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천권청(梵天勸請)
<율장(律藏)> 및 몇몇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은 성도(成道) 후 자기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천상 세계에 사는 범천(梵天)의 권고로 세상 사람을 위한 설법을 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에 관한 <율장>의 산문(散文) 부분은 분명히 후세의 것이지만 거기에 인용된 시구(詩句)는 좀 오래된 문헌에 속하는 것이다. 부처가 설법을 주저한 모습을 이 시구에 의해서 엿보기로 하자.
애써 고생하면서 내가 증득(證得)한 것들도
이제 어떻게 말할 수가 있을까?
탐욕과 시기, 질투, 분노에 병든 사람들이
이 법(法)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며, 지극히 미묘하고,
심원(深遠)하여 보기 어렵고 미세하므로
욕심에 집착하고, 암흑에 덮인 자들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범천(梵天)은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설법을 권고했다.
더러움을 탄 사람이 생각해낸 더러운 교법(敎法)이 일찍이 마가다국에 나타났습니다.
원하옵건대 이 감로(甘露)의 문을 열고,
무구(無垢)하신 분께서 깨달으신 법을 들려주소서.
비유하건대 산꼭대기의 바위에 서서
두루 모든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이
지혜가 탁월하신 사방에 눈을 가지신 분이여,
당신은 법으로 된 고루(高樓)에 올라
스스로 이미 근심을 넘어서 계시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우수(憂愁)에 잠겨 생과 사의 위협에 떠는 모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일어서 주시옵소서. 영웅이여, 승리자여,
캬라반의 주인이시어, 부채(負債) 없으신 분이시여, 이 세상 사이를 걸어 주시옵소서.
세존이시여, 법을 설하여 주옵소서.
깨닫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범천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에게 감로(甘露)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각자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아, 사람들에게 해로울까 싶어 미묘한 법을 사람들에게는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당시의 인도 사회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행위였다고도 할 수가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기 전까지 인도에 있어서의 지배적 종교였던 브라만교도들 사이에서, 특히 <우파니샤드>의 철인(哲人)들 사이에서 진행되던 교육방법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여실히 알 수가 있다.
이 철인들은 가르침을 받을 대상을 좁게 제한하고, 자기 아들이라든가 혹은 그 밖의 몇몇 훌륭한 재간 있는 사람들에게만 진리를 전수(傳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당시의 습관을 완전히 깨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까지에는 상당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소위 범천권청(梵天勸請)이라는 사실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그런 견지에서도 짐작이 된다.
그러면 누구에게 먼저 그 깨달은 진리를 전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초기 경전은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나는 먼저 누구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 좋을까? 누가 이 법을 속히 이해할 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참말 알라라 칼라아마는 현자(賢者)고, 식견(識見)이 있고 총명하고, 오랫동안 무구(無垢)하게 산 사람이다. 자,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자. 그는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 그때 어떤 천인이 내 곁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현자여, 알라라 칼라아마가 죽은 지 7일이 됩니다." 나에게도 그와 같은 지(知)와 견(見)이 생겼다. ……
그때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참말로 라마의 아들 웃다카는 현자며 식견이 있고 총명하고, 오랫동안 무구하게 산 사람이다. 자 라마의 아들 웃다카에게 제일 먼저 법을 설하자. 그는 이 법을 빨리 이해할 것이다.' 그때 어떤 천인이 내 곁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현자여, 라마의 아들 웃다카는 어젯밤에 죽었습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와 같은 지(知)와 견(見)이 생겼다. ……
나는 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내 일을 돌보아 주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들은 나를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자, 나는 제일 먼저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법을 설하자.'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섯 사람의 수행자가 지금 어디에 있을 것일까?' 나는 맑고 개끗한 초인적인 천안(天眼)을 가지고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바라나시(베나레스)의 선인(仙人)들이 사는 곳, 사슴의 동산에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우루벨라촌(村)에 머무르고 싶은 대로 있다가 바라나시로 향해서 걸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부처님은 일찍이 교제가 있었던 사람들을 상기하고 먼저 그들에게 자기가 깨달은 내용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석가모니/ 이기영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