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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4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18)
지난 수요일은 법인절(法認節)이었습니다. 우리 원불교에서는 이 날을 4대 경축일 가운데 하나로 정해서 전국 교당에서 봉축행사를 거행합니다.
법인절은 원기 4년 8월21일, 이른바 백지혈인(白指血印)의 이적(異蹟)이 나타남에 따라 소태산 대종사께서 ‘이로써 우리 회상은 법계의 인증을 받았다’고 선언하신 것을 기원으로 합니다.
대종경 서품 14장에 대종사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들의 마음은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이미 감응하였고, 음부공사(陰府公事)가 이제 판결이 났으니, 우리의 성공은 이로부터 비롯하였도다.”
여기서 ‘천지신명’이라는 말은 원래 하늘과 땅을 주재하는 신령을 뜻하는 것입니다.
옛날 인지(人智)가 어두운 시대에는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었지만, 현대 우리 원불교의 교리로 보면 ‘천지(天地)의 도(道)’, 즉 지극히 공변되고 밝은 진리를 가리키는 것으로써, 더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본래성품[本性]을 뜻하는 것입니다.(원불교 용어사전)
그러므로 ‘천지신명이 이미 감응하였다’는 것은, 9인 제자들이 스스로의 성품에 귀의하였다, 즉 자성(自性)에 합일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음부공사’에서 음부(陰府)란 ‘형상 없는 진리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원래 도교(道敎)의 용어입니다.
음부공사란 ‘진리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인데, 도교에서는 중요한 일이 세상에 나타날 때는 이른바 진리세계에서 미리 이루어진 뒤에야 현실세계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때문에 ‘음부공사가 판결이 났다’는 것은, 진리세계에서 그렇게 정하여졌다, 진리가 그렇게 작용되도록 정하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리계(眞理界)라는 것은 곧 법신불 일원상의 자리, 다시 말하면 우리 자성의 본래자리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어디 저 멀리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와 함께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진리의 세계를 원래 법계(法界)라고 불렀는데, 법은 다르마(Dharma), 즉 진리 혹은 본성(本性)을 뜻합니다. 진리라는 용어는 근세(近世)에 들어 영어 Truth를 번역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진리가 그렇게 작용되도록 정해졌다’는 것은 사실 인과보응(因果報應)의 결과로써 그리되는 것이지, 인과를 벗어난 진리의 작용은 그 무엇이든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인과의 진리를 믿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자(佛子)가 아니며, 미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위에서 대종사께서 하신 말씀은 결국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너희 모두 각자가 자성에 합일(合一)하였으며, 추호도 어긋남이 없는 인과보응의 결과로써, 앞으로 우리의 일은 성공하게 되어있노라.”
다시 말하면, 모든 일이 불생불멸의 도(道)와 인과보응의 이치로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라도 진리가 그렇게 이루어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처불공, 실지불공으로써 앞으로의 성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법계인증’이라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뜻을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저 멀리 신비스런 세계에서 어떤 초월적인 힘을 주어서 일어났던 일로 여기고, 미신적인 믿음을 갖는 것은 잘못되어도 아주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 무언가 신비한 미신적인 믿음을 가지게 되면, 진리적 신앙이 무너지고 사실적인 수행이 불가능해집니다.
이처럼 법인절을 통해서 우리가 진리를 바로 믿고 있는지, 바른 수행을 하고 있는지를 철저히 확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36. 늘 부처님을 떠나지 않음
“어떤 것이 늘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까?”
“마음이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고, 경계를 대하되 고요하여, 어느 때나 지극히 공적[畢竟空寂]하면, 이것이 곧 늘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問 云何是常不離佛
答 心無起滅 對境寂然 一切時中 畢竟空寂 卽是常不離佛
여기서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성불을 여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 안에 깃들어있는 부처, 즉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不離自性]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또한 법신불 일원상과 함께 있다는 뜻이며, 일원(一圓)의 체성(體性)과 합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자기 안의 부처를 여의지 않는 것일까요.
