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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7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20)
지난 정부에서 우리나라의 강을 살리겠다고 대규모로 실시한 공사가 이른바 ‘사대강 사업’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사업을 실시한 여러 강에서 녹조(綠潮)가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언론에서 보도한 사진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사대강 사업은 전임 이명박 대통령이 확신에 차서 ‘나라를 위해’ 수십 조 원을 들여서 공사를 강행한 것이었는데, 이제 그 결과가 재앙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판단력을 어느 선까지 믿어야할까요?
만약에 내가 내린 판단이 작은 실수라면 그나마 괜찮겠으나, 수많은 생명을 해치고 돌이키기 어려운 자연재해를 불러온다면, 나의 잘못된 판단은 모두에게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국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상급자만을 향한 잘못된 충성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전임 국정원장이 법과 원칙을 저버리고 오직 권력에만 충성해왔다는 사실이, 지난 해 말 국정원의 불법적이고 조직적인 대통령선거 개입활동을 통해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그렇지만 원 아무개 전 국정원장은 아직도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믿는 듯합니다. 거짓으로 꾸미는 것인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의 신념은 어디까지 옳은 것일까요.
엊그제 익산에서 <원불교 미래포럼>이라고 하는 토론대회가 있어서, 제가 발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요청 받아 갔다왔습니다. 제가 거기에서 “교단이 교도들에게 인과의 진리를 철저히 믿게 하지는 않고, 당처불공 실지불공보다도 기도를 장려하는 바람에 다들 미신화에 빠져있다” “돌을 깎아 성탑을 건립함으로써 도리어 진리적인 신앙을 무너뜨려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의 이러한 발언에 많은 교무님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뒷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스로 진리에 몸을 던져 출가하신 분들이 교전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믿었을까요. 교당에서 교무님이 ‘기도를 올리면 원하는 일이 그대로 된다’고 하면 정말 아무런 의심이 안 들던가요.
성품의 지혜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이성마저 정말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기도만으로 복을 바라는 것이나, 커다랗게 성탑을 조성하는 행위가 우리 원불교가 자랑하는 ‘진리적 신앙’과 거꾸로 가는 것임을 그토록 몰랐을까요.
바른 생각은 텅 빈 자성에서 나오는 생각[無念]이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생각이 아닙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의 자성에 비추어보면 옳은지 그른지를 알 수가 있고, 만약 자성을 모른다 해도 스스로의 이성에 비춰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교무님들이 제가 한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치 다 큰 어른이 초등학생의 지혜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 같아서 되레 적잖이 놀랐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판단이 그저 습관에서 온 것인가, 지혜에서 온 판단인가를 살펴야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판단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때로는 그 판단의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질 수 있습니다. 내가 내린 판단과 그에 따른 행위에 의해서 미래에 받게 될 업보가 지금의 내 판단에 의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마음공부를 하는 수행인이라면, 평소 다수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참다운 자성의 지혜를 밝혀서 올바른 믿음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겠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2) 돈오(頓悟)
“돈오를 닦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바로 망념을 없애고, ‘나’다 ‘너’다 하는 마음[我人心]을 영원히 끊어서 필경 공적하여, 곧 부처님과 같이 되어 다름이 없는 까닭에, 범부가 성인이라고 한다. 돈오를 닦는 사람은 이 몸을 떠나지 않고 곧 삼계를 초월하니, 경에 이르기를 ‘세간(世間)을 무너뜨리지 않고 세간을 초월하며, 번뇌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든다’고 하였다. 돈오를 닦지 않는 사람은 마치 여우가 사자를 따라 쫓아다니는 것과 같아서,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끝내 사자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修頓悟者 亦復如是 爲頓除妄念 永絶我人 畢竟空寂 卽與佛齊 等無有異故 云卽凡卽聖也 修頓悟者 不離此身 卽超三界 經云 不壞世間而超世間 不捨煩惱而入涅槃 不修頓悟者 猶如野干 隨逐師子 經百千劫 終不得成師子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공적(空寂)하여 단 하나의 망념도 일으키지 않으면, 즉시 분별과 주착이 끊어지고, 저절로 ‘나’다 ‘너’다 하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 자리가 수행인이 몰록 깨침[돈오]을 얻어서 마음이 (머물음이 없이) 머무는 자리와 같은데, 이러한 마음이 한 순간, 한 찰나도 어김없이 늘 지속되는 것을 가리켜서 ‘부처를 이루었다[成佛]’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위와 같은 경지에 들었어도 잠시 뒤에 또다시 망념이 일어나고 분별주착이 생기면, 이것을 두고 ‘진여불성을 깨쳤으나 또 (그것을) 닦는(유지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위에서 ‘돈오를 닦는다’고 하는 표현은 바로 이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돈오를 한 그 순간부터 바로 망념을 영원히 떠나서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면 ‘돈오를 닦는 사람[修頓悟者]’이라 하지 않고 ‘돈오를 한 사람[頓悟者]’이라고 말했겠지요.
