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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4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21)
우리나라 검찰총장이 어제 정권의 압력을 받아 사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대통령선거 직전에 있었던 국가정보원 직원의 인터넷 댓글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던 과정에서, 한 언론사가 검찰총장의 사생활 의혹을 보도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대통령선거라는 지극히 공적(公的)인 사건을 수사하던 사법기관의 우두머리가, 사생활과 관련된 사적(私的)인 이유로 정권에 의해서 사실상 제거되었다고들 합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무상대도 불법을 닦는 수행자인 우리들도, 세상사에 있어서 무엇이 공적인 일이고 무엇이 사적인 일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선가(禪家)에 ‘관불용침 사통거마 (官不容針 私通車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적(公的)으로는 바늘 끝만큼도 용납하지 않으나, 사적(私的)으로는 말과 수레도 드나든다는 말입니다. 공사(公事)라면 작은 잘못도 용서치 말아야 하지만, 사사(私事)라면 한없는 인정을 베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원불교도 이게 바로서지 않아서 지금 교단이 망할 위기에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교도 수가 고작 2~3만 명으로 계속 침체되고 있는데도, 교단 지도자들은 이른바 '세계 주세교단'으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우리 교단의 교도 수라고 해봐야 전체 4천5백만 인구의 천 분의 일도 안 되는데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아무도 그 주장에 이의를 달려고 하지 않습니다.
끼리끼리는 수군거리면서도 공적인 비판이 아예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우리 교단이 아주 속 빈 강정이 되었습니다.
교역자 수가 계속 준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인 해법으로써 교당을 통폐합하는 것은 주저합니다. 지난 수십 년 간 교도들의 숫자는 거의 늘지 않았는데 계속 교당만 불려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교단이 확장된 것은 모두 돈에 의한 것으로써, 대중교화를 통해 교도 수가 늘어나서 교당 숫자가 불어난 게 아닙니다. 그 동안 정신개벽은커녕 물질에 예속된 교단을 운영해왔습니다.
지금의 교단은 교조 소태산님의 뜻이 그대로 살아있는 원불교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 교단이 우리나라 안에서만이라도 주요교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적(私的)으로 교단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얼마든지 좋지만, 공적(公的)으로 교단의 물질주의, 세속화, 미신화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거부운동을 펼쳐야합니다.
세속화되고 미신화 되어버린 교단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은 소태산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교단을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불자로서도 불법에 대한 진정한 수행 없이 오직 신앙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반드시 미신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는 교단에 대해서 어느 것이 공적인 일이고 어느 것이 사적인 일인가를 판단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단을 다시 일으키고 나를 살리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할 시기입니다. 이 일은 누구나 빈 마음으로 바라보면 저절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지 않더라도 결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42. 중생이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衆生自度]
“이 논(論)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전하지 말고, 오직 견해와 행(行)이 같은 이에게 전할 것이며, 마땅히 앞에 있는 사람이 참으로 신심이 있어서 감당하여 물러서지 않는 사람인가를 보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설하고 보여서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다. 내가 이 논을 지은 것은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해서이지 명예와 이익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천경만론(千經萬論)은 중생이 미혹한 까닭에 마음과 행동이 같지 않으니 (그) 삿됨을 좇아 대응하여 설하신 것이라 곧 차별이 있으나, 구경(究竟) 해탈의 이치를 논하자면, 다만 일이 와도 받지 않고[事來不受] 어느 곳에서나 무심하여[一切處無心] 마치 허공 같이 영원히 고요하고 필경에 청정하니 저절로 해탈이다.
