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석가여래응화사집(釋迦如來應化史集)의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은 6일간 먼저 4선8정(四禪八定)을 얻고, 다시 의생신(意生身)을 얻었으며, 마지막 하룻밤 사이에 6신통(六神通)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 새벽 머리를 한 번 들었을 때(주의하십시오! 석가모니부처님의 타좌는 우리처럼 그렇게 고지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야 감히 머리도 쳐들지 못하지만, 석가모니부처님은 고개도 들었습니다. 아마 한 차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겠지요)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을 보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습니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저는 이 부분에서 도연명(陶然明)의 시가 생각납니다.
동쪽 담장 아래 국화를 꺾다가 采菊東籬下
고개 들어 유연히 남산을 본다. 悠然見南山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도연명 역시 도를 깨달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깨달은 과정입니다. 이것은 물론 소선생이 제기한 문제, 즉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바라보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어떨까요? 일단 고개를 들어 도를 깨우친 다음에는, 이전의 여러 수련 과정이 모두 낭비에 불과했으며, 12년의 공부가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을 때는 불과 30세 전후였고, 법을 전할 때만 해도 불과 32세 전후였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대부분 그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석가모니께서 어렸을 때 받은 교육, 그리고 출가 후의 각종 수련과 고행이 과연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을까요?
저는 당시 소선생의 물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바로 '연기의 본성이 공(空)'[性空緣起]이라는 것이지."
그랬더니 소선생은, '그래, 그렇지!'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여러분은 주의했는지 모르지만 이건 아주 엄중한 문제입니다. 그가 떠난 뒤 다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면 별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소선생이 물었으니 상당히 엄중한 문제일 것이라고요. 사실 그의 물음은 매우 깊은 것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공(空)의 본성은 연기(緣起)요, 연기의 본성은 공'[性空緣起, 緣起性空]이었는데, 이 간단한 이치가 왜 당시에는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어떤 부분이 어려웠을까요?
부처님이 19세에 출가하여 그렇게 오랜 동안 수련하여 겨우 알게 된 이치를 현재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며, 불경을 한 번 쯤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에 무슨 희귀한 것이 있다고 하고, 그걸 깨닫기만 하면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다고 하니, 도대체 왜 그럴까요? 가령 부처님이 깨달은 이 이치가 옳다고 한다면, 그 이전에 했던 공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문제입니다만, 우리는 현재 부처님을 배우면서 불법을 접하자마자 곧 “자성(自性)은 본래 공이며, 공의 본성은 연기”[自性本空, 性空緣起]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모두 알고서도 우리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다시 수련해야 할까요? 이렇게 수련을 하고서도 우리는 왜 보살은커녕 초보적인 소승 나한에도 이르지 못할까요? 더욱이 탄식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시대에는 반개의 과위도 증득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소선생이 떠난 뒤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의 문화나 종교가 이렇게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는데도,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고 사상마저 혼란에 빠져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작년 연말부터 올 봄까지 해외로 나간 학생들이 보내온 편지를 봐도 그렇습니다. 읽어볼 자료도 많고, 수도도 열심히 하며, 뭐든 훌륭하게 하지만, 도처에 혼란이 깔려 있더라는 겁니다.
정말 어느 것 하나 혼란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사람 하나 혼란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소위 난세입니다. 이 때문에 제 마음도 몹시 불안한데, 거기다 소선생의 문제 제기까지 겹친 겁니다. 문제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주의하십시오! 우리의 불교 공부는 인과가 전도(顚倒)되어 있습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원인을 결과로 잘못 안다.'[倒因爲果]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원인을 결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성본공(自性本空)’이니 모든 것이 인연에 의거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배워서 안 이론에 불과합니다. 우리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그렇게 오랫동안 고행을 거친 후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한 겁니다. 그것이 기록되어 전해짐으로써 우리기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사실 우리가 이해한 것이 아니라 불경의 증상연(增上緣)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부처님의 성과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직접 수행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석가모니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선정(禪定)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진정한 수련의 길에서 스스로 ‘연기성공’을 체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이치를 알게 된 후, 이것이 마치 자기의 성과인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타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도교든 밀종이든 입만 열면 전문용어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면, 이건 전혀 아닙니다. 공부가 있는지 없는지, 실제 얻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한 번 보기만 해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송대의 대혜고(大慧杲)선사가 말합니다.
