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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31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19)
며칠 전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라는 과학저널에 한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실험용 쥐를 통한 연구에서 쥐들이 심장이 정지한 직후에 약 30초 동안 뇌에서 강한 의식 활동이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쥐들이 죽어서 심장이 멎은 뒤에 30초가량 뇌의 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실험결과입니다.
그리고 이때 뇌에서 측정된 뇌파는 감마파(25~55 헤르츠)인데, 이 파형은 인지(認知) 작용과 고도의 주의(注意), 각성(覺醒)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놀랍게도 이 파형이 뇌의 모든 영역에서 깨어있을 때보다도 훨씬 강하게 폭발적으로 나타나서 연구원들을 놀라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보면, 죽음을 맞는 뇌는 마지막 순간에 아주 높은 수준의 의식(意識) 활동을 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경우, 죽음 뒤에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을 보았다거나, 세상을 이미 떠난 누구를 만났다거나 하는 증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동물실험 결과는 그러한 일을 실제로 겪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육체적으로 숨이 멎었다고 하더라도 뇌가 한동안이나 고도의 의식 활동을 한다고 하면 그러한 정신적 체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뇌파 가운데 감마파는 정신이 아주 고도로 깨어있을 때 나타나는 파형으로, 신경정신과에서는 사람이 환각이나 환청을 경험할 때 전형적으로 이 감마파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또 이 감마파는 사람이 깊은 명상에 들어서 주위 사물에 대해서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있을 때 나타나는 파형이기도 해서, 저는 이 감마파는 지극한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상태에서 나오는 뇌의 작용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심장이 멈추고 나서도 뇌의 활동이 한동안 높은 상태로 계속된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정신의 소멸은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 일단 우리의 정신은 육체의 죽음 뒤에도 존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깊은 선 수행 가운데 나타나는 수행자의 체험들도 육체를 넘어서 이렇게 정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예로부터 부처님과 조사들의 가르침이 틀리지 않은 것이기에, 우리도 자신의 성품을 깨치고 마침내 해탈 성불할 때까지 부지런히 정진해 가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40. 이십오유(二十五有)
* 이십오유: 스물다섯으로 나누어진 윤회의 생사계(生死界).
“경에서 ‘이십오유(二十五有)’라 하는데 어떤 것입니까?”
“뒤의 몸[後有身]을 받는 것이 그것이다. 뒤의 몸이란 곧 육도(六道)의 생(生)을 받는 것이다. 중생이 현세에 마음이 미혹하여 즐겨 모든 업(業)을 맺어, 뒤에 업을 따라 생을 받는 까닭에 뒤가 있다[後有]고 한다. 세상에 만약 어떤 사람이 구경(究竟)의 해탈을 닦을 뜻을 가져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한 사람은 곧 삼계를 영원히 떠나서 후유(後有)를 받지 않으니,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곧 법신(法身)을 증득함이라, 법신이란 곧 불신(佛身)이다.”
問 經云 二十五有 何者是
答 受後有身 是也 後有身者 卽六道受生也 爲衆生 現世心迷 好結諸業 後卽隨業受生故 云後有也 世若有人 志修究竟解脫 證無生法忍者 卽永離三界 不受後有 不受後有者 卽證法身 法身者 卽是佛身
이십오유(二十五有)란 불교에서 중생이 윤회하는 생사(生死)의 세계를 스물다섯 가지로 나누어놓은 것입니다. 욕계(欲界)의 열네 가지, 색계(色界)의 일곱 가지, 무색계(無色界)의 네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욕계에는 열네 가지 세계가 있는데 위쪽으로는 도솔천, 도리천 등 여섯 개의 천상계가 있고, 중간에는 남, 북, 서, 동의 단계로 네 개의 인간계가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색계(色界)는 욕망을 벗어났으나 아직 형상에 얽매어있는 세계이고, 무색계는 욕망과 형상의 속박에서 모두 벗어나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십오유는 생사윤회를 하는 중생이 머무는 세계로서, 누구든 완전히 해탈성불해서 윤회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중생이 이렇게 이십오유에 들어서 끝없이 윤회하는 것은 결국 한 마음이 삼독오욕에 물들어서 갖가지 죄업을 짓기 때문이며, 비록 삼독오욕에서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무형(無形)의 상(相)을 취해서 그 안에 머물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털끝만큼이라도 분별과 주착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십오유라는 것은 중생 각자가 쓰고 있는 이 마음상태를 빼고는 그 존재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즉 이십오유의 뿌리는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대주 스님은 무생법인(無生法忍), 즉 남[生]이 없는 진리의 깨침을 얻은 사람은 삼계를 영원히 벗어나서 윤회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마음은 곧 법신(法身)과 합하였기 때문에, 일체의 상(相)이 끊어져 텅 비고 고요하면서도 두렷이 밝은 부처의 마음이며, 그 마음자체가 진리 그 당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십오유의 이름을 어떻게 나눕니까?”