돈오라는 것은, 아무것도 구함이 없고 그 어디에도 머물음이 없는 청정자성의 경지라, 몸을 어디에 두었든지 상관없이 삼계를 초월합니다.
물론 삼계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이 만든 세계이기 때문에, ‘삼계를 초월한다’는 말은 더 알기 쉽게 말하자면 ‘아무 곳에도 머물거나 붙잡히거나 끌려감이 없다’는 것이지, 삼계라는 세계가 지금 어딘가에 있는데 마치 로켓을 타고 지구를 벗어나듯이 그렇게 그곳을 벗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돈오를 닦아서 삼계를 벗어나는 것은, 우리의 본래마음을 깨치고 그 자리를 유지함으로써 극락과 지옥, 부처와 중생, 있음과 없음, 선과 악, 시와 비를 모두 떠난 자연해탈의 자리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달리 착각하면 안 될 것입니다.
‘세간을 무너뜨리지 않고 세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몸은 세상살이 속에 있으나 마음은 세간을 벗어나 속박 받지 않고 자유롭게 해탈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번뇌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든다’는 것은, 우선 그 뜻을 알려면 번뇌와 열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번뇌란 마음을 요란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모든 망념을 말하고, 열반이란 그와 같은 번뇌가 모두 사라져 일체의 속박을 벗어나 해탈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흔히 번뇌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일렁이는 파도로 비유하고, 열반은 일체의 파도가 잠자고 지극히 평온한 물로 비유합니다.
자, 그렇다면 가령 파도를 버리고 물을 따로 얻을 수 있을까요. 또는 만약 물이 없다면 파도가 있을 수 있을까요.
따라서 번뇌와 열반도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번뇌의 본바탕이 열반이며, 열반이란 번뇌의 다른 모습입니다.
때문에 번뇌를 떠나면 열반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라, ‘번뇌를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잘못 오해하여 열반을 얻은 사람이 번뇌와 열반을 동시에 갖는다는 뜻으로 알면 안 되겠습니다.
이렇게 돈오를 닦아야만 참다운 해탈과 열반을 얻는 것인데, 만약 돈오를 닦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대주 스님이 비유해서 말하였습니다.
마치 여우가 사자를 쫓아다니는 것과 같다, 즉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여우는 여우고 사자는 사자이니, 결국 해탈과 열반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근본적으로 돈오를 거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을 끝내 제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 성품의 깨침이라는 것을, 불자로서 그저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철저한 수행정진으로써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3) 진여(眞如)와 무심(無心)
“진여의 성품은 실로 공한 것입니까, 공하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공하지 않다고 하면 곧 모양이 있는 것이고, 만약 공하다고 하면 곧 단멸(斷滅)이니, 모든 중생이 마땅히 무엇에 의지해서 닦아야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까?”
