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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陽君 墓碑文 - 諱大榮 公諱大榮姓李氏永川人也中國子進士以神虎衛大將軍封永陽君其衣履之藏在永川郡北石峴五味 洞丑坐原(本刻雖云壬原實則坐丑之原故今釐正載錄)國朝景泰丁丑錦城大君之變公八世孫忠莊 公諱甫欽以順興府使幷被孥戮擧族駭竄殆盡重以兵燹公之墓於是而失其傳矣英廟乙酉關北居後 孫騎郞昌禮閱古藏得其十一世祖典書公伯遺墨載永陽君墓所郡坊坐向甚悉於是與本郡居後孫洛 徵發文諸宗議尋墓誌于永之石峴五味洞其上盖有一大塚坐向實合家牒墓貌又是大人葬而旁近居
民之稱其洞者古今相傳亦曰永陽洞李陵洞云則不待尋誌而其爲永陽君墓亦明矣本郡居成氏盖嘗 逼入三葬於其下遂並以爲渠家墓使不得尋誌欲設壇行祀而亦爲所毁拔當宁甲子後孫仲彩與姓吏 復陽復謀尋誌又見沮於成至被刑配經年赦還乃於己巳正月十七日夜又雇丁直開壙南深至天灰下 三尺許得一片古甓卽公姓諱三字誌也諸孫抱持感泣者久因納官白狀郡候徐公有敎亦驚且歎曰此 奇事也遂往尋形止盖槨用石雕龍其上封以粉土焉徐公乃曰非徒誌甓眞的石槨雕鏤粉土封築實爲 封君禮葬決非近古士大夫私葬其決案狀題曰誌甓乃是斷案又何訟爲彼雖誣以非眞甓形宛帶古色 字法又非今體此爲決案又何決案云於是以是月二十三日告由還封改燔甓埋于古處藏舊誌于子孫 家嗚呼希矣世代推遷桑海變易宿草荒原經幾劫火而墓封依舊片甓無恙使數三百載上己失之墓得 以一朝徵尋於數三百載之下則此豈但子孫誠孝之所格抑亦大人體魄之藏必有陰相冥護而以待於 今日也嗚呼公之世遠矣其志業行治生卒室配莫之徵也謹考譜牒上世祖文漢高麗平章事益陽君克 仁高麗開國上將軍中失譜系李氏之貫永川者多以永陽君爲中始祖永陽君二子得芬判書有芬判書 一子文卿護軍護軍三子松桂門下侍郞松賢判書松侶吏部侍郞門下一子允茂中郞將判書二子洽經 德齋生奕吏部三子日忠主簿日勤監司日章縣監郞將一子伯古少監齋生二子釋之版圖判書子庸密 直使奕一子厚龍判書主簿一子軒少尹監司二子侃郞將殷監司縣監一子安邦生員餘不能盡記其顯 者參議宣小監子也參判安愚直提學安直正郞安柔正郞安實司直玄實直提學宗儉提學宗謙縣監宗 讓忠莊公甫欽縣監仲浩縣監鳳孫左尹世蓁縣令胤曾掌令順曾牧使仁福判書遴參判選校理樞贈判 官榮根版圖之後也縣監坡直提學塢奉禮孝孫縣監欽直長鈞孝節公賢輔習讀賢佑部將賢佐察訪賢 俊察訪文樑縣監希樑監司仲樑縣監季樑王子師傳叔樑贈參判忠樑贈參議命弘贈參議福弘判決事 光承縣監德弘司正蒔少尹之後也貞景公膺贊成瑚威襄公順蒙皆聞人也以失系故世派不復識別版 圖外孫洪深深子矜子興興子士俯士偉士俯女朴紹紹子潘城府院君應順誕懿仁王后士偉女姜涉涉
外孫延興府院君金悌男誕仁穆王后矜孫女金璠璠玄孫女新豐府院君張維誕仁宣王后實誕我顯宗 大王少尹外玄孫李堣堣曾孫女鄭經世經世外孫女麗興府院君閔維重誕仁顯王后版圖外五代孫金 正國正國五代孫女李師昌師昌女達城府院君徐宗悌誕貞聖王后先正臣文純公李滉及一時名賢亦 多其外裔也夫以公本支之盛內則冠冕奕葉文行薛世外則五后配德慶流宗枋群賢倡道興起斯文倘 非公盛德深仁積於躬者厚裕於後者大又安能若是乎沿流而溯源由枝而推本則亦可以識公之爲宏 偉非常人矣有非常之德者必有非常之應宜乎神護其藏天誘孫衷不與尋常阡隴共爲崩壤埋沒而無 傳也遠近雲仍方謀竪碣謬屬陰記於不佞顧賤弊不文何足以堪是寄第事係希異實不勝欽歎之心遂 不揆僭猥畧記顚末如右來請記者後孫時靖也終始幹事者郡居後裔五衛將尙益云 崇貞紀元後四 年己巳五月日通政大夫承政院右副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굉謹記 外裔將仕郞前 行順陵參奉李家淳奉書