"자네가 개오(開悟)했는지 안했는지 자네가 거기 서 있기만 해도 알아, 다시 무슨 말이 필요해?"
그런데도 요즘 사람들은 입으로 온갖 이치를 다 말합니다. 무슨 기경8맥이니, 이리 통하고 저리 통한다느니 하며 온통 떠들썩합니다. 그렇게 신체를 어지럽게 통해서는 안 됩니다. 이게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먼저 불경상의 지식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앞 사람이 수련한 성과를 가져다 자신의 성과로 삼으려는 겁니다.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 알고, 원인을 결과로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런 방대한 가르침도 이론적으로든 경험적으로든 생사 문제와 생명의 문제에 대한 회의입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완전히 이해할 것이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소선생이 지적한 문제는 매우 중요하며, 그것이 바로 이 강의의 직접적 동기입니다. (중략)
이제 다시 문제의 핵심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주지하다시피 수증(修證)공부를 하면서 흔히 범하기 쉬운 착오는, 앞 사람의 수행 경험과 누적된 견지(見地)를 가져다가, 원인을 결과로 잘못 파악해서 그것을 불학(佛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나는 나요, 불학은 불학일 뿐입니다. 양자가 이처럼 대립되면 수행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입니다만, 수행의 방법과 불학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가야할 길은, 부처님을 배우는 노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참고경전
(1) 경부(經部)
대반야경
대열반경
화엄경
금강경
심경
유마힐경
능가경
해밀심경
승만부인경
대보적경
법화경
능엄경
원각경
(2) 율부(律部)
사분율 -소승
보살계 - 대승
(3) 논부(論部)
현관장엄론
대마하지관
종경록
정속지월록
대지도론
밀종도차제론
유가사지론
보리도차제광론
부처님을 배우고 불법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위에서 열거한 경부, 율부, 논부 저술들에 대해 적어도 사오 년 정도는 투자하여 비교적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라면 충분합니다. 이 강의에서 다루는 내용도 위의 저술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내용을 스스로 깨칠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련에만 전념하면 되지 경론을 꼭 읽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착오입니다. 이치에 밝지 못하면 관점이 바로 서지 않아 바른 길로 들어설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부가 시원찮은 것은 이치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학생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요 이틀 동안 제 마음에 분명히 뭔가 생긴 것 같은데, 그것이 뭘까요?"
그는 분명 어떤 문제에 부딪쳤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여러분에게도 모두 있을 수 있습니다. 확실히 문제는 문제입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제가 그걸 찾으려 하면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못 찾을 거네, 그건 생리가 심리에 미친 영향일 뿐이야. 요 며칠 날씨가 좋지 않아 아마 감기에 걸렸을 거네. "
이런 것이 소위 부처님이 말하는 번뇌입니다. 찾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찾기 어렵고, 반대로 더 커질 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자네가 찾으려 하면 그건 이미 도망치고 없을 거야. 마치 도둑놈처럼 ‘도둑이야!'하고 소리쳐 봐야 이미 도망가고 없지. 마음속에 번뇌가 생기면 그냥 내버려두게, 어차피 원인을 찾을 수 없으니까.' 그는 결국 다른 생각으로 그 생각을 대체했습니다. 저는 그게 옳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보통사람들이 수양 방법일 뿐입니다. 고명한 사람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고명한 사람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금강경>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無所從來, 亦無所去]고요. 그림자도 없이 다가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걸 알았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겁니다. 번뇌가 생겨날 때 그걸 억제하려하면 이런 불합리한 생각이 도리어 진짜 번뇌가 됩니다. 번뇌를 하나 덧붙인 격이 되고 맙니다.
<남회근 선사의 불교수행법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