불교 3대 거사 가운데 한 분이신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의 부설거사(浮雪居士)는 이렇게 읊었습니다.
目無所見無分別 눈으로 보는 바가 없으니 분별이 없고
耳聽無聲絶是非 귀로 듣되 소리가 없어서 시비가 끊어졌다
分別是非都放下 분별과 시비를 모두 놓아 버리고
但看心彿自歸依 다만 마음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하네
이 시는 우리 수행인에게 두 가지를 내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저 서방정토 혹은 정토극락에 계신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안에 깃들어있는 마음부처, 즉 자성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에서는 원래부터 참다운 부처라고 하면 이 자성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르기를 ‘마음 외에 다른 부처가 없고[心外無別佛], 성품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性外無別法]’고 합니다.
우리 원불교에서 법신불 일원상을 진리의 상징으로 모시는데, 바로 그 진리인 ‘참 일원’은 다름 아닌 우리 모든 중생의 본성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위의 시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마음부처에게 귀의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중생이 가진 분별과 주착을 다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분별과 주착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은 또한, 우리가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며,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은 곧 일체 모든 대상을 보되 보는 바가 없이 보는 것이며, 모든 소리를 들음에 듣는 바가 없이 듣는 것입니다. 냄새 맡고, 맛보며,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되 하는 바가 없이[爲而無所爲] 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분별주착을 떠나’ 생각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떠한 생각이든지 자기가 생각을 떠올리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 떠올리는 것은 망상분별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성품의 지혜는, 자기 스스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그 순간 자각(自覺)하고 있으며, 경계에 끌려서 매이지도 않으면서[無所住], 사물을 두렷하고 밝게 알고 판단하는 ‘생각’인데, 이 생각은 ‘분별하는 바가 없이’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망상분별이라 하지 않고 혜(慧)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공적영지(空寂靈知)라, 자기의 본래성품[本性]에서 나는 지혜로써,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두렷이 나타나는 성품의 밝음이라서 공적영지라 하는 것입니다.
대주 스님은 우리의 자성(불)을 떠나지 않는 것을 ‘마음이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번뇌 망상이 없다는 뜻입니다. 결코 무분별지(無分別智)인 자성의 혜광(慧光)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자성에서 나는 빛이 없다면 텅 비고 고요하나 깜깜하고 어두운 상태, 즉 무기(無記)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경계를 대하든 안 대하든, 공적(空寂)하면서도 두렷이 밝은 것이어야만 우리 자성의 본래부처[自性佛]인 모습인 줄을 알아야겠습니다.
37. 무위법(無爲法)이란
“무엇이 무위법(無爲法)입니까?”
“유위(有爲)다.”
“지금 무위법을 물었는데 어째서 유위라고 답하십니까?”
“있음[有]은 없음[無]으로 인해서 서고, 없음은 있음으로 인해서 나타난다. 본래 있음을 세우지 않으면 없음이 어디서 나겠는가? 만약 참다운 무위(無爲)라는 것을 논하려거든 곧 유위(有爲)도 취하지 않고 또한 무위도 취하지 않음이 참된 무위법이다.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만약 법의 모양[法相]을 취하면 곧 아상(我相)과 인상(人相)에 집착하고, 만약 법이 아닌 모양[非法相]을 취하여도 곧 아상과 인상에 집착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곧 참된 법을 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이치를 확실히 알면 곧 참다운 해탈이며 둘 아닌 법문[不二門]을 아는 것이다.”
問 何者是無爲法
答 有爲是
問 今問無爲法 因何答有爲是
答 有因無立 無因有顯 本不立有 無從何生 若論眞無爲者 卽不取有爲 亦不取無爲 是眞無爲法也 何以故 經云 若取法相 卽著我人 若取非法相 卽著我人 是故不應取法 不應取非法 卽是取眞法也 若了此理 卽眞解脫 卽會不二法門
무위법을 유위(有爲)라고 설명하는 까닭은, 무위법이란 유위도 취하지 않고 무위도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무위법이 ‘함이 없음’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곧 유위라는 것입니다.