“본체는 하나지만 그 작용에 따라 이름을 세워서 이십오유를 나타내니, 이십오유는 십악(十惡)과 십선(十善)과 오음(五陰)이다.”
“어떤 것이 십악과 십선입니까?”
“십악(十惡)은 죽이는 것, 훔치는 것, 음행하는 것, 거짓말, 꾸미는 말, 이간하는 말, 나쁜 말과 더 나아가 탐냄, 성냄, 삿된 견해이니 이것이 십악이요, 십선(十善)이란 다만 십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問 二十五有名 云何分別
答 本體是一 爲隨用立名 顯二十五有 二十五有 十惡十善 五陰 是
問 云何是十惡十善
答 十惡 殺盜婬 妄言綺語兩舌惡口 乃至貪瞋邪見 此名十惡 十善者 但不行十惡 卽是也
이십오유는 열 가지 악(惡)을 행하고 행하지 않음과, 오음(五陰),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달렸다는 말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 몸을 통해서 짓는 것이니, 악을 범하고 범하지 않음은 곧 마음이 경계에 물들고 물들지 않는 것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오음은 물질과 일체의 마음작용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중생 스스로가 지어서 받는 스물다섯 가지 세계가 모두 이것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보면 이와 같이 삼계육도가 모두 마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41. 무념(無念)과 돈오(頓悟)
(1) 무념(無念)
“위에서 무념을 말씀하셨는데 아직 다 이해가 안 됩니다.”
“무념이란 어느 곳에서나[一切處] 무심(無心)함이라, 일체경계에 있어서 온갖 생각으로 구함이 없음이며, 모든 대상에 대하여 영영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것이 곧 무념이다. 무념이란 참된 생각[眞念]을 말한다. 만약 생각으로써 생각을 삼으면 곧 삿된 생각[邪念]이요 바른 생각[正念]이 아니다.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만약 사람에게 육념(六念: 念佛, 念法, 念僧, 念戒, 念施, 念天)을 가르치면 바른 생각이 아니다[非念]’라고 하였으니, 육념이 있으면 삿된 생각[邪念]이라 하고, 육념이 없는 것이 곧 참된 생각[眞念]이다. 경에 이르기를 ‘선남자야, 우리가 무념법(無念法) 가운데 머물러서 이와 같은 금색(金色)의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얻어 큰 광명(光明)을 놓아서 세계를 남김없이 비추나니, 이 불가사의한 공덕은 부처님이 설명하시더라도 오히려 다 하실 수가 없는데 하물며 나머지 승(乘)들이 능히 알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무념을 얻은 사람은 육근(六根)이 물들지 않는 까닭에 자연히 모든 부처님 지견(知見)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얻는 것을 부처님의 창고[佛藏]요 또한 법의 창고[法藏]라 하니, 곧 능히 모든 부처와 모든 법을 담는다. 왜냐하면 무념인 까닭이니, 경에 이르기를 ‘일체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이 경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問 上說無念 猶未盡決
答 無念者 一切處 無心 是 無一切境界 無餘思求是 對諸境色 永無起動 是卽無念 無念者 是名眞念也 若以念爲念者 卽是邪念 非爲正念 何以故 經云 若敎人六念 名爲非念 有六念 名爲邪念 無六念者 卽眞念 經云 善男子 我等 住於無念法中 得如是金色三十二相 放大光明 照無餘世界 不可思議功德 佛說之 猶不盡 何況餘乘能知也 得無念者 六根 無染故 自然得入諸佛知見 得如是者 卽名佛藏 亦名法藏 卽能一切佛 一切法 何以故 爲無念故 經云 一切諸佛等 皆從此經出
다시 무념(無念)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무념은 그냥 ‘생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헤아리고 분별함으로써는 알 수 없는 우리 성품의 모습을 생각[念]이라는 글자로 나타낸 것입니다. 때문에 무념을 알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아는 것이며, 참다운 불법수행법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원불교 수행법의 정수(精髓)인 ‘무시선법’도 사실은 생활 속에서 이 무념을 지니고 행하라는 뜻 말고는 다른 뜻이 없습니다.
