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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밑에서의 정관(靜觀)
이와 같은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의 7일째 되던 날 초저녁에 부처님은 이 세상 만물의 실존적인 상황에 상도(想到)하였다.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서로 얽히고 서로 관련되어진 상황에 놓여 있다. 그와 같은 인과관계를 재래로 한역경전에서는 연기(緣起)라고 불러 온 것이다.
연기(緣起)란 인도의 원어로 말하면 pratityasamutpada라고 하는 것으로 prati(…에 대하여, …과 더불어), itya(iti+ya …라는 상태에서), sam(함께, 더불어), utpad(생기다, utpada 생기는 것)로 분석하여 설명할 수가 있다. '…에 대하여 라는 관계에서 더불어 생기는 것' 그것이 연기(緣起)의 원 뜻이다.
그것은 중생들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어 가는 도중에 여러 가지로 갈피를 잃고 고통 속에 헤매는 인과관계를 의미할 수 있다. 인생의 인과관계를 이렇게 봐 내려가는 것을 순관(順觀)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면에 인간들이, 그러한 혼미에서 어떻게 하여 벗어나 고통 없는 행복한 경지를 누릴 수 있는가 하는 인과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후자를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또 연기란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도 한 것으로 우주의 만상(萬象)에 공통되는 움직임일 수 없는 이법(理法)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인간이 고통 속에 태어났다가 불행하게 죽어 가는 그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부처님이 풀 수 있었던 유일한 열쇠가 바로 이 연기의 이법이다. 어떻게 말하면, 부처님의 스승은 바로 이 법 자체였던 것이다.
역관(逆觀)을 또한 증관(增觀)이라고도 하고, 순관(順觀)을 또 멸관(滅觀)이라고도 한다. 증(增)한다는 것은 복잡 다단화함을 말하고 멸(滅)한다는 것은 단일순화(單一純化)함을 말하는 것이다. 다소 후대의 경전들은 연기를 열두 가지 현상의 인과관계로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12연기라고 하는데, 그런 설명 방법은 아마 시대가 조금 내려온 뒤 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이론인 것 같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의 근본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여기에 적어 보기로 하자. 먼저 인생의 고통이 생기는 인과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슬픔과 고통에 가득찬 노사(老死)는 무엇을 인연으로 하여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생(生)이 있는 탓이다.
생(生)은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유(有)가 있는 탓이다.
유(有)는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취(取)가 있는 탓이다.
취(取)는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애(愛)가 있는 탓이다.
애(愛)는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수(受)가 있는 탓이다.
수(受)는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촉(觸)이 있는 탓이다.
촉(觸)은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6처(六處)가 있는 탓이다.
6처(六處)는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명색(名色)이 있는 탓이다.
명색(名色)은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식(識)이 있는 탓이다.
식(識)은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행(行)이 있는 탓이다.
행(行)은 무엇을 인연으로 생기는가, 무명(無明)이 있는 탓이다.
무명(無明)이 있는 연고로 행(行)이 있고,
행(行)이 있는 연고로 식(識)이 있고,
식(識)이 있는 연고로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名色)이 있는 연고로 6처(六處)가 있고,
6처(六處)가 있는 연고로 촉(觸)이 있다.
촉(觸)이 있는 연고로 수(受)가 있고,
수(受)가 있는 연고로 애(愛)가 있다.
애(愛)가 있는 연고로 취(取)가 있고,
취(取)가 있는 연고로 유(有)가 있다.
유(有)가 있는 연고로 생(生)이 있고,
생(生)이 있는 연고로 노사(老死), 슬픔과 고뇌가 있다.
이 말씀 중에는 다음과 같은 열두 가지의 현상(現象, 十二支) 사이의 인과관계가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①노사(老死, 고뇌)
②생(生)
③유(有, 개체)
④취(取, 집착)
⑤애(愛, 애착)
⑥수(受, 감수작용)
⑦촉(觸, 접촉)
⑧6처(六處, 안이비설신의의 여섯 기관)
⑨명색(名色, 名은 개념, 명칭, 色은 형태, 성격)
⑩식(識, 분별작용)
⑪행(行, 잠재적 의지력)
⑫무명(無明)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을 바로 순관(順觀)이라고 하는 것이며, 역관(逆觀)은 그와는 반대로 다음과 같이 형식화되고 있는 것이다.
슬픔과 고통의 노사는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생(生)이 멸하면 멸한다.
