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의 휴휴암좌선문 24 (完)
얻은 바가 있으면 구경(究竟)이 아니다
豈同邪魔外道 - 以傳授로 爲師佐하고 以有所得으로 爲究竟者哉아
(어찌 사마외도가 ‘전해주는 것’으로써 스승과 제자를 삼고
‘얻은 바 있는 것’으로써 구경을 삼는 것과 같겠는가?)
휴휴암좌선문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퍽 의미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위 구절에서 사마외도가 ‘전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름이나 형상이 있는 것’ 또는 ‘뭔가 실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언어명상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을 전해주고 또 전해받음으로써 스승과 제자를 삼는다는 것입니다.
학문이나 기술 같은 것들은 배우고 가르칠 수가 있어서, 당연히 그것을 전해주는 이가 스승이고 받는 사람은 제자가 됩니다.
하지만 도가(道家)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가에도 물론 스승과 제자가 있으나 ‘수행의 대상’은 도(道), 즉 법(진리)이기 때문에, 실로 이름과 모양이 없고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어서 아무도 전하고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말로써 이를 수도 없고 생각으로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니, 이를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또 받는다고 하면 그건 삿된 마구니의 무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법(法)’의 본질을 바르게 알지 못하고, 유형(有形)의 교리나 유위(有爲)의 가르침을 전하고 받는 것을 가지고는 ‘법을 전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찍이 ‘교외별전’ ‘불립문자’와 같은 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얻은 바가 있음’으로써 구경(究竟)을 삼는 것도 사마외도라 하였습니다.
만약 수행의 대상이 기술이나 학문 같은 것이라면 물론 ‘얻는 바’가 있는 게 당연하겠지만, 자신의 진여자성을 보아 참 도를 깨치는 일은, 그 무엇이 되었든지 결코 얻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진여자성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들어설 수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여래께서 설하실 수 있는 정(定)한 법이 없다[無有定法如來可說]’는 말씀은, 이처럼 법(진리)이라는 것은 텅 비었기 때문에 그 어떤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보일 수도, 전할 수도, 그 자리를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불보살들조차 영원토록 ‘얻을 수’가 없는 것이며, 그렇다고 또한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수행을 통해서 ‘뭔가’를 얻었다고 하고, 또한 그것으로 구경을 삼는다면, 그러한 것은 불법[진리]도 아닐 뿐더러 올바른 깨침도 아닙니다. 수행인이 만약 이것을 잘못 알았다가는 곧장 외도(外道)에 빠질 것입니다.
이것으로 휴휴암좌선문의 대략적인 해설을 마쳤습니다.
결국 이 좌선문의 정수(精髓)는 각자가 내면의 수행을 통해 만나야하는 것으로, 말과 글로써는 그 실다운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적 수행으로써 정전 <일원상의 수행>에 정확히 부합하는 ‘무시선법’이 있으며, 이 수행의 결과는 이 좌선문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삼학병진’의 공부법으로써 ‘동정일여’와 ‘사반공배’의 공부인 무시선법을 따라, 다 같이 진리공부의 길에서 함께 만나기를 바라며 글을 맺습니다.
라도현
첫댓글 감사합나다. 합장
감사합니다. 합장
휴휴암좌선문 휼륭한 강설
감사합니다 ^ ^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