영양군 묘비문 - 휘 대영 공의 휘는 대영(大榮)이고 성은 이씨(李氏)이고 관향은 영천(永川)이다. 국자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서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졌다. 그의 묘소는 영천군 북쪽 석현(石峴) 오미동 축(丑)좌의 언덕에 있다. (본래 임좌의 언덕이라고 새겨졌으나 실지로는 축좌의 언덕이므로 이제 바로잡은 기록을 등재한다) 경태(명나라 경제-景帝-의 년호) 정축년(세조三년 一四五七년) 에 금성대군의 변란에 공의 八세손 충장공(忠莊公) 휘 보흠(甫欽)이 순흥부사로서 자녀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자 친족들은 놀라 숨어서 거의 없어지고 병화(兵火)가 거듭된 까닭에 공의 묘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영조 을유년(一七六五년)에 관북에 거주하는 후손 기랑(騎郞-병조 정랑) 창례(昌禮)가 옛 서적을 열람하다가 그의 十一세조 전서공 백(伯)의 유묵을 찾아보니 영양군 묘소의 고을과 마을과 좌향이 매우 자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이에 본군에 사는 후손 낙징(洛徵)과 함께 여러 종친에게 통문(通文)을 발송하여 영천군 석현 오미동에서 지석(誌石)을 찾아보기로 의논하였다. 그 위에 큰 무덤 하나가 있는데 좌향이 가첩과 실지로 부합(符合)하고 묘소의 모양 또한 대인의 묘소였으며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그 골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영양동(永陽洞), 이능동(李陵洞)이라고 부르므로 지석을 찾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영양군의 묘소가 역시 분명하였다. 본군에 사는 성씨(成氏)가 그 아래에 바짝 다가서 묘소를 셋이나 들였으며 아울러 자기네 묘소라고 하며 지석을 찾지 못하게 하여 설단(設壇)을 하고 제사를 지내려 하니 또한 부수고 뽑아 버렸다. 순조 갑자년(一八O四년)에 후손 중채(仲彩)가 일가 복양(復陽)과 함께 다시 지석을 찾으려고 모의하다가 또 성씨에게 저지당하고 귀양까지 갔다가 一년이 지나서 풀려나 돌아 왔다. 이에 기사년(一八O九년) 정월 十七일 밤에 또 장정을 사서 묘소의 남쪽을 파니 천회(天灰) 아래로 三자쯤 내려가서 예날 옹기 한 조각을 발견하고 보니 바로 공의 성명 석 자가 적힌 지옹(誌甓)이기에 여러 자손들이 오래도록 끌어안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관청에 바치면서 소장(訴狀)을 내므로 인하여 군수 서유교(徐有敎)공 역시 경탄(驚歎)하며 말하기를 『이는 기이(奇異)한 일이로다.』라고 하고는 직접 가서 형편을 살펴보니 용(龍)을 새긴 곽(槨)을 썼고 고운 흙(粉土)으로 봉분(封墳)을 하였었다. 이에 서공(徐公)이 말하기를 『다만 지벽(誌甓)이 진짜일 뿐만 아니라 석곽에 새긴 문양(紋樣)과 봉분을 쌓은 분토는 실로 봉군(封君)된 분의 예장(禮葬)이지 결코 근래 사대부의 사장(私葬)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판결문의 제사(題辭)에서 이르기를 「지벽이 바로 단안(斷案-판단)인데 또 무슨 송사를 하겠는가? 저들이 비록 진짜가 아니라고 터무니 없이 말 하드라도 지벽의 모양이 옛날 색깔을 완연(宛然)하게 띠었고 글자의 필법(筆法) 또한 요즈음 서체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판결의 근거인데 또 무슨 판결의 근거를 말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 달 二十三일에 고유(告由)하고는 봉분을 다시 하여 본래대로 돌려놓고 새 지벽을 다시 만들어 옛 자리에 묻었고 옛 지석은 자손의 집에 갈무리하였다.