생(生)은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유(有)가 멸하면 멸한다.
유(有)는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취(取)가 멸하면 멸한다.
취(取)는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애(愛)가 멸하면 멸한다.
애(愛)는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수(受)가 멸하면 멸한다.
수(受)는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촉(觸)이 멸하면 멸한다.
촉(觸)은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6처(處)가 멸하면 멸한다.
6처(處)는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명색(名色)이 멸하면 멸한다.
명색(名色)은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식(識)이 멸하면 멸한다.
식(識)은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행(行)이 멸하면 멸한다.
행(行)은 무엇이 멸하면 멸하는가, 무명(無明)이 멸하면 멸한다.
무명(無明)이 멸(滅)하면 행(行)이 멸(滅)한다.
행(行)이 멸하면 식(識)이 멸한다.
식(識)이 멸하면 명색(名色)이 멸한다.
명색(名色)이 멸하면 6처(六處)가 멸한다.
6처(六處)가 멸하면 촉(觸)이 멸한다.
촉(觸)이 멸하면 수(受)가 멸한다.
수(受)가 멸하면 애(愛)가 멸한다.
애(愛)가 멸하면 취(取)가 멸한다.
취(取)가 멸하면 유(有)가 멸한다.
유(有)가 멸하면 생(生)이 멸한다.
생(生)이 멸하면 노사(老死)와 슬픔, 고통이 멸한다.
이것을 일컬어 역관(逆觀)이라고 한다. 그것은 멸(滅)의 인과관계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관찰을 밤새도록 계속하였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정관(靜觀)이 언제나 이 기록 그대로이기만 했던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하겠다. 이것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형식을 통하여 부처님의 사유의 내용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미혹과 염오의 역사에 대한 설명(즉 순관)이자 또 각오(覺悟), 순정(純淨)의 역사에 대한 설명(즉 역관)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세계가 생겨나는 원인경과(原因經過)의 구명(究明)이며, 또 깨달은 안목에 의해서 보여진 제현상(諸現象)의 여여(如如)한 모습의 관조(觀照)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여여한 모습'이란 영원한 모습, 그냥 그대로 그렇기만 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여한 모습에 관한 관조는 <화엄경> 10지품(十地品) 안에서 12연기를 설명할 때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일체(一切)의 법(法)은 평등하다. 무성무상(無性無相)하며 무생무멸(無生無滅)하고, 본래 청정하여 희론(戱論)치 않으며 취하지 않고, 사(捨)하지 않고, 떠나 있어 몽환(夢幻) 등과 같고, 또 유무불이(有無不二)인 까닭에 제법은 평등하다.
일체의 법이 평등하다는 것은 모든 사상(事象)이 차별적이지만 그냥 그대로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여여(如如)한 실상(實相)이라고 부른다. 차별이라고 하지만 그 차별은 인연에 의해서 생긴 것인 까닭에 그 자체에 무슨 항구불변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차별적인 개체의 실재성(實在性)을 부정하는 말이 공(空)이란 말이다. 그 공(空)이 바로 실상인 것이다.
초기의 불교도들 간에는 세계의 현실을 설명할 때에 어떤 고정관념을 사용하되 그 관념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 괴롭다(苦), 허망하며(空), 알맹이가 없는 것이다(無我), 운운(云云)할 때에 갖가지 차별의 모습으로 전개되는 그 실상을 영원하고 집착 없는 관점에서 내다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모든 것은 변화하고 전변(轉變)한다. 그것은 인연생인 까닭이며, 따라서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다. 이 무상은 사물이 처해 있는 그대로의 상(相)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말은 브라아마니즘의 고전인 <우파니샤드> 등에 실린 상주설(常住說)을 반대하는 것이다. 또 뒤집어 말하면 무상한 그대로 상주한 것으로서 꽃은 피면서 상주하고 잎은 지면서 상주한 평등상(平等相), 실상(實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망각한 무상설은 역시 집착된 관찰방식이며 지혜가 원만치 못한 자가 보는 방식이다.
