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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5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23)
지난 2011년에 종합편성채널이라는 TV방송국들이 생겼습니다. 시청률로 보자면 아직은 전반적으로 미미해서, 가령 뉴스의 시청률이 1%도 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조금 특별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JTBC라는 채널에 있어서 유독 저녁뉴스만은 다른 채널들과는 다르게 시청률이 오르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손석희라는 앵커가 이 뉴스의 진행을 맡은 뒤로 젊은 층이 많이 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 뉴스는 다른 방송국의 뉴스편성 방식과는 다르게, 뉴스의 꼭지 수는 줄고 심층보도가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주요뉴스에 대한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는 것이 강점으로 꼽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뉴스보도의 공정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시청자들의 신뢰를 얻는다는 건 불가능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뉴스에서 사건 소식뿐 아니라 그 사건의 배경과 전문가의 해설을 들려주면 보는 이의 이해가 빠릅니다. 우리는 현실을 정확히 진단할 수가 있으면, 그 다음엔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 일이란 ‘병(病)을 알아야’ 약을 쓸 수가 있는 것이지, 만약 병을 모른다면 약도 쓸 수가 없습니다.
종교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단체가 스스로의 병을 모르면, 예외없이 이치에 어긋나는 무리한 길을 걷게 됩니다. 중세 가톨릭에서 신자들에게 면죄부까지 판매했다는 것이 그 극단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저 유명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가 자기 자신의 병을 모르니 내부에서 지사(志士)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저께 열렸던 <교단혁신 재가출가연대> 서울대회도 그 한 예라고 할 것입니다. 저도 이 대회에 참석해서, 이른바 한국의 4대 종단 가운데 불교나 기독교의 교세가 각각 ‘어미 소’만하다고 한다면, 현재 우리 교단은 ‘다람쥐’만한 크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실제 우리 원불교의 교세는 이렇게 국내에서조차도 아주 미약하면서, 말로는 바깥으로 세계 주세교단을 만들자고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병을 모르고 있으면 약 처방도 못 하는 법입니다. 교단 지도부는 늘 교화(敎化)를 부르짖지만, 교리에 어긋나는 교헌(敎憲)과 시대에 뒤떨어진 수많은 제도와 관행을 가지고서, 더구나 교화라는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수행하는 이들조차 드문 현실에서 세계교화를 얘기하는 것은 참으로 딱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야 제도와 교화혁신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결국 미래에는 수행운동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이런 혁신운동도 근본적으로는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의 수행실력을 정확히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자기실력을 잘 알지 못하면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자만하거나 게으르기 마련입니다.
수행자라면 자기가 아는 것이 정말 ‘자기의 것’인지, 아니면 단지 밖에서 얻어온 지식(知識)에 불과한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현실경계를 만났을 때 마구 흔들린다면 자기가 아는 것은 고작 지식일 뿐이며,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뿌리가 튼튼해야만 비로소 그것이 자기 것이고 수행자입니다.
일이 없어서 정(靜)할 때 마음이 고요한 것도 장한 것이지만, 일이 있어서 동(動)할 때 공원정(空圓正)을 쓸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불제자요, 수도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행하는 이가 그렇게 되려면 먼저 자기 마음의 본질을 깨치고, 그것을 온전히 지켜나가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JTBC 뉴스에서 손석희 앵커가, 일어난 사건의 배경과 그 본질을 심층적으로 캐는 것처럼, 내 마음에 대해서도 그렇게 ‘마음의 본질’과 ‘그 마음이 일어난 배경’을 캐도록 해주는 것이 곧 조사(祖師)의 심지법문(心地法門)입니다.
신심 깊은 불자라도 자기의 마음병을 모르면, 한 동안은 무사태평할 수가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락으로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현재 자기의 공부실력이 단단한 땅(地)처럼 흔들림이 없는지, 혹은 흐르는 물(水) 처럼 한결같은 공부인지, 아니면 일정기간 동안 무섭게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불(火) 같은 공부인지, 그저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風) 같은 공부인지,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생에 있어서 우리자신 제도(濟度)에 후회 없는 불제자가 됩시다.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50. 진여(眞如)의 선정(禪定)
“어떤 것이 진여의 선정입니까?”