“진여의 성품은 공하기도 하고 공하지 않기도 하다. 왜냐하면 진여의 묘한 체(體)는 형상이 없어서 얻을 수 없으니 또한 공하다고 한다. 그러나 텅 비고 모양이 없는 체 가운데 항사묘용을 갖추어서 곧 응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또한 공하지 않다고 한다. 경에 이르기를 ‘하나를 알면 천 가지가 따라오고, 하나를 모르면[迷] 만 가지에 미혹(迷惑)된다’고 하였으니, 만약 누군가 하나를 지키면 만 가지 일을 마치는 것이라, 이것이 오도(悟道)의 묘함이다. 경에 이르기를 ‘삼라만상이 한 법의 도장 찍힌 바’라 하였으니, 어떻게 한 법 가운데서 갖가지 견해가 나오는 것인가? 이러한 결과[功業]는 행(行)으로 말미암아 근본이 되니, 만약 마음을 항복받지 못하고 문자에 의지해서 증득하려한다면 옳지 못하다.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여서 피차가 함께 떨어질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여 자세히 살펴야한다. 다만 일이 오더라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어느 곳에서나 무심하라. 이와 같이 얻은 사람은 곧 열반에 들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니, 이것을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하고 또 다툼이 없다[無諍]고 하며 또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필경 청정하여 아상과 인상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을 일으키지 않음이 두 가지 성질[二性]이 공한 것이며, 보는 바가 없는 것이라, 곧 이것이 ‘얻음이 없는 진여(眞如)’의 말씀이다.”
又問 眞如之性 爲實空 爲實不空 若言不空 卽是有相 若言空者 卽是斷滅 一切衆生 當依何修而得解脫
答 眞如之性 亦空亦不空 何以故 眞如妙體 無形無相 不可得也 是名亦空 然 於空無相體中 具足恒沙之用 卽無事不應 是名亦不空 經云 解一卽千從 迷一卽萬惑 若人 守一 萬事畢 是悟道之妙也 經云 森羅及萬像 一法之所印 云何一法中而生種種見 如此功業 由行爲本 若不降心 依文取證 無有是處 自誑誑他 彼此俱墜 努力努力 細細審之 只是事來 不受 一切處 無心 得如是者 卽入涅槃 證無生法忍 亦名不二法門 亦名無諍 亦名一行三昧 何以故 畢竟淸淨 無我人故 不起愛憎 是二性空 是無所見 卽是眞如無得之辯
진여의 성품은 공한가, 공하지 않은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공하다면 모든 것이 끊어져서 없는 것이고, 공하지 않다면 반드시 모양이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중생이 대체 무엇에 기대어 닦아야만 해탈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엇으로 수행해야하는지 헛갈린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물음은 자기의 본성, 즉 자성을 깨치지 못한 수행인의 영원한 의문입니다. 이른바 진공묘유의 자성이라는 것을 도저히 머리로서는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 자리를 깨쳐서 알면 한 마디 아니라 반 마디 말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깨치지 못하면 삼세 모든 부처님이 나서서 영원토록 설명해주어도 모른다는 것이 이 자성이라는 것인데, 대주 스님은 그래도 모르는 사람의 심정을 생각해서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휴휴암좌선문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의 자성은 공이불공(空而不空)이며 유이비유(有而非有)라, 텅 비었으되 비어있지 않고, 있으되 있지 않은 것은 앞서 여러 번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말씀인 ‘하나를 알면 천 가지가 따라오고, 하나를 모르면[迷] 만 가지에 미혹(迷惑)된다’ 즉 해일즉천종 미일즉만혹(解一卽千從 迷一卽萬惑)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위에서 ‘하나’라는 것은 곧 자기의 성품을 말하고 ‘천 가지’란 모든 사물의 이치[事理]를 말합니다. 그리고 뒤에 오는 ‘만 가지’라는 것은 중생이 부딪치는 일체 모든 경계를 뜻하는 것으로 알면 되겠습니다.
즉, 누구든 자신의 성품을 깨쳐서, 텅 비고 고요하지만 또한 한없이 두렷하고 밝은 그 묘한 작용을 얻으면, 마주치는 경계마다 그 반야의 공적영지로써 사리에 막히고 모르는 바가 없으나, 만약 자기의 성품을 깨치지 못하고 미혹하면, 마주치는 경계마다 그것에 사로잡히고 끌려가 속박됨으로써 잠시도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서가모니 부처님이나 과거 모든 조사들, 그리고 소태산대종사께서 깨침을 얻기 전에는 어떠셨다고 하였습니까.