또 무아(無我)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인도 고유의 영혼 실유론(實有論)과 같은 그릇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말한 것으로 그 실아(實我)라고 생각되는 '마음'이 결코 허무도 객관적인 실체도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마음'은 한편으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말하면 영원히 그냥 그렇기만 한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한 살아 있는 진리를 불성(佛性)이니 여래장(如來藏)이니 하였다. 불성이란 각자(覺者)의 각자(覺者)인 소이(所以)이며, 여래의 종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를 허무로 해석하는 것은 지혜가 덜 발달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짓인 것이다. 또 고(苦)라고 했지만 그것은 세속의 의미로 고(苦)인 것이지, 고락(苦樂)을 초월한 각자의 경지에서 말하면 고(苦)일 수가 없다.
실로 용수보살(龍樹菩薩)도 말하였듯이 일체개고(一切皆苦)라 한 것은 '유루법(有漏法)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으로서 무루(無漏)의 사람에게는 고(苦)가 아닌 것이며' 그렇다고 또 낙(樂)도 아닌 것으로서 다시 말하면 법열(法悅)이며, 법락(法樂)인 것이다. 공(空)이라고 한 것은 집착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말한 것뿐이다.
부처님이 본 세계는 성(性)도 상(相)도 없고, 생멸이니 유무니 하는 구별이 없이 평등한 세계다. 그와 같은 경지는 오직 만물을 차별하지 않는 대자비의 심경(心境)인 것이다. 그런 경지를 <10지경(十地經)>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일체의 법의 그러한 상(相)을 관(觀)하고 대비를 으뜸 삼아 그것만을 증장시키는 까닭에 이 세상의 생멸의 상(相)을 관(觀)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육신을 얻어 태어남은 모두 '나'라는 것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나'라는 것에 집착을 하지 않게 되면 곧 태어남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부처님인 까닭은 그 대비의 마음 때문이다. 자기를 무(無)로 돌리고, 자기를 잊고 남을 앞세우는 것은 모든 중생이 있어야 하는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모습이다. 사람들이 이 사실은 잊어버리고 자기만을 주장할 때에 그릇된 사견(邪見)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릇된 자아의식에 빠지는 것을 아견(我見)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견 때문에 여러 가지 미난(迷亂)이 생기는 것이다. 아견을 떠나면 나와 남과의 대립, 생(生)과 멸(滅)과의 차별이 없는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가 열리는 것이다.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그릇된 생각을 따르고, 망녕된 길에 들어서, 어리석음에 눈이 멀고 그릇된 '나'에 애착을 가져 세 가지 종류의 행동을 일으킨다. 즉 죄짓는 일, 복(福)있는 일, 동(動)함이 없는 일의 셋이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온전치 못한 마음의 씨를 발생케 하고, 또 그 온전치 못한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생사를 겪는 육신을 낳게 된다. 이를테면 업(業)을 땅이라 한다면, 식(識)은 종자로서 (이 식이) 무명에 뒤덮이고, 애착의 물에 젖어 내 마음에 관개(灌漑)하고, 여러 가지의 견해를 증장시켜 명색의 싹을 낳게 한다. 명색 때문에 여러 가지 근(根, 器官)이 생기고, 여러 근(根)이 합하는 까닭에 촉(觸)이 있고 촉(觸)으로부터 수(受)가 생기며 괘락적인 수(受, 樂受) 때문에 애(愛)가 생기고 애(愛)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取)가 있고 취(取)의 인연 때문에 개체(個體, 有)가 있고 그 개체(有)에 다섯 가지 구성요소(構成要素, 五陰身)를 일으키는 까닭에 생(生)이라 하고 이 구성요소들이 변하는 것을 일컫어서 노(老)라 하고 이 구성요소들이 없어지는 것을 일컬어서 사(死)라고 하는 것이다. 노사의 인연으로 근심과 걱정, 슬픔, 고민 등의 모든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12인연이다. 모으는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흩어지게 하는 주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연(緣)이 합하면 곧 있고, 연(緣)이 흩어지면 없는 것이다."
이 말씀에도 나와 있듯이 미혹이란 실로 일념으로서 홀연히 생겨 천개 백개의 파도와 같은 기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필경 그 까닭은 실상(實相)의 묘체(妙諦), 제1의제(第一義諦)를 모르는 무명에 있는 것이다. 이 무명으로부터 '나'라는 마음이 생기고, 죄와 복이 구별되고, 번뇌가 생기며, 생사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연(緣)이 합하면 있고, 연(緣)이 흩어지면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은 오직 연(緣)의 집산뿐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3계(三界)는 허망한 것으로 다만 일심이 지은 것이다. 12연분(十二緣分)은 모두 이 마음에 근거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의 깊은 뜻은 그 밖의 여러 대승경전 속에 잘 천명되어 있다. 이것은 부처님이 증오(證悟)한 내용의 골자(骨子)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 경계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여
업(業)이 능히 온갖 경계의 상(相)을 다 일으키도다.