“선정도 없고 선정이 없음도 없는 것이 곧 진여의 선정이다. 경에 이르기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정(定)한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실 만한 정한 법이 없다’고 하였다. 또 경에 이르기를 ‘비록 공을 닦으나 공으로써 증(證)을 삼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공하다’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며, 비록 선정을 닦으나 선정으로써 증을 삼지 않아서 선정이라는 생각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고, 비록 깨끗함을 얻었으나 깨끗함으로써 증을 삼지 않아서 ‘깨끗하다’는 생각도 짓지 않음이 곧 이것이다. 만약 선정을 얻고 깨끗함을 얻어 어느 곳에서나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 ‘이와 같이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망상이니, 바로 얽매이게 되어 해탈이라 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얻었을 때에 분명하고도 분명하게 스스로 알아서 자재를 얻되 이것을 가지고 증을 삼지 않으며 또한 이와 같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때 해탈을 얻는다. 경에 이르기를 ‘정진할 마음을 일으키면 이는 망념으로써 정진이 아니다. 만약 마음이 망상분별하지 않으면 정진이 끝이 없다’고 하였다.”
問 云何是眞如定
答 無定無無定 卽名眞如定 經云 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定法如來可說 經云 雖修空 不以空爲證 不得作空想 卽是也 雖修定 不以定爲證 不得作定想 卽是也 雖得淨 不以淨爲證 不得作淨想 卽是也 若得定得淨 得一切處無心之時 卽作得如是想者 皆是妄想 卽被繫縛 不名解脫 若得如是之時 了了自知 得自在 卽不得將此爲證 亦不得作如是想時 得解脫 經云 若起精進心 是妄非精進也 若能心不妄 精進無有涯
진여의 선정이란 불성(佛性) 자체에 그대로 머무는 선정을 말합니다. 진여(眞如)라는 뜻은, 참으로 여여(如如)하다, 늘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을 말하는데, 이는 곧 불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불성을 좀 알기 쉽게, 마음이라는 글자를 써서 표현할 때는 본래마음[本心]이라고도 하고, 또는 마음 땅[心地]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마음 땅이라고 하는 이유는, 희로애락과 탐진치에 쉽게 물드는 우리 마음이 마음의 참 모습이 아니라, 이것들에 전혀 물들지 않는, 마치 대지(大地)처럼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굳건한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질(바탕)이라고 해서 심지(心地)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심지, 즉 불성은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조차 없는 우리 마음의 본래자리인데, 수행자가 이 자리에 머문다고 하는 선정(禪定)이라는 게 대체 뭐냐,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수행인이라면 다 아는 것이지만, 선정은 그냥 조용히 앉아있다고 해서 선정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선정이라는 말은 수행인이 취하고 있는 '어떤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가 무슨 동작을 하고 있든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경지를 일컫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든 서있든 혹은 뛰고 있든, 말을 하고 있든 혹은 침묵하고 있든, 그 동작이나 행위는 선정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령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고 해도 반드시 그가 선정에 들어있다는 징표는 아닙니다.
선정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이 텅 비고 활짝 깨어있어서, 그 가운데 털끝만큼의 분별 주착도 없으면 그게 바로 선정입니다.
위에서 진여의 선정은 ‘선정도 없고, 선정이 없음도 없다’고 하였는데, ‘선정이 없다’는 것은, 선정 속에는 이른바 ‘선정’이라는 모양[相]이 없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우리 성품은 공(空)하되 공하다는 상(相)이 없어서 실로 공이 아니며, 상덕(上德)은 덕(德)이라는 상(相)이 없고, 부처는 정작 부처라는 상(相)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선정이 없음도 없다’는 것은, 진여의 선정은 이른바 무기(無記) 혹은 허무적멸(虛無寂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선정 속에는 선정이 없다고 해서, ‘아, 그렇다면 선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그 어떤 경계에도 물듦이 없이, 우리 성품 그대로의 본래자리에 머무는 진여의 선정은, ‘선정’이라는 상(相)을 떠났으되, 또한 상(相)을 떠나있다는 것도 없어서, 이른바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며, 공(空)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닌 것입니다.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금강경 7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여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로써 한자로 풀이하면 부처님의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침(無上正等正覺)’을 말하고, 이를 줄여서 흔히 ‘보리(菩提)’라고 합니다.
그런데 위 구절을 해석할 때 사람들이 흔히 잘못 풀이하는 수가 있습니다.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만한 정(定)한 법이 없다’ 즉, 보리(菩提)라는 것은 ‘바로 이렇다’ 하고 말이나 혹은 모양 또는 개념으로써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때문에 이 말씀을, ‘보리(菩提)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 혹은 ‘정해진 것이 없다’,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라고 풀이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문자적으로 위 구절을 풀이하는 데에 있어서도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앞서 제가 말한 본래의 뜻과는 동떨어지게 되어 큰 오해가 생깁니다.