此論 不傳無信 唯傳同見同行 當觀前人 有誠信心 堪任不退者 如是之人 乃可爲說 示之令悟 吾作此論 爲有緣人 非求名利 只如諸佛所說千經萬論 只爲衆生 迷故 心行不同 隨邪應說 卽有差別 如論究竟解脫理者 只是事來不受 一切處無心 永寂如空 畢竟淸淨 自然解脫
대주 스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겐 이 돈오입도요문론을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세상엔 명백한 사실을 가지고 말해주어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더욱이 사람이 경험하지 않은 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가모니부처님이래 불교에서 자기의 성품을 깨닫는다는 것은 아직도 적은 수의 불자들에게서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깨침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법회에서 자주 상기(想起)시키는 일도 드물고, 또 애써 그렇게 일깨워준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믿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래서 실지로 수행을 해나가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렇게 아무리 신심 깊은 불자라 하더라도, 평소에 ‘나도 틀림없이 깨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가르쳐주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우선 수행에 이런 저런 핑계로 분발심이 적고, 자기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보다는 책이나 말 또는 어떤 상(相)에 더 많이 끌립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성인들을 숭배하는 것은 잘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보물은 여간해선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주 스님은 ‘나도 깨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이 책을 보여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을 비는 기도처에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어도, 참다운 도를 가르치는 곳에는 사람의 발길이 드뭅니다. 그저 부처님에게 기도하면 복을 받을 줄로 아는 믿음이지, 수행으로써 괴로움의 바다를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은 없습니다.
대주 스님은 자신이 이 논을 지은 것은 인연 있는 사람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은 잘 모르지만 과거 생으로부터 공부해온 인연으로 앞으로 깨침을 얻게 될 미래의 많은 불보살들을 위해서 이 논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대주 스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수행자들이 올바른 공부길을 찾아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논은 말과 글로 되어있지만 오로지 여기에 담긴 그 뜻을 취해서 마음으로 체득하라는 책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중생이 어리석어서 마음과 행동이 서로 다르니, 부처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가르침을 설하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말씀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도에 들어가는 것으로 말하자면 가르침이 아주 간단하다는 것이지요.
즉, 일이 와도 받아들이지 않고(경계가 있어도 끌려가지 않고), 어디서나 무심하라(망상 분별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절로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경전에 정산종사 법어 법훈편 8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지요.
「천하의 대도(大道)는 간이(簡易)하나니, 공부 길을 잡은 이는 팔만장경을 단련(鍛鍊)하여 한 두어 마디로 강령(綱領) 잡아 실행하나니라.」
여기서 ‘한 두어 마디’는 바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수행이라는 것은 제대로만 알면 참 간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알고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이 드문 것은, 자신의 성품을 깨쳐서 불법의 참뜻을 마음과 몸으로 체득한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수행자들이 계속해서 많이 나오지 않는 한, 부처님과 조사의 위와 같은 가르침은 늘 허공에서 맴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대들은 헛된 이름을 구해서 입으로는 진여를 말하면서 마음이 원숭이처럼 되지 말라. 곧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니, 마땅히 악도에 떨어진다. 한 세상의 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지 말라. 모르는 사이에 오랜 겁의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할지니라. 중생이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님이 제도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부처님이 능히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면 과거 모든 부처님이 작은 티끌 수와 같은 일체 중생을 모두 마땅히 제도하여 마쳤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생사에 떠돌며 성불하지 못하였겠는가? 중생이 스스로를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님이 능히 제도하지 못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노력하고 노력하여 스스로 닦아서 다른 부처님의 힘에 기대지 말지니, 경에 이르기를 ‘무릇 법을 구하는 자는 부처에 집착하여 구하지 말라’고 하셨다.”