중생의 때가 더러우니 나라가 청정치 못하며
행(行)하는 업(業)은 무량하여 세계가 한결같지 않도다.
부처님의 나라는 깨끗한 장엄(莊嚴)에 가득차 있으니
더러움 없는 온갖 보패(寶貝)로 장식되어 있도다.
무구(無垢)함을 기르고 가꾸어 서원(誓願)의 바다를 넓히니
부처님 제자는 능히 무수한 국토를 청정케 하도다.
衆生心境不可思議 業能悉起一切刹海 衆生垢穢國不淸淨 行業無量世界不同
諸佛刹海淨莊嚴藏 離垢雜寶以爲校飾 長養無垢弘誓願海 佛子能淨無數國土
화엄세계(華嚴世界)의 바다
진리의 경계는 한결같이 차별이 없네
장엄하고 청정하기 비할 데 없으며
허공에 안주(安住)하여 계시네.
이 세계의 바다 속의
온갖 경계는 사의(思議)키 어려우니
그 하나하나가 모두 자재(自在)하여
각각 잡난(雜亂)함이 없는 것일세.
華嚴世界海 法界等無別 莊嚴極淸淨 安住於虛空
此世界海中 刹種難思議 一一皆自在 各各無雜亂
진여는 거짓을 떠나 항상 적정(寂靜)하며
생(生)함도 멸(滅)함도 없이 두루 미치지 않는 바 없으니
부처님들의 경계가 또한 그러하도다.
체성(體性)이 평등하여 늘거나 줄지 않으니
비유컨대 틀림없는 경계이나 경계 아님과 같고
두루 3세(三世)에 걸쳐 있으되 또한 그렇지 아니하니
도사(導師)이신 부처님의 경계가 또 그러하도다.
3세에 두루 미쳐 모두 장애가 없으며
법성(法性)은 작(作)함도 없고 변이(變易)함도 없으니
마치 허공이 본래 청정함과 같도다.
처님 본성(本性)의 청정함이 그와 같으니
본성은 성(性)이라 할 바 아니며 유무의 별(別)을 떠나 있고
법성은 언론(言論)에 있지 아니하며
언설(言說)을 떠나 항상 적멸(寂滅)하도다.
진여이망항적정 무생무멸보주변 제불경계역복연 체성평등불증멸
비여실제이비제 보재삼세열비보 도사경계역여시 변어삼세개무애
법성무작무변이 유여허공본청정 제불성정역여시 본성비성이유무
법성부재어언론 무설이설항적멸
위의 게송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상을 진여니 본성이니 법성이니 하지만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실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실상은 일체만물의 여여한 상(相)을 두고 한 말이다. 보리수 밑에서 7일 동안을 보내고 난 뒤 부처님은 또 '아쟈파알라 니구롯다'라는 다른 나무 밑으로 가서 또 7일을 보내고 다음 세 번째 7일은 무챨린다 나무 밑에서 보냈고, 그리고 네 번째 7일을 '라자야타나'란 나무 밑에서 보냈다.
둘째 7일 동안에는 모든 것을 비웃는 버릇이 있는 거만한 브라아만 승려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진정한 브라아만이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 7일 동안에는 날씨가 나빠 찬 비 바람이 계속하여 불었는데 그 동안에 용왕의 시중을 받았다. 넷째 7일 동안에는 먼 북쪽 지방으로부터 온 두 행상인 타팟수(帝波須)와 발리카(跋利迦)의 공양을 받고, 두 사람의 원(願)을 받아들여 최초의 재가제자 두 사람을 얻었다.
그 때는 아직 출가한 제자들의 집단이 없을 때인데, 이와 같이 세속생활을 그대로 하면서 부처님을 받들어 그의 가르침을 실행해 가는 남자들을 우파아사카(優婆塞)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루베에라의 숲 속에서 고행을 할 때에 이미 사람들로부터 대성자(大聖者)로서 존경을 받았다. 이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고 지금 보리수 밑에서 성도(成道)한 뒤 아직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벌써 그 거룩한 위덕(威德)에 감화를 입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석가모니/ 이기영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