, 중생들을 조복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4상품(四相品)]에서 가섭은 여래는 무상을 설하지만, 무상한 줄 모르겠다며, 여래의 상주 불변에 대해 반박한다. 붓다는 여래의 성품이 소멸해 없어진다는 생각을 말라고 설하며, "여래는 번뇌를 없애고 5취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항상 머무는 법이어서 변역함이 없고 법이 항상하므로 모든 붓다가 항상하다."고 답한다. 가섭과의 문답은 계속 된다.
가섭: 번뇌의 불이 꺼지면 여래도 멸할 것이고 그렇다면 여래는 항상 머물 곳이 없다. 여래도 번뇌의 불을 멸하고 열반에 든다면 여래도 무상한 줄 알겠다. 여래도 번뇌가 멸했다가 도로 생긴다면 무상이라 하겠다.
붓다: 범부는 번뇌를 멸한다 해도 멸한 뒤에 다시 생기므로 무상하다고 하며, 여래는 번뇌를 멸하고는 다시 생기지 않으므로 항상하다는 것이다. (중략) 여래는 무량한 번뇌를 벗고 안락한 열반에 들어 깨달음의 꽃에 놀면서 환희하게 즐긴다.
가섭과 붓다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열반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나타낸다. 가섭은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열반을 부정적으로 정의하는 반면, 붓다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둘째, 중생은 번뇌를 없애도 다시 생긴다. 즉, 죽은 뒤에 업에 따라 재생한다. 그러나 붓다는 번뇌가 멸한 뒤에 다시 생기지 않는다. 즉, 입멸한 뒤에 재생하지 않는다.
셋째, 중생은 생멸하므로 무상하고, 붓다는 생멸하지 않으므로 항상하다. 즉, 생멸을 벗어났기 때문에 붓다는 상주한다는 것이다.
붓다는 대열반과 등불이 꺼짐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등불이 꺼진다는 말은 아라한의 열반은 탐애의 번뇌를 멸하므로 등불이 꺼지는데 비유한 것이지, 대열반이 등불 꺼짐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
초기불교에서의 열반은 '소멸'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그야말로 해탈이다. 마츠모토 시로(松本史朗)는 <대승열반경>에서의 열반은 아트만적 육체로부터의 '이탈' 또는 '해방'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주장하듯이, 열반에 의해 무(無)로 돌아가는 무상한 육신이 아니라고 역설하였다.
붓다는 법신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이성적인 한계가 있음을 거듭 밝힌다. 그리고 "여래인 정각은 대열반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므로 항상 머물고 변역하지 않는다."고 주지한다. 여래의 몸은 먼 과거에 완성한 법신이며, 붓다의 생애를 낱낱이 열거하며 세상의 법을 따르기 위한 방편임을 강조한다. 한편, 붓다는 보살이 대열반에 머무는 경계를 중생들은 측량할 수 없다고 누누이 전제하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열반경>은 불타의 본성으로서 법신을 상주성(常住性)에 근거하여 법신상주사상을 성립하고 있다. 카와무라 코쇼(河村孝照)는 <대지도론>을 근거로 하여 용수시대까지 불신의 영원성과 상주성을 기반으로 한 불신론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전개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하였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법신사상은 <대승열반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분명하게 완성되었다.
4신족을 수행한 붓다의 수명은 겁이라는 초기불전의 견해, 여래의 수명은 끝이 없다는 대중부의 불신관, 무량수(無量壽)와 구원(久遠)의 수명을 설한 초기대승불교를 거쳐 <대승열반경>에 이르러 법신상주, 상주열반이라는 논리로써 대승불교의 불타관과 열반관을 정립하게 되었다.
<붓다의 수명에 대한 제(諸) 해석/ 박지영(명오) 동국대 박사과정 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