온갖 사물에 대한 번뇌가 잠시도 쉬지 않아서 스스로 속박되어 자유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모두 의문투성이라 경계가 자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사실은 마음이 스스로 경계에 온통 끌려가 미혹된 것이지요. 이것이 미일즉만혹(迷一卽萬惑)의 예(例)입니다.
그런데 모든 부처와 조사께서 자신들의 안에 깃든 진여불성을 깨치고 나신 뒤에는 어떠셨습니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요. 누구에게 배우지도 않았고 경험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저절로 공적원명(空寂圓明)한 지혜광명을 얻어서 눈앞에 마주친 경계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물어오는 끝없는 질문에도 막히고 모르는 바 없이 다 설명해서 가르쳐주었습니다. (물론 이 질문과 대답은 세상의 어떤 지식이 아니라, 유형무형의 일체 만유의 근본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여자성을 깨쳐서 그 지혜를 얻음으로써 사물의 이치가 다 밝아진 것을 해일즉천종(解一卽千從)이라 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은 그대로 믿기가 좀 어렵지요. 그러나 직접 자기의 성품을 바로 깨친 수도인이라면 아무리 믿지 않으려고 해도 믿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그러한 일들이 똑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각자가 반야의 불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과 중생이 다른 점은 바로 그 차이뿐이지요.
‘삼라만상이 한 법의 도장 찍힌 바’라고 한 것도, 일체만유는 참으로 텅 빈 그 ‘하나’가 묘하게 나타나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주만유의 본원(本源)이 곧 일원(一圓)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밖으로 보면 우주의 본원이고 안으로 보면 우리 각자의 자성이지요.
이 둘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천만 지혜를 발하게 하고, 우주에서는 온갖 사물의 운행을 주관하는 근본바탕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여의 다함없는 묘용을 얻게 되는 것은 수행으로써 얻는 것이라, 분별 주착을 떠난 마음의 본바탕을 깨치지 못하고 문자에 기대어 깨치려고 하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말과 글로써 이해해서 아는 체를 하면 자기와 남을 모두 속여서 함께 구덩이에 빠지는 격이라, 참으로 그러한지 어떤지를 자세히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주 스님은 또 아주 간단히 위와 같이 우리 본래의 성품을 닦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래불수(事來不受)하고 일체처에 무심(一切處無心)하라 - 일이 오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어디에서나 무심하라 -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경계와 마주치더라도 그것에 끌려가서 주착하지 말고, 늘 마음을 허공처럼 지녀라’는 뜻입니다.
표현을 조금 달리하면 이 말은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不動)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을 허공과 같이 하라’는 무시선법의 가르침과 완전히 같습니다. 이렇게 불조(佛祖)의 가르침은 표현법만 다를 뿐 그 뜻은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이처럼 사래(事來)에 불수(不受)하고 일체처에 무심하면 그 마음상태가 곧 진공묘유의 성품이기 때문에, 바로 열반에 들어서 남이 없는 진리의 깨침을 얻으니, 이것이 ‘둘 아닌 진리의 문[不二法門]’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툼이 없는[無諍] 것이라 하고 일행삼매라 하였는데, ‘다툼이 없다’는 것은 마음과 경계, 부처와 중생, 옳음과 그름, 좋고 나쁨, 등 서로 맞서는 두 관념이 모두 사라져서 평온하다는 뜻이며, 일행삼매(一行三昧)란 마음 가운데 대립과 차별이 모두 사라져 텅 비어 고요하고 두렷이 밝은 선정삼매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무생법인을 얻는 것이나,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나, 다툼이 없는 것이나, 일행삼매 속에 있는 것은, 표현만 서로 다를 뿐 서로 완전히 똑같은 뜻입니다. 마지막에 ‘얻음이 없는 진여’라는 말도 물론 우리의 자성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본래 그러한 것이지 누구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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