가령 중국어로 ‘無有人名OOO’라고 하면 ‘OOO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도 없는 것을 OOO이라고 부른다’라고 풀이하면 터무니없는 오역(誤譯)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구절은 반드시 ‘보리(菩提)라고 이름할 만한 정한 법이 없다’라고 풀이한다는 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또한 위에서 무정법여래가설(無定法如來可說)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실 만한 정한 법이 없다’라고 해석을 해야지, ‘정한 법이 없는 것을 여래께서 가히 설하신다’고 하면 잘못된 해석으로써,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여기서도, 보리를 뭐라 말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래조차도 설할 수가 있는 정한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공을 닦으나 공으로써 증(證)을 삼지 않는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공을 닦는다’는 것은 실제 공(空)이란 게 있어서 그것을 닦는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알면 이른바 ‘공(空)’이라는 상(相)을 가짐으로써 공(空)을 착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공을 닦는다’는 말은 ‘공한 성품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자성에 회광반조(廻光返照) 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래에 분별주착 없는 자리에 머문다’고 합니다.
‘공으로써 증(證)을 삼지 않는다’는 것은 ‘공에 머물지 않는다’ 또는 ‘공한 상(相)을 짓지 않는다’ 혹은 ‘공이라는 생각[想]을 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선정을 닦으나 선정으로 증을 삼지 않는다’, ‘깨끗함을 얻으나 깨끗함으로 증을 삼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相[분별]과 想[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체처에 무심을 얻었을 때, ‘이와 같이 얻었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다름아닌 망상이며, 이렇게 되면 해탈은 커녕, 자기 스스로를 또 얽어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것도 그렇고, 이를테면 지자(智者)니 명사(名士)니 미인(美人)이니 하는 생각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야말로 그 한 생각이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가 됩니다.
따라서, 그야말로 두렷하고 생생하게 알지만 ‘안다, 밝다’는 생각이 없는 바로 그 자리가 ‘진여의 선정’으로써 해탈이라는 것입니다.
“정진할 마음을 일으키면 이는 망념으로써 정진이 아니다. 만약 마음이 망상분별하지 않으면 정진이 끝이 없다 (若起精進心 是妄非精進也 若能心不妄 精進無有涯)”고 하신 것처럼, 수행에 있어서는 늘 이렇게 분별 주착하여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우리 성가에도 “조촐한 둥근 옥(玉)을 아로새김 병통이라 (성가 109장 眞境)”는 가사가 있는데, 바로 위와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51. 중도(中道)는 어느 곳에서나 무심한 것[一切處無心]
“어떤 것이 중도입니까?”
“중간도 없고 또한 두 변[二邊]도 없음이 곧 중도이다.”
“어떤 것이 두 변입니까?”
“저[彼] 마음이 있고 이[此] 마음이 있는 것이 두 변이다.”
“어떤 것을 저 마음, 이 마음이라고 합니까?”
“밖으로 색과 소리에 얽매임을 저 마음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을 일으키는 것을 이 마음이라 한다. 만약 밖으로 색에 물들지 않으면 곧 저 마음이 없음이요, 안으로 망념이 나지 않으면 곧 이 마음이 없음이니, 이것이 두 변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이미 두변이 없으면 중간이 또한 어찌 있겠는가? 이와 같음을 얻는 것을 곧 중도라 하니, 참다운 여래의 도이다. 여래의 도라는 것은 곧 모든 깨친 사람의 해탈이다. 경에 이르기를 ‘허공은 가운데와 가장자리가 없으니 모든 여래의 몸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일체 색이 공하다는 것은 곧 어느 곳에서나 무심함이요, 어디서나 무심하다는 것은 곧 일체 색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니, 두 가지 뜻이 다르지 않음을 또한 색이 공함이라 하고, 또 색에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대가 만약 ‘어느 곳에서나 무심함’을 떠나서 보리 해탈과 열반 적멸과 선정 견성을 얻는다고 하면 옳지 못하다. ‘어느 곳에서나 무심함’이 곧 보리 해탈과 열반 적멸과 선정과 더 나아가 육바라밀을 닦음이니, 모두 성품을 보는 곳이다. 왜 그러한가? 금강경에 이르기를 ‘얻을 수 있는 작은 법도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問 云何是中道
答 無中間亦無二邊 卽中道也
問 云何是二邊
答 爲有彼心 有此心 卽是二邊
問 云何名彼心此心
答 外縛色聲 名爲彼心 內起妄念 名爲此心 若於外 不染色 卽名無彼心 內不生妄念 卽名無此心 此非二邊也 心旣無二邊 中亦何有哉 得如是者 卽名中道 眞如來道 如來道者 卽一切覺人解脫也 經云 虛空 無中邊 諸佛身亦然 然 一切色空者 卽一切處無心也 一切處無心者 卽一切色性空 二義無別 亦名色空 亦名色無法也 汝若離一切處無心 得菩提解脫 涅槃寂滅 禪定見性者 非也 一切處無心者 卽修菩提解脫涅槃寂滅 禪定乃至六度 皆見性處 何以故 金剛經云 無有少法可得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也
여기서는 중도(中道)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도는 이른바 ‘가운데 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흔히들 중도는 양쪽이 아닌, 예를 들어 왼쪽이나 오른쪽이 아닌, 한가운데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수가 많습니다만, 중도를 완전히 잘못 아는 것입니다.