교전에 무념에 대한 말씀은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응용에 무념 하는 것이 천지의 도>(경의편 6장)라 하셨고,
<응용에 무념 하는 것이 가장 큰 덕>(무본편 34장)이라 하셨으며,
<유념의 공덕에는 유루의 복이 오고 무념의 공덕에는 무루의 복이 온다>(원리편 27장)고 하셨고,
<우주 만유의 대도 대덕이 모두 이 무념으로써 구성되었다>(경의편 26장)고 하셨으며,
<대종사께서 공부의 진실처를 말씀하실 때 필경 이 무념으로써 최상 법문을 삼으시고, 부처님께서도 도덕의 본지를 해석하실 때에 다 이 무념으로써 표준하셨다>(경의편 25장)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 이 무념을 모른다면 어떻게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주 스님은, 무념은 어느 곳에서나 무심(無心)의 경지에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체 경계에 있어서 갖가지 생각으로 구함이 없는 것이 무념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 어떤 경우이든 마음으로 무언가를 구한다면 그것은 무념이 아닙니다.
옛 조사의 말씀에 ‘무착즉시해탈(無著卽時解脫)이요, 유구우조라견(有求又遭羅罥)이라’하였는데, ‘집착하지 않으면 그대로 곧 해탈이며, 구하는 것이 있으면 또 그물에 걸린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유로운 몸과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살아가면서 단 하루, 단 한 나절도 매사에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마귀나 또는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살도록 강제로 속박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은 누가 나의 자유를 빼앗아가서 내가 속박당한 채 사는 게 아니라, 내 자신이 나를 묶어놓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서 무엇이 내 스스로를 얽매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지금 ‘집착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나를 속박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집착하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요?
바로 내가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어야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눈앞에서 없어져야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야하고, 내가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합니다.
이렇게 내가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집착하게 되고, 또한 그것에 의해 속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니 많이 구하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얽매어서 모든 게 속박이고,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얽매지 않아서 매사에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느냐, 하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구하지 않는다’는 뜻은 마치 돌멩이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품의 지혜를 따라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해서 그것을 취하거나 버리는 게 아니라, 텅 비고 고요한 가운데 저절로 두렷이 밝은 한 생각(즉, 무념)을 따라 사물을 응용한다(일체를 행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념행(無念行)이고 응용무념(應用無念)이며, 무위행(無爲行)이고 부처의 행[佛行]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구하는 바’가 없으면 이것이 바로 무념이고 마음의 자유, 즉 해탈인 것입니다. 때문에 무념은 모든 마음공부의 기본골자이고 핵심입니다.
무념은 또한 일체의 대상에 대하여 영영 (마음이) 동요하지 않음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곧 일체 경계에 주착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물에 동(動)하는 것은 마음이 그 사물에 주착하기 때문이지, 대상에 아무런 주착이 없는데 마음이 동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에 제가, 심지(心地)가 요란함이 있는 것은 경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경계에 주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주 스님은, 무념이 곧 참다운 생각[眞念]이며, 생각으로써 생각을 삼으면 삿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망상과 분별이며, 정작 이것들이 끊어진 자리에서 나는 텅 비고 밝음이 바로 ‘참다운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념(六念)이란 부처를 생각하고, 진리를 생각하며, 스님과 계율과 보시와 천상세계를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생각을 가르치면 올바른 생각이 아니라고 경전에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대주 스님이 말하는 경이 어떤 경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위와 같은 생각들이 모두 공적(空寂)한 성품에서 벗어나 상(相)에 끌린 생각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삿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일체의 상을 떠나서 마음이 텅 비고 두렷하면 이것이 참다운 생각이고 무념입니다.
경에서 ‘무념법 가운데 머물러 금색(金色)의 삼십이상(三十二相)을 얻어 큰 광명을 놓아서 세계를 남김없이 비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금색이나 삼십이상은 현실세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구경(究竟)의 자리에서 나타나는 지극히 맑고 밝은 지혜의 빛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큰 광명을 놓아서 세계를 남김없이 비춘다’는 것도 공적영지, 즉 자성의 빛이 그토록 온 시방삼계(十方三界)에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수행인이 지극한 구경(究竟)의 경지에 이르러 스스로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은 알음알이나 이해가 아니라, 실제의 체험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위와 같이 불가사의한 공덕이라는 것은 부처님이라도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가 없는데, 경전으로 진리를 공부하면서 부처니, 법이니, 계율이니, 열반이니 하는 것으로써 상(相)을 취해서 불법을 삼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와서 교종과 선종으로 나뉜 것입니다. 교종은 경전으로 가르침을 삼고 선종은 각자의 불성, 즉 자성으로써 진리의 등불을 삼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돈오입도요문론을 공부하는 것은 곧 자기가 가진 본래 청정한 자성을 깨치고 그것을 자유로이 쓰기 위함입니다.