무위법을 묻자 이렇게 ‘유위’라고 일갈(一喝)하는 모습은 참 탁월한 방식으로 보입니다. 말로써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이렇게 아주 시원하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법의 모양을 취하든, 법이 아닌 모양을 취하든, 모두 아상과 인상에 집착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은 금강경 6장에 있는 구절입니다.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 뜻을 바로 깨친다면 더 생각해보고 말 것도 없이 그 의미가 단순하지만, 만약 그 말[言句]에 끌려서 분별하는 생각을 낸다면 결코 그 뜻을 바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법도 취하지 말고 법 아님도 취하지 말라’는 말은 ‘법도 없고 법 아님도 없다’는 말과 같고, ‘법도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 원불교 교도들은 아마 ‘무무역무무 비비역비비’를 떠올리게 될 텐데, 물론 글자만 다르지 다 같은 뜻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있다, 없다’는 분별을 떠나야만 바로 알 수 있고, 바로 닦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자리는 닦지 않아도 저절로 온전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수행인이 망상분별을 하다가 이렇게 유무를 초월한 자기의 본성자리에 드는 것을 가리켜서 ‘닦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실은 애초부터 닦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닦을 것 없는 것을 닦는다’고 하지요.
이러한 말들은 수행인이 그 자리를 깨쳐서 뜻을 얻으면 말에 끌려감이 없지만, 만약 뜻을 얻지 못하면 하루 종일 따지고 분석해보아도 알 수가 없습니다.
대주 스님은, 사람이 위와 같은 이치를 확실히 알면 곧 참다운 해탈이며, 둘 아닌 법문[不二門]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 아닌 법문이란, 일체 모든 상대되는 것들이 사실은 둘이 아니라는 법문을 말합니다. 유무, 시비, 진리와 진리 아닌 것 등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갑니다.
성품을 깨치고 보면 바로 우리의 성품 자체가 곧 불이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이문을 알려고 하면 자신의 성품을 깨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38. 중도(中道)란
“무엇이 중도의 뜻입니까.”
“가[邊]의 뜻이다.”
“지금 중도를 물었는데 어째서 가[邊]의 뜻이라고 답하십니까?”
“가[邊]는 가운데[中]로 인해서 서고, 가운데[中]는 가[邊]로 인해서 난다. 만약 본래 가[邊]가 없다면 가운데는 무엇으로부터 있겠는가. 지금 가운데라고 하는 것은 가로 인해서 비로소 있는 것이라, 가운데와 가가 서로를 인하여 서있어서 모두 항상성이 없음[無常]을 알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도 또한 이와 같다.”
問 何者是中道義
答 邊義是
問 今問中道 因何答邊義是
答 邊因中立 中因邊生 本若無邊 中從何有 今言中者 因邊始有故 知中之與邊 相因以立 悉是無常 色受想行識 亦復如是
불가(佛家)에서 중도(中道)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 뜻을 분명히 안다면 바로 진리를 깨친 사람입니다. 여기서 대주스님은 중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앞 장과 똑같은 답변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중도란 ‘그 어떤 것에도 전혀 치우침이 없는’ 참다운 이치를 뜻합니다.
흔히 중도라 하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가운데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테면 왼쪽이나 오른쪽에 치우치지 않는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중도라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그 어떤 것에도 치우침이 없는’ 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양쪽을 다 버리고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은 또한 가운데 길을 취하는 것이 되므로 중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양쪽도 가운데도 모두 취하지 않는 것이 중도입니다.
그렇다면 양쪽도, 가운데도 다 버린다면 대체 중도는 어떤 길을 취한다는 것인가?