아! 희한하도다. 세대가 변천하여 상전(桑田-뽕밭)이 변하여 벽해(碧海-바다)로 바뀌고 황량한 무덤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여러 번 큰 화재가 지나갔는데도 묘소가 그대로 이고 작은 지벽도 손상이 없어서 수 三百년 전에 잃었던 묘를 수 三百년이 지나서 하루아침에 찾게 되는 증거였으니 이것이 어찌 자손들의 정성과 효성에서 이루어졌다고만 하겠는가? 역시 대인의 체백(體魄)을 모신 곳에는 반드시 음덕(陰德)과 보이 않는 가호(加護)가 있어서 오늘을 기다린 것이리라. 아! 공의 세대가 오래되어 그의 뜻과 업적과 행적과 생졸과 배위를 밝힐 수 없어서 삼가 족보를 상고해보니 상세(上世)의 조상 문한(文漢)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였고, 익양군(益陽君) 극인(克仁)은 고려 개국(開國-註; 고려 중엽을 잘못 기재하였음)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중간에 계보를 잃었고 이씨의 번관을 영천(永川)으로 한 것은 영양군(永陽君)을 중시조로 삼는 자가 많아서이다. 영양군은 두 분 아들을 두었으니 득분(得芬)은 판서(判書)이고 유분(有芬)이다. 판서의 아들 문경(文卿)은 호군(護軍)이다. 호군은 세 분 아들을 두었으니 송계(松桂)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이고, 송현(松賢)은 판서(判書)이고, 송려(松侶)는 이부시랑(吏部侍郞)이다. 문하시랑의 아들 윤무(允茂)는 중낭장(中郞將)이다. 판서는 두 분 아들을 두었으니 흡(洽)은 경덕재생(經德齋生)이고 혁(奕)이다. 이부시랑은 세 분 아들을 두었으니 일충(日忠)은 주부(主簿)이고, 일근(日勤)은 감사(監司)이고, 일장(日章)은 현감(縣監)이다. 낭장의 아들 백고(伯古)는 소감(少監)이고, 경덕재생은 두 분 아들을 두었으니 석지(釋之)는 판도판서(版圖判書)이고 자용(子庸)은 밀직사(密直使)이고, 혁(奕)의 아들 후룡(厚龍)은 판서(判書)이고, 주부의 아들 헌(軒)은 소윤(少尹)이고, 감사는 두 분 아들을 두었으니 간(侃)은 낭장(郞將)이고 은(殷)은 감사(監司)이고, 현감의 아들 안방(安邦)은 생원(生員)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유명한 분으로 참의 선(宣)은 소감의 아들이다.