“이미 무념이라고 하면서 부처님 지견에 들어간다고 하니, 또 무엇을 좇아서 세웁니까?”
“무념을 좇아서 세운다. 왜냐하면 경에 이르기를 ‘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일체법을 세운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비유컨대 밝은 거울과 같다’고 하였으니, 거울 가운데는 비록 모양이 없으나 능히 만 가지 형상이 나타나는데, 왜냐하면 거울이 밝은 까닭에 능히 만 가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망념이 나지 않고 ‘나’다 ‘너’다 하는 마음[我人心]이 사라져서 마침내 청정하니, 청정하기 때문에 능히 한량없는 지견이 나는 것이다. 돈오란 금생을 떠나지 않고 곧 해탈을 얻는 것이니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는가? 비유하자면, 사자새끼가 처음 태어날 때도 참다운 사자인 것과 같으니, 돈오를 닦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돈오를) 닦을 때에 곧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마치 대나무가 봄에 순이 나서 그 봄을 여의지 않고 곧 어미 대나무와 같아져 함께 차이가 없음과 같으니, 왜냐하면 마음이 공하기 때문이다.”
問 旣稱無念 入佛知見 復從何立
答 從無念立 何以故 經云 從無住本 立一切法 又云喩如明鑑 鑑中 雖無像而能現萬像 何以故 爲鑑明故 能現萬像 學人 爲心無染故 妄念 不生 我人心 滅 畢竟淸淨 以淸淨故 能生無量知見 頓悟者 不離此生 卽得解脫 何以知之 譬如師子兒 初生之時 卽眞獅子 修頓悟者 亦復如是 卽修之時 卽入佛位 如竹春生筍 不離於春 卽與母齊 等無有異 何以故 爲心空故
무념은 일체의 망념과 분별주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무념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은 아무것도 얻음이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기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념은 스스로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경에 ‘머무름이 없는 근본을 좇아서 일체법을 세운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머무름이 없는 근본’이란 무념, 즉 공적한 우리의 성품자리를 말하는 것으로, 텅 빈 진공의 체(體)에서 무한한 묘유의 용(用)을 나툰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앞에서 티끌 하나 없이 밝은 거울로 비유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허공과 같이 청정한 마음에서 한량없는 지견(知見)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돈오(頓悟)란, 우리가 금생에 죽어 다음 생으로 넘어갈 것도 없이 이생을 떠나지 않고 곧 해탈을 얻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돈오는 이생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고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드는 것이지, 다음 생까지 갈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즉, 돈오는 우리의 성품을 깨치는 것인데, 우리의 성품은 원래 일체의 분별과 주착이 없는 자리라서 스스로 모든 속박을 떠난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바로 깨쳐서 얻으면 내일이고 무슨 다음 생이고 없이 순식간에 바로 있는 그 자리에서 해탈이라는 뜻입니다.
대주 스님은 그것을 사자새끼가 처음 태어났다 해도 곧 진짜 사자인 것과 같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자새끼란 지금 막 자기의 성품을 깨친 수행인을 비유하고, 진짜 사자란 자성을 떠나지 않고 사는 부처님을 뜻하는데, 비록 지금 막 성품을 깨쳤다고 해도 그 성품자리는 모든 부처와 성인들과 전혀 차이가 없으므로, 그 자리를 쓰는 데는 그 분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도인이) ‘돈오를 닦을 때에 곧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는 말은, 돈오가 무념이고 무념은 곧 성품자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의 성품자리에 있으면 저절로 법신불 일원상과 하나가 되므로 곧 부처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봄의 죽순(竹筍)이 그 봄을 여의지 않고 어미 대나무와 같아져 차이가 없는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수도인이 성품을 깨치고 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을 ‘닦음’으로 삼는, 이른바 오후수행(悟後修行)의 뜻이 담긴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죽순’은 막 성품을 깨친 수도인을 말하고, ‘어미 대나무’는 완전한 해탈성불에 이른 부처님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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