汝莫求虛名 口說眞如 心似猿 卽言行 相違 名爲自誑 當墜惡道 莫求一世虛名快樂 不覺長劫受殃 努力努力 衆生自度 佛不能度 若佛能度衆生時 過去諸佛 如微塵數 一切衆生 總應度盡 何故 我等 至今流浪生死 不得成佛 當知衆生自度 佛不能度 努力努力自修 莫倚他佛力 經云 夫求法者 不著佛求
대주 스님은 수행자가 거짓으로 이름을 내려고 실제는 말과 행동이 다르면서도 말로만 진여의 도리를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깨치지 못하였으면서 깨침의 가르침을 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완전한 해탈'에 이르지 못하였으면서도 해탈의 도리를 말하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뜻으로 해석한다면 ‘돈오가 곧 해탈성불’이라는 돈오돈수를 가리키는 말로써, 저 또한 이 논을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수도인으로서 경험에 비춰보면, 마음이 일체의 망상과 분별주착을 떠나면 언제 어디서든 이미 그 자리에서 저절로 해탈되어 있음을 보고, 밖이든 안이든 어느 한 곳에 티끌만한 주착이라도 있게 되면 그 즉시 좋고 싫음, 옳고 그름의 속박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수심결(修心訣)을 지으신 보조 스님의 말씀처럼, 저의 경우도 전체로서 보면 '깨침 뒤에 닦음' 즉, 돈오점수가 타당하다는 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미래 생의 어느 날 한 번 바로 깨쳐서 더 이상 닦음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지금과 같은 경지가 참다운 경지가 아니라고 확인되기 전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수행해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중생은 부처님이 제도해주는 것이 아니라, 중생 스스로가 자신을 제도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중생은 부처님에게 의지해서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수행력으로 자유와 해탈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실로 우리 모든 중생들이 거의 모르고 있거나, 또는 까맣게 잊고 있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날마다 어떤 형태로든지 부처님에게 절하고 기도하며,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받들어 읽는다 해도, 결국 우리가 실제로 해탈하고 성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신앙이나 기도 또는 경전봉독 등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나 다짐은 될지언정,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을 제도하는 직접적인 길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붙잡고 깊이 파고드는 끈질긴 수행이 있어야만 자기 스스로를 제도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남이 맛있게 밥 먹는 것을 본다고 내가 배부르지 않듯이, 부처님의 무량한 해탈법문을 받들고 외운다고 내가 저절로 해탈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내가 정말 그처럼 깨치고 체험해야만 비로소 내가 괴로움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불자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수행입니다. 수행이 아니면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결코 알 수도, 남에게 전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부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구하는 자가 부처님을 통해서 진리를 얻으려고 한다면 잘못이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43. 같이 있어도 같이 살지는 않는다[同處不同住]
“내세에는 잡다한 공부를 하는 무리가 많을 터인데, 어떻게 함께 살아야합니까?”
“다만 그 빛을 온화하게 하되 그 행동[業]은 같이 하지 말아야하니, 같은 곳에 있어도 같이 살지는 말라. 경에 이르기를 ‘흐름을 따라도 성품은 한결같다’고 하였다. 다만 도를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일대사 인연인 해탈의 일을 위할지니, 또한 처음 배우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부처님 같이 공경하고 배우며, 자기의 덕을 높이면서 남의 능력을 질투하지 말고, 자기의 행동을 살피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추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방해와 장애를 받지 않고 자연히 쾌락할 것이다. 거듭 게송으로 말하노라.
인욕이 첫째가는 도이니
먼저 ‘나’다 ‘너’다 하는 마음을 없애라
일이 오더라도 받는 바가 없으면
바로 참된 보리의 몸이다.”
問 於來世中 多有雜學之徒 云何共住
答 但和其光 不同其業 同處不同住 經云 隨流而性常也 只如學道者 自爲大事因緣解脫之事 具勿輕末學 敬學如佛 不高己德 不疾彼能 自察於行 不擧他過 於一切處 悉無妨礙 自然快樂也 重說偈云 忍辱第一道 先須除我人 事來無所受 卽眞菩提身
‘다만 그 빛을 온화하게 하되 그 행동은 같이 하지 말라[但和其光 不同其業]’는 구절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和其光 同其塵]’는 구절을 본뜬 것 같습니다.
