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2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24 (完)
오늘은 지난 4월20일 이 강좌를 시작한 뒤 스물 네 번째 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 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올해 쉰 한 살인 이태동 씨라는 분인데, 서울 청계천 3가에 있는 센추럴관광호텔에서 안내 관리 청소 등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평범하지 않은 까닭은, 모든 게 다른 사람과 차이가 없는데 다만 키가 1미터 남짓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형제들은 키가 작지 않은데 자기만 그렇다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도 평생 키를 재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경북 안동에서 살았는데, 학교에 가면 나쁜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서커스단에 팔려 갈까봐, 아버지가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홀로 서울로 와서 여러 가지 궂은 일을 하면서 2, 30대를 보냈습니다. 온갖 궂은일을 하다보니 수많은 멸시와 해코지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일찍 철이 들어서 굳은 결심을 하고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이겨냈다고 합니다. 30대 초에 키가 작은 아가씨와 결혼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마음을 먹고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신체조건에 적응했고, 정말로 키에 신경을 안 쓴다고 했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저 자신도 다른 사람과는 어쩐지 같지 않았습니다. 가령 돈 많은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부러운 생각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안으로 내가 나를 보는 눈이 있어서 마음의 움직임에 늘 민감하고, 일상적인 희로애락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였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부와 권력을 향해서 뛰는 삶이 너무 허망하게 느껴져서, 30대를 훌쩍 넘어서까지 세상사람들과 생각이 다른 제 자신이 정말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스스로가 이 험한 세상의 낙오자라는 생각으로 깊은 좌절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서른 아홉 되던 해 3월 어느 날, 홀연히 내 마음의 본체를 깨닫고 난 뒤에야, 내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바로 구도의 과정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만약 부귀영화를 꿈꾸는 세상사람들과 바라는 바가 같았다면, 뭐라고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지금의 제 삶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조사어록 강좌에 오신 여러분은 이미 과거생으로부터 진리공부와 인연이 깊은 불자들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성품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기자신의 공부실력에 한없이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은 어쨌든 지나가고 결국 최후까지 남아있는 것은 자신의 수행력 뿐입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생을 마치면서 후회를 했겠지만, 마음공부로 참 자유를 얻은 수행자는 자기 인생이 헛되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지닌 신체적 물질적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고, 정말 값진 수행을 통해서 인생을 뜻있게 살아야겠습니다. 인생은 아무리 길다해도 지나고 보면 모두 뜬구름 같이 허망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52. 어디서나 무심하면 해탈이다
“만약 일체 모든 행을 닦아서 구족하여 성취하면 수기(受記)를 얻을 수 있습니까?”
“얻을 수 없다.”
“만약 일체의 법을 닦지 않고 성취하면 수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얻을 수 없다.”
問 若有修一切諸行 具足成就 得受記否
答 不得
問 若以一切法無修 得成就 得受記否
答 不得
수기(受記)란 부처님으로부터 ‘너는 내생에 부처가 되리라’고 미리 기록(예언)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수기를 얻는다는 것은 곧 다음 생에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대주 스님은 모든 행을 닦아서 구족하더라도 수기를 얻을 수 없고, 또한 닦지 않고 성취해도 수기를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교학(敎學)으로 보자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일체의 행을 닦아 모두 갖추어서 성취했으면 당연히 수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얻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여기에서 오직 수행인의 체험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선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럼 이럴 때는 마땅히 무슨 법이라야 수기를 얻을 수 있습니까?”
“행 있음으로써도 아니고 또한 행 없음으로써도 아니어야 곧 수기를 얻는다. 왜냐하면 유마경에 이르기를 ‘모든 행의 근본 모습[諸行性相]은 모두 다 무상(無常)하다’고 하였고, 열반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이 가섭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행이 항상 같으면[諸行是常] 옳은 곳이 없다」’고 하셨다. 그대는 다만 어느 곳에서나 무심하면 곧 모든 행이 없고, 또한 행이 없음도 없는 것이라, 곧 수기라고 한다.
問 若恁麽時 當以何法而得受記
答 不以有行 亦不以無行 卽得受記 何以故 維摩經云 諸行性相 悉皆無常 涅槃經云 佛告迦葉 諸行是常 無有是處 汝但一切處無心 卽無諸行 亦無無行 卽名受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수기를 얻을 수 있겠느냐, 대주 스님은 ‘행 있음’도 아니고 ‘행 없음’도 아니어야 수기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행을 한다거나 안 한다거나 하는 뜻이 아닙니다.