중도는 간단히 말하자면, 서로 대립되는 두 개념(견해)이 사라져버린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즉 서로 상반되는 두 견해가 사라지면 그 중간도 또한 없게 되는 것이니, 이것을 ‘양변(兩邊)도 없고 가운데도 없다’고 합니다.
대주 스님은 바깥 경계에 끌려 얽매이는 것을 ‘저 마음’이라 하고, 안으로 망념을 일으키는 것을 ‘이 마음’이라고 하면서, 이 두 마음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양변이 없다’고 하였고, 이것을 중도라 하였습니다.
우리 정전의 무시선법에도 보면,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대주 스님의 말씀과 똑같은 뜻으로써, 양변을 모두 떠난 중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중도를 얻으면 이것이 ‘참다운 여래의 도[眞如來道]’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무시선법도 이처럼 참다운 부처님의 도에 이르는 공부이니, 이보다 더 수승(殊勝)한 공부가 없습니다.
때문에 무시선법에는 이 공부로써 “일체법을 행하되 걸리고 막힘이 없고, 진세(塵世)에 처하되 항상 백천 삼매(百千三昧)를 얻으며, 생사자유와 윤회해탈과 정토극락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래의 도는 모든 깨친 사람[覺人]의 해탈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자리를 깨치면 해탈이 무엇인지를 물을 것도 없이 저절로 알게 되고, 해탈하는 법을 묻지 않고도 스스로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이 자리는 가장자리와 가운데도 없고, 안팎도 없으며, 있지도 없지도 않으니, 이것이 여래의 몸이며 진리의 몸으로써, 나의 참다운 몸이며 일원상의 참 모습입니다.
‘일체 색(色: 물질)이 공하다는 것은 곧 어느 곳에서나 무심(無心)함이요, 어디서나 무심하다는 것은 곧 일체 색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라 하였는데, 수행인의 마음이 양변을 모두 떠나면 있는 그 자리에서 ‘색이 그대로 공’이고 ‘공이 그대로 색’임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색에는 법이 없다’는 말은, 모양이 있는 모든 것[色]은 인연 따라 생멸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 내에 영원불멸한 본질[法]이란 게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체처에 무심이 되지 않으면서 보리 해탈 열반 적멸 선정 견성을 얻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가령 자신의 성품자리를 매각(昧却)하고 망상분별을 일으키면서 보리 해탈 열반 적멸 선정 견성을 얻겠다는 것은, 마치 크레파스로 색칠해서 허공을 그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서, 수행자가 어느 곳에서나 무심함이 곧 보리 해탈 열반 적멸 선정과 더 나아가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불교의 육바라밀도 겉보기에는 여섯 가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바라밀이 각각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 무심, 즉 텅 비고 밝은 자성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한꺼번에 닦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우리 무시선법이 천만 가지 모든 수행을 그 속에 다 포함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끝으로, ‘얻을 수 있는 작은 법도 없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한다(無有少法可得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也)’라는 금강경(22장) 말씀은, 아뇩보리에는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생각이나 그 어떤 상(相), 그 어떤 분별도 한 티끌만큼이라도 있으면 구경(究竟: 깨침, 해탈, 열반, 선정, 참다운 육바라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참으로 텅 비어야[空] 참다운 반야[圓]를 나투고, 또한 참으로 바르다[正]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참으로 바르다는 것은 모든 시비(是非)를 초월한 올바름[正]을 말합니다.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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