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자의 고독
붓다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직후의 상황들은 팔리어 <율장> '대품'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장>에 의하면, 붓다께서는 성도 후 5주째 7일 동안은 라자야따나(Rajayatana) 나무를 떠나 아자빨라 니그로다(Ajapala Nigrodha) 나무로 다시 자리를 옮겨 깨달음의 희열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함빠띠(Sahampati)라는 범천이 나타나 세존께 법을 설하시도록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범천권청(梵天勸請)'의 설화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범천의 권청이 있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 경전이 있습니다.
<상응부경전>의 '공경(恭敬, Garavo)이라는 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경전에 묘사된 내용도 세존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후 다섯 번째 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이 경전에 깨달음을 이룩한 정각자의 고독을 표현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괴롭다.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중하고 가까이해야 하랴."
붓다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더 없는 즐거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아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붓다 자신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같은 생각을 지닌 자가 있다면 흉금을 털어놓고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토로할 대상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무엇인지 모를 고독과 불안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것을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정각자의 고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때 붓다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가 깨달은 법, 이 법을 존중하고 가까이하면서 살리라."
이 대목을 한역 <잡아함경>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직 바른 법이 있어서, 세존께서 스스로 깨달아 다 옳은 깨달음을 성취하였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래께서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할 만한 것으로써, 그것을 의지해 살아 가셔야 할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모든 여래, 응등정각(應等正覺, 다 옳게 깨달은 이)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았고, 미래의 모든 여래, 응등정각도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도 그 바른 법을 공경하고 존중하며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그것을 의지해 살아가셔야 할 것이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별역잡아함경>에서는 범천의 입을 빌리지 않고, 붓다께서 직접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습니다.
"일체 세간에 살고 있는 생류(生類) 중에서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anna), 해탈(解脫, vimutti), 해탈지견(解脫知見, vimuttinanadassana)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내 마땅히 가까이 하여 그에게 의지하고 공양, 공경하겠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세간의 인천(人天), 마(魔), 범(梵), 사문, 바라문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일체의 세간에서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이 나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면 나는 의지할 것이다. 그렇지 못할 바에야 '내가 깨달은 법'을, 내가 지금 마땅히 가까이 하고 공양, 공경하며 성심껏 존중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후세의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내가 깨달은 법'을 객관화하여 흔들리지 않도록 확립해 놓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거기에서 설법이라는 과제가 새로이 그의 앞에 다가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타와 불전/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