노자가 한 말씀은 지혜로운 이가 자신의 지혜를 감추고 범부들과 한데 어울려 지낸다는 것인데, 도가(道家)에서 보여주는 가장 높은 경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주 스님은 둘째 구절을 바꿔서 그 행동은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앞서 노자의 말씀과는 달리, 세속에서 범부중생들과 어울리더라도 그 행동은 따라하지 말라는, 수행자로서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같은 곳에 있더라도 같이 살지는 않는다’는 것과, ‘흐름을 따라도 성품은 한결같다’는 말씀은 거의 같은 뜻입니다. 비록 몸은 세속의 흐름 속에 두지만 마음은 청정무구한 본래의 성품을 벗어나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거진출진(居塵出塵)이라는 의미가 곧 이것입니다. 세속에서 도를 닦고 있는 참다운 재가수행자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이지요.
44. 어디서나 무심하라
“금강경에 이르기를 ‘보살이 무아(無我)의 법을 (통달한) 사람은 여래가 참다운 보살이라고 이름 한다’고 하였다. 또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영원히 생사를 끊어서 어느 곳에서나 무심하면 곧 모든 부처님의 아들이다’고 하였고, 열반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열반을 증득하여 영원히 생사를 끊었다’고 하였다. 게송으로 말하노라.
나는 지금 뜻이 매우 좋아서
남이 욕할 때도 괴로움이 없고
말이 없어 시비를 말하지 않으니
열반과 생사가 같은 길이네
자신의 근본을 사무쳐 알아서
이러쿵저러쿵 분별마저 없으니
일체의 망상과 분별은
세상 사람들이 밝게 모르는 탓임을 알라
말세의 범부에게 이르노니
마음 가운데 무성한 풀을 없애버려라
내 지금 뜻이 크게 넓어서
말없고 일 없어 마음이 편안하니
조용하여 자재 해탈이라
동서 어디를 가도 쉬워서 어렵지 않다
종일토록 말없이 고요하되
생각 생각에 이치를 향해 생각하고
자연히 소요하면서 도를 보니
생사와는 결코 상관치 않노라
내 지금 뜻이 크게 기특하여
세상을 탓하지도 속이지도 않는다
영화(榮華)는 모두 헛된 속임수이니
헤진 옷 거친 음식으로 굶주림을 채운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도 별 말이 없으니
세상사람들 모두 나를 바보라 하네
겉으로는 질린 듯 어리석어 보이나
마음속은 밝기가 유리 같아서
라후라의 밀행에 묵묵히 계합하니
그대 범부들은 알 수 없으리라.
내 그대들이 참 해탈의 도리를 알지 못할까 염려되어 거듭 그대들에게 말해 보였노라.”
金剛經云 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又云 不取卽不捨 永斷於生死 一切處 無心 卽名諸佛子 涅槃經云 如來證涅槃 永斷於生死 偈曰 我今意況大好 他人罵時無惱 無言不說是非 涅槃生死同道 識達自家本宗 猶來無有靑皁 一切妄想分別 將知世人不了 寄言凡夫末代 除却心中藁草 我今意況大寬 不語無事心安 從容自在解脫 東西去易不難 終日無言寂寞 念念向理思看 自然逍遙見道 生死定不相干 我今意況大奇 不向世上侵欺 榮華總是虛誑 弊衣麤食充飢 道逢世人懶語 世人咸說我癡 外現瞠瞠暗鈍 心中明若瑠璃 黙契羅睺密行 非汝凡夫所知 吾恐汝等 不會了眞解脫理 再示汝等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을 통달한 이는 여래가 참으로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는 말씀은 금강경 17장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저는 ‘通達(통달)’이라는 두 글자가 잘못해서 빠진 것으로 보는데, 이 두 글자가 없으면 해석하는 데 무리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무아(無我)의 법이란 ‘나[我]라는 것은 없다’는 진리, 모든 것은 연기(緣起)에 의해서 나타날 뿐, 그 실체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물질과 마음작용을 통틀어 오온(五蘊)이라고 하는데, 반야심경에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춰보고 모든 괴로움의 바다를 건넜다’고 하셨으니, 바로 무아의 법을 통달하였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참다운 보살이라고 부른다는 말씀이지요.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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