중도는 취하는 것이 없으면서도 또한 버리는 것도 없는 것이 중도입니다. 취하고 버림이 모두 서로 상대되는 것이라,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것이 곧 중도입니다.
가령 우리가 생각으로 어떤 대상을 취하거나 또는 버리면, 그것은 그 대상에 끌리고 집착하는 바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대상을 취할 때만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린다고 할 때도 그것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할 때만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도 집착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대상이든, 심지어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까지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으면 그것이 곧 자유요 해탈이며 또한 중도입니다.
우리의 본래마음, 즉 자성의 계가 그러한데, 사람이 자성의 계를 지키면 하루 종일 마음껏 움직이고 머물러도 털끝만큼도 대상을 취하고 버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 중도를 두루 원만한 ‘가운데 길’이라고 오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주 스님은 위에서, 가운데[中]와 가[邊]가 서로를 의지해서 있기 때문에, 둘 다 항상성이 없는 것[無常]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중도는 그렇게 있다, 없다하는 생멸적인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 즉 오온(五蘊)도 마찬가지라 하였습니다. 그것들도 모두 있다 없다,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것이지, 생멸 없는 지극한 도가 아닌 것입니다. 오온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나옵니다.
39. 오음(五陰)이란
“무엇을 오음(五陰)이라 합니까?”
“색(色)에 대해서 색에 물들어 (그) 색을 따라 수생(受生)하는 것을 색음(色陰)이라 하고, 팔풍(八風)을 받아들인 까닭에 삿된 믿음을 즐겨 모아서 받아들임에 따라 수생하는 것을 수음(受陰)이라 하며, 미혹한 마음이 생각을 취하여 생각을 따라 수생하는 것을 상음(想陰)이라 하고, 모든 행을 결집하여 행을 따라 수생하는 것을 행음(行陰)이라 하며, 평등한 본체에 망령되게 분별을 일으키고 (거기에) 매여 붙잡혀서 헛된 의식(意識)이 수생하는 것을 식음(識陰)이라 하니, 그러므로 오음이라고 한다.”
* 팔풍(八風): 이익과 손실(利衰), 헐뜯음과 높여줌(毁譽), 찬양과 비웃음(稱譏), 괴로움과 즐거움(苦樂).
問 何名五陰等
答 對色染色 隨色受生 名爲色陰 爲領納八風 好集邪信 卽隨領納受生 名爲受陰 迷心取想 隨想受生 名爲想陰 結集諸行 隨行受生 名爲行陰 於平等體 妄起分別繫著 虛識受生 名爲識陰 故云五陰
오음은 오온(五蘊)의 다른 이름으로써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합니다.
대주 스님은 중생이 그 하나하나에 물들고 끌려서 남을 받는 것[受生]이라 오음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설명은 이 용어의 일반적인 해석과 다르기 때문에, 본래의 뜻으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색(色)은 물질을 말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색수상행식은 따라서 물질계와 마음세계를 모두 아우르는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을 가리킵니다.
먼저 색(色)은 물질로 이루어진 모든 존재를 말하고, 저 허공도 또한 색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가령 성주괴공(成住壞空)에서의 공(空)은, 나고 없어지는 생멸(生滅)로써의 공이지, 진리의 체(體)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진공은 아닙니다.
다음으로, 수(受)는 감수(感受)작용인데 의식 속에 어떤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괘(快), 불쾌(不快) 등의 단순 감정을 포함한 작용을 말합니다.
상(想)은 표상(表象)작용으로, 의식 속에 상(象)을 구성하고 마음 속에 어떤 것을 떠올려 관념을 형성하는 것이며, 감각 혹은 지각(知覺)이 이에 해당합니다.
행(行)은 형성(形成)작용으로, 잠재성과 능동성을 가지고 상(想), 즉 지각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의지작용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식(識)은 식별작용으로서, 대상을 인식하고 구별하며 판단하는, 마음작용의 전반을 총괄하는 주체적인 활동입니다.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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