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존의 선정
석존이 보리수나무 밑에서 도를 성취하신 것은 오로지 선정의 종교적인 수행의 결과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중부(中部) 제36 살차가대경(薩遮迦大經), 중부 제100 가상라경(歌傷邏經, saṅgārava-sutta)에서는 분명히 선정에 의한 성도를 설하고 있고, 그 뒤의 불전도 모두 수하내관(樹下內觀)을 말하여 이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본래 선정은 지(止)와 관(觀)이 균등하게 쌍운(双運)되는 것이니, 지(止)에 의해서 탐욕이 없어져서 심해탈이 얻어지고, 관(觀)에 의해서 무명이 멸해져서 혜해탈(paññā-vimutti)이 이루어지므로 선정에 의해서 지혜가 얻어지지 않으면 열반을 증득할 수 없다.
이것을 <법구경>에서도
'선정이 없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고
지혜가 없는 자에겐 선정이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자는 실로 열반에 이른다.'
(n'atthi jhānaṁ appaññassa paññā n'atthi ajhāyato, yaṁhi jhānañ ca paññā sa ve nibbāna santike, 無禪不智 無智不禪 道從禪智 得至泥洹)고 했다.
선에 의해서 지와 관이 균등히 이루어지면 이때에 지혜가 갖추어져서 열반에 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석존이 보리수 밑에서 성도하실 때에 명성을 보셨다고 하는 것은 지혜의 빛이 나타난 것이다.
불교의 열반(nirvāṇa, nibbāna)은 선정과 지혜가 갖추어진 세계다. 불교의 열반은 불을 끈 것 같은데 그친 것이 아니고 만물의 진상이 밝게 나타난 세계에서 현법낙주(現法樂住)하는 세계다. 또 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실로 요가로부터 지혜가 생기나니,
요가를 하지 않으면 지혜가 없어진다.
얻고 잃는 두 길을 알아서
지혜가 더하도록 자기를 안립하라.'
(yogā ve jāyati bhūri
ayogā bhūri saṅkhayo
Etaṁ dvedhā pathaṁ ñatvā
bhavāya vibhavāya ca
Tath 'attānaṁ niveseyya
yathā bhūri pavaḍḍhati)
(念應念則正 念不應則邪
慧而不起邪 思正道乃成)
여기에서는 선정 대신에 요가라는 말을 쓰고 있다.
불제자들은 항상 선정, 곧 요가에 의해서 일체가 법 그대로 나타나는 세계에 안주하여 안온함을 즐기고 있었다. 이것을 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고타마의 제자들은 항상 잘 깨어 있어서
낮이나 밤이나 수행으로 마음이 즐겁다.'
(suppabuddhaṁ pabujjhanti sadā gotamasāvakā
yesaṁ divā ca ratto ca bhāvanāya rato mano)
(爲佛弟子 常悟自覺
日暮 思禪 樂觀一心)
이것으로 보면 원시불교 당시의 수행은 선정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정은 현법락주(現法樂住)라고도 한다.
석존은 출가하여 고행림으로 두 스승을 찾았다. 그들은 요가의 선정을 닦는 수행자였으나, 그에게서 만족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요가는 선정의 수행이면서도 부족함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니, 실로 요가 곧 선정은 석존에 이르러서 새로운 뜻이 주어졌고 그 내용이 충분하게 갖추어졌다.
석존의 깨달음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석존의 선에 의해서 얻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석존이 무상정등정각을 얻게 된 것은 실로 보리수하의 석존 독특한 선정이었다. 석존이 최초의 설법에서 설했다는 정정(正定)이 바로 이것이다. 석존으로서 보면 외도들의 선정은 부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모두 올바른 석존의 선정을 즐겼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석존의 선정에 의해서 붓다의 깨달은 법을 보고, 그 법을 따르고 그 법을 즐겼다.
그러한 선정의 전통이 대승불교에로 이어지면서 여러 경전이 불교의 선정을 여러 가지 삼매로써 나타내게 되니 반야경의 등지왕삼매(等持王三昧), <법화경>의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 <열반경(涅槃經)>의 부동삼매(不動三昧) 등 삼매에서 출정(出定)하여 설법하신 것으로 설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삼매 곧 선정의 형식은 같으나 내용은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 경전에서 설해진 선관(禪觀)의 모든 것은 그 경전이 설하는 석존의 세계를 보이고 있는 삼매다.
<요가의 발전과 불교에의 수용/ 정태혁 동국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