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기쁨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나 하는 것은 도저히 우리 범부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흔히 '이지불이(理智不二)'의 세계, '불불상념(佛佛相念)'의 세계, '자수용법락(自受用法樂)'의 경계라고 불려진다. 이지불이라 하는 것은 지혜가 이(理)에 그대로 일치된 상태라고 할 수 있고, 불불상념(佛佛相念)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상념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그리하여 스스로 절대자의 정신적 기쁨을 누리는 경계를 자수용법락의 경계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범부는 다만 우러러 존숭(尊崇)하고 찬탄(讚嘆)하며 경앙(敬仰)하는 수밖에 없다. 맑은 거울에는 일시에 만상(萬象)이 환하게 다 그 모습을 비취는 것과 마찬가지로 맑은 마음에는 모든 경계가 다 와서 거기에 머문다. 그 마음을 바다에 비할 수가 있다.
마음이 경계를 쫓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마음의 바다에 와서 머무는 것이다. 실로 깨달은 그 분의 이와 같은 것으로, 이를 일컬어 또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도 하는 것이다. 제법 즉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을 여여실실(如如實實)이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경(經)에 "바다의 기특(奇特)함이 미증유(未曾有)하여서 일체의 중상(衆像)의 류(類)를 인현(仁賢)함과 같다."한 것은 바로 이런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설명하는 말이다.
<화엄경(華嚴經)>의 [세간정안품(世間正眼品)]에는 여러 가지 게송을 가지고 이 때의 부처님을 찬탄하고 있다.
다함 없이 평등하고 훌륭한 진리의 세계에
모두 다 여래(如來)의 몸이 가득차 있네.
취(取)함도 없고 기(起)함도 없이 영원히 적멸(寂滅)하여
일체가 귀(歸)하는 까닭에 세상을 초월하였네.
제불(諸佛)은 진리의 왕(王), 세간(世間)을 초출(超出)하시며
능히 더할 나위 없이 바른 교법(敎法)을 세우시니
여래의 경계에는 제한이 없으시며,
세간에 있어 자재(自在)하니 무상(無上)이라 부르네.
부처님의 사의(思議)키 어려움이 비할 바 없으니
그 상호(相好)의 광명은 시방(十方)을 비추이며
대성세존(大聖世尊)의 교도(敎導)하심은 참되고 바르니
마치 맑은 눈으로 밝은 구슬을 보는 것과 같더라. 이 세간의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 공덕을 능히 사의(思議)할 수 없네.
모든 우치(愚癡)의 암흑을 소멸하여
무상(無上)한 지혜(智慧)의 태상(台上)에 뛰어 올라 계시네.
無盡平等妙法界 悉皆充滿如來身 無取無起永寂滅 爲一切歸故出世
諸佛法王出世間 能立無上正敎法 如來境界無邊際 世間自在稱無上
佛難思議無倫匹 相好光明照十方 大聖世尊正敎導 猶女正眼觀明珠
一切世間衆生類 不能思議佛功德 消滅一切愚癡闇 超昇無上智慧台
성도한 붓다(覺者)는 고요히 동쪽을 향하여 앉아 있을 뿐이지만, 이루 다할 수 없이 광대하고 모든 것에 두루 한결같은, 즉 어려운 말로 무진평등(無盡平等)한 진리가 그 육신에 가득차 '적멸의 선락(禪樂)이 무변(無邊)'한 것이다. 적멸한 채로 그냥 '일체의 귀(歸)'(모든 것이 돌아가는 곳)가 되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정법(正法, 올바른 진리)을 설하는 것이다.
성자(聖者)에게는 말씀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그대로 대설법(大說法)이며 대웅변(大雄辯)인 것이다. 부처님 일대(一代)의 설법은 실로 이 적멸의 선락(禪樂)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속에 간직되어 있는 것으로 그저 때에 따라 그것을 개시(開示)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스스로 내면적으로 증오(證悟)한[自內證] 경지는 우리가 능히 알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우러러 존숭해야 할 것이기는 하나 부처님의 설법의 말씀을 통하여 다소 그 묘경계(妙境界)를 들여다 볼 수 있을 뿐인 것이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부처님이 성도(成道)한 후의 이야기들을 기록한 여러 율본(律本)에 의하면 부처님은 마귀를 항복시키고 성도한 한 4*7일 즉 28일 동안 혹은 7*7일 즉 49일 동안 보리수 밑에서 또는 그 밖의 다른 나무들 밑을 찾아 홀로 부좌(趺坐)하고 열반(涅槃)의 맛을 맛보았다고 적혀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화엄경>의 소위 적멸의 선락인 것으로 언어의 길이 끊긴([言語道斷] 묘경계(妙境界)를 스스로 즐기는 그러한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석가모니/ 이기영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