참판 안우(安愚)와 직제학 안직(安直)과 정랑 안유(安柔)와 정랑 안실(安實)과 사직 현실(玄實)과 직제학 종검(宗儉)과 제학 종겸(宗謙)과 현감 종양(宗讓)과 충장공 보흠(甫欽)과 현감 중호(仲浩)와 현감 봉손(鳳孫)과 좌윤 세진(世蓁)과 현령 윤증(胤曾)과 장령 순증(順曾)과 목사 인복(仁福)과 판서 인(遴)과 참판 선(選)과 교리 추(樞)와 증 판관 영근(榮根)은 판도의 후손이다. 현감 파(坡)와 직제학 오(塢)와 봉례 효손(孝孫)과 현감 흠(欽)과 직장 균(鈞)과 효절공 현보(賢輔)와 습독 현우(賢佑)와 부장 현좌(賢佐)와 찰방 현준(賢俊)과 찰방 문량(文樑)과 현감 희량(希樑)과 감사 중량(仲樑)과 현감 계량(季樑)과 왕자사부 숙량(叔樑)과 증 참판 충량(忠樑)과 증 참의 명홍(命弘)과 증 참의 복홍(福弘) 판결사 광승(光承)과 현감 덕홍(德弘)과 사정 시(蒔)는 소윤의 후손이다. 정경공 응(膺)과 찬성 호(瑚)와 위양공 순몽(順蒙)은 모두 소문난 인물인데 계보를 잃었기 때문에 세(世)와 파(派)를 별도로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판도의 외손은 홍심(洪深)이고 홍심의 아들은 긍(矜)과 흥(興)이고 흥의 아들은 사부(士俯)와 사위(士偉)인데 사부의 따님이 박소(朴紹)에게 시집갔고 박소의 아들 반성부원군 응순(應順)은 의인왕후(懿仁王后-宣祖의 비)를 탄생하였다. 사위(士偉)의 따님은 강섭(姜涉)에게 시집갔는데 강섭의 외손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은 인목왕후(仁穆王后-宣祖의 비)를 탄생하였다. 긍의 손녀는 김번(金?)에게 시집갔는데 번의 현손은 신풍부원군(新?府院君) 장유(張維)에게 시집가서 인선왕후(仁宣王后)(孝宗의 비)를 탄생하였고, 인선왕후는 현종대왕(顯宗大王)을 탄생하였다. 소윤의 외현손은 이우(李?)인데 이우의 증손녀는 정경세(鄭經世)에게 시집갔고 정경세의 외손녀는 여흥부원군(麗興府院君) 민유중(閔維重)에게 시집가서 인현왕후(仁顯王后-肅宗의 비)를 탄생하였다. 판도의 외五대손은 김정국(金正國)인데 김정국의 五대손녀는 이사창(李師昌)에게 시집갔고 이사창의 따님은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에게 시집가서 정성왕후(貞聖王后-英祖의 비)를 탄생하였다.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및 한 때의 명현들 중에 외손이 역시 많았다. 대체로 공의 자손이 번성하여 본 손은 벼슬이 혁혁하고 학문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외손은 다섯 분 왕후의 덕과 더불어 경사가 종묘사직(宗廟社稷-왕실과 나라)에 이어졌다.
여러 어진 분들이 도(道)를 부르짖으며 사문(斯文-유학자)을 흥기시켰으니 아마 공의 성대한 덕과 심후(深厚)한 어짊이 몸에 쌓여서 후세에는 대단히 후(厚)하고 넉넉하였음이 아니겠으며 또 어찌 이와 같았을까? 흐름을 따라서 근원을 소급하고 가지로 말미암아 근본을 추측하므로 역시 공이 보통 사람과는 달리 굉장히 위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이 넘는 덕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보통이 넘는 마땅한 대응(對應)이 있다는 것이다. 신의 보호하여 그(묘소)를 보장(保藏)하고 하늘이 자손을 지성으로 이끌어서 보통 묘소처럼 무너지고 파묻혀서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원근의 자손들이 비석을 세울 방도를 모의하고는 재주도 없는 나에게 비문을 잘못 부탁하기에 나를 돌아보니 미천하고 문장력이 없는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마는 이에 사실을 차례로 이어 붙여 보니 희한하고 특이하여 흠모하고 감탄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여 드디어 참람하고 외람됨을 헤아리지 않고 전말(顚末)을 오른 쪽과 같이 대략 기록한다. 비문을 청하려 온 사람은 후손 시정(時靖)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주간한 사람은 고을에 사는 후손 오위장(五衛將) 상익(尙益)이라고 하더라. 숭정 기원 후 四년(순조 九년 一八O九년) 五월 일에 통정대부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김굉은 삼가 기록하다. 외예 장사랑 전행순릉참봉 이가순은 받들어 글씨를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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