‘행 있음’이란 행을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써, 그 행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행 없음’이란 행을 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그 행을 하지 않는 것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행을 하든, 안 하든 그것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이것은 경계에 끌린 마음이고 성품에서 저절로 나타나는 공적영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이 있음으로써도 아니고 행이 없음으로써도 아니다’는 말은, 행 있음은 물론이고 행 없음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금강경의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유마경에 ‘모든 행의 근본 모습[諸行性相]은 모두 다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행이란 그 속에 언제나 변치 않고 한결같은 성질이 없이 항상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작용이나 우주만유의 작용은 모두 단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고 생주이멸(生住異滅)로써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행이라는 것은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모든 행이 항상 같으면 옳은 곳이 없다’고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주만유가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있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諸行無常]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諸行無常 諸法無我 涅槃寂靜) 가운데 하나인데, 만약 우주만유가 늘 그대로 머물러서 한결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뜻입니다.
가령 우리의 몸이 언제나 똑 같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생로병사와 무관하다는 뜻이니, 물질로 구성된 우리의 몸으로써는 이치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대주 스님은 어느 곳에서나 무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되면 곧 모든 행도 없고 또한 행이 없음도 없는 것이라, 이것이 바로 수기(受記)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수기란 앞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뜻하니, 어느 곳에서나 무심하여 행함도 없고 행하지 않는 바도 없으면 그야말로 함이 없는[無爲] 부처의 행이므로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렇게만 한다면 내생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당장 부처의 지위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어느 곳에서나 무심하다는 것은 증애(憎愛)의 마음이 없다는 것이니, 증애의 마음이 [없음이]란, 좋은 일을 보아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을 곧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고, 나쁜 일을 보아도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을 곧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사랑함이 없음이란 곧 물든 마음이 없음을 이름이니, 곧 색의 성품이 공함이다. 색의 성품이 공함이란 곧 만 가지 인연[萬緣]이 다 끊어짐이요, 만 가지 인연이 다 끊어진다는 것은 자연 해탈이다.
所言一切處無心者 無憎愛心 是 言憎愛者 見好事 不起愛心 卽名無愛心也 見惡事 亦不起憎心 卽名無憎心也 無愛者 卽名無染心 卽是色性空也 色性空者 卽是萬緣俱絶 萬緣俱絶者 自然解脫
‘일체처(一切處)에 무심’이란 바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 없다는 것은 이렇게 무심의 본질로써, 그대로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도(道)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선종의 3대 조사인 승찬 스님이 지은 신심명(信心銘)은 그 첫 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 즉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리는 것[揀擇]을 꺼릴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툭 트여 명백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미움이 있으면 이른바 물든 마음으로써, 이 마음이 없어야 무심이며 무심은 곧 ‘색의 성품이 공함’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도 나왔지만 이러한 말들은 머릿속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불자라면 반드시 화두를 참구하거나 또는 일체의 망념과 분별주착을 놓는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 체험으로써 증명해야합니다.
‘물질의 본성이 공하다’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대승불교의 교리지만, 이것을 깨친 것과 깨치지 못한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깨치지 못하면 그밖에 다른 가르침도 그 본질을 몰라서 매양 스스로 의심이 가라앉지 않고, 이것을 깨치면 일체의 법문이 그 근본은 하나라는 것을 알아서 저절로 모든 의심이 사라져버립니다.
이렇게 색즉시공(色卽是空)을 바르게 깨쳐서 얻으면, 중생의 마음 가운데 얽혀있는 모든 속박이 스스로 사라지고, 저절로 자신의 본성에 갖추어진 해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만 가지 인연이 다 끊어져 자연 해탈이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대는 이것을 자세히 보아서 만약 뚜렷하고 분명히 알지 못할 때엔 조속히 물어야만 할 것이니, 헛되게 세월을 보내지 말라. 그대들이 만약 이 가르침에 의지해 닦는데도 해탈하지 못한다면 내가 곧 종신토록 그대들을 위해 큰 지옥의 고통을 받을 것이며, 내가 만약 그대들을 속인 사람이면 나는 마땅히 태어나는 곳마다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의 밥이 될 것이다. 그대가 만약 이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부지런히 닦지 않는다면 내가 알 바 아니다.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다시 돌이킬 수 없나니 노력하고 노력해서 이것을 확실히 체득해야만 한다.”
汝細看之 若未惺惺了時 卽須早問 勿使空度 汝等 若依此敎修 不解脫者 吾卽終身爲汝受大地獄 吾若誑汝者 吾當所生處 爲師子虎狼所食 汝若不依敎 自不勤修 卽不知也 一失人身 萬劫不復 努力努力 須合知爾
자, 이제 마지막으로 대주 스님은 위와 같은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단지 불법을 널리 공부하였다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했다고 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고, 앞서 말한 내용에 대하여 스스로 그 경지를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대주 스님은 ‘단박에 깨쳐서 도(道)에 들어가는 긴요한 문(門)’을 설해주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쉽고 간결하게 전해주는 조사의 가르침을 접하고도 마음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끝없이 이어지는 미래의 고통으로부터 결국 벗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금생에 이렇게 사람의 몸을 받아 소중한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만났을 때 허망한 세상욕심에 마음을 쓰지 말고 어서 정진합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