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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태균 | | ■ <제5공화국>은 한쪽 얘기만 들려 주는 ‘편파 드라마’ ■ 보안사 조사실에서 만난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 ■ 군 동원 계획조차 없었던 김재규의 ‘혁명 구상’ ■ 김재규는 대통령 시해 조작 가능하다고 믿어 ■ 10·26 당일 최규하 총리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 정승화 총장 조사 불가피했다 ■ 최규하 대통령 하야 강요는 ‘웃기는 얘기’ ■ 일본 내각조사실이 알려온 ‘북한군 이상 동향’ 정보 ■ 내가 나서서 취소시킨 1980년 2월 ‘전두환-김대중 회동’ ■ 광주사태는 전두환·5공화국과는 무관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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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무더위 속에 ‘5공화국 논란’이 뜨겁다. 역사의 시곗바늘을 20여 년 전으로 돌려놓은 5공 논란의 기폭제는 지난 5월부터 방영되고 있는 MBC TV의 정치드라마 <제5공화국>이다. 매주 토·일요일 저녁에 방영되는 이 드라마는 첫 방송 때부터 장안의 화제가 됐다. 대머리를 공개한 탤런트 이덕화의 ‘전두환 연기’가 화제를 모으면서 ‘전사모’(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등장할 정도였다. 최근대사를 다룬다는 점에서 중·장년 남성 시청자들의 호응도 컸다.
하지만 드라마상의 시점이 12·12사태와 5·18 광주항쟁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양상은 달라졌다. ‘학살’ ‘쿠데타’ ‘전두환비자금’ 등으로 상징되는 5공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
李鶴捧… 1938 경남 김해 출생, 경남고·육군사관학교 졸업(18기) 1977 보안사 대공수사과장 1980 보안사 대공처장·합동수사본부 수사단장 1980 육군 준장 예편 1980 대통령 민정수석비서관 1986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 1988 민주정의당 국책조정위원회 위원 1988 제13대 국회의원(민정당·김해) 1992 민자당 국회의원(당명 변경) 1992 무소속 국회의원(민자당 탈당) | |
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 시민들이 엑스트라로 참여한 가운데 촬영한 광주항쟁 장면이 방영된 6월 중순 들어서는 특히 인터넷상의 논란이 뜨거워지는 모습이다.
브라운관에서 불붙기 시작한 5공 논란이 곤혹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주말 저녁 황금시간대에 전파를 타는 드라마 속에서 20여 년 전의 자신을 발견하는 ‘5공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는 오랜 세월 세인의 관심권 밖에서 조용히 세상을 관조하며 지내온 사람도 적지 않다. 10·26 직후 출범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합수부)의 수사국장을 맡았던 이학봉(李鶴捧·67) 전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12·12사태로 체포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 대한 수사를 지휘한 인물. 5공화국 출범 후에는 대통령 민정수석과 안기부 2차장을 지냈다. 13대 국회의원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친 뒤 1995년 말에 있었던 ‘역사 바로세우기’ 수사 때 구속돼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 뒤로는 공식 직함 없이 스스로 잊힌 삶을 자처했다. 언론과 만나는 것도 꺼렸다.
연극배우 출신인 이재용 씨가 그리는 드라마 속의 이학봉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행동파다. 조작과 회유도 서슴지 않는 강성 인물로 묘사될 때도 많다. 10년 여 동안 조용히 지내온 그도 드라마가 미칠 파장을 나름대로 우려했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방송사 측에 연락해 공정한 제작을 요청하는가 하면 다른 5공 인사들과 함께 정식 의견서를 보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5공이 드라마화된 데 대한 그의 소회는 어떠할까? 또 드라마가 묘사하는 상황은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하는 것일까. 10·26과 12·12사태, 5·18 등 ‘5공 태동기’에 벌어졌던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지난 6월9일 오후 서울 역삼동에 있는 작은 사무실로 찾아가 그를 만났다. 인터뷰의 첫 화두로는 아무래도 드라마 <제5공화국>이 적당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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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에서 이학봉 전 의원 역할을 맡고 있는 연극배우 이재용씨. | |
-드라마는 자주 보십니까?
“다른 일이 있어 못 볼 때도 있지만, 대체로 봅니다.”
-어떤 느낌이 듭니까?
“명색이 대통령을 지낸 분들을 그렇게까지 희화화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유권자의 심판을 받은 국회의원 출신들도 엉뚱한 캐릭터로 묘사하고 말이죠. 관계자가 생존해 있는 사안을 다룰 때는 두루 이야기를 듣고 객관적 사실을 담아야 하는데, 이 드라마는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책임감과 진지함이 결여된 불공정 드라마죠.”
-MBC는 ‘12·12와 5·18 재판 결과를 근거로 제작하고 있다’는 입장 아닙니까?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검찰은 1995년 7월의 수사 때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정권은 ‘일사부재리’라는 사법의 기본 원칙을 깨면서 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만들었습니다. 어떻게든 관련자들을 처벌하라는 지침이 내려진 상태에서 수사가 재개됐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MBC가 말하는 재판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수사와 재판이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이야기해 줘야 하는데, 드라마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잖습니까?”
-당시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린 데는 다른 사람도 아닌 몇몇 신군부 인사들의 증언이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과정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보안사 정보처장을 맡아 검찰의 잣대라면 ‘중요 임무 종사자’였던 권정달 씨는 형사입건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시국수습 방안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작성된 집권 시나리오였다’는 식으로 허위진술한 것 아닙니까? 무슨 회유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신군부 인사들을 배신한 것이죠.”
-12·12 이후 국방장관을 지낸 주영복 씨, 계엄사령관을 지낸 이희성 씨 등도 다른 신군부 인사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는데요.
“검찰은 다른 사람은 다 구속하면서도 그 두 사람만은 불구속 상태로 조사했습니다. 두 사람도 사실과 다른 증언을 했는데, 대법원 확정판결 후 결국 구속되고 말았죠. 우리는 좀더 당당하기를 바랐는데…. 그 사람들은 국가로부터 농락당한 셈이죠. 인생이 참 서글펐을 겁니다.”
이 전 의원은 “방송사 측이 우리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다면 재판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러한 정황만이라도 언급해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며 불만을 표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제5공화국> 방영 전 ‘공정한 제작’을 요청하기 위해 드라마 제작진을 만난 사실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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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제5공화국>이 재연한 박 대통령 시해 장면. 김재규(김형일 역)가 박 대통령(이창환 역)을 쏘고 있다. | |
“어차피 10·26과 12·12를 다룰 것이라면 사건 전체를 가장 잘 아는 나 한 사람만이라도 만나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을 전해 작가와 제작 책임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만남은 별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의원은 “5공화국을 좋게 그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해 객관적으로 다뤄 달라는 뜻을 전했다”면서 “하지만 제작진이 번거롭고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더 이야기를 진전시킬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후 5공 인사들은 “12·12사태는 군사 쿠데타가 아니었다”는 등의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MBC 측에 제출했다. 드라마의 전개 과정을 지켜보면서 명예훼손 등에 대해서는 추가로 대응하겠다는 것이 5공 인사들의 입장이다. 이 전 의원은 드라마와 관련된 법률 검토는 법무법인 세종이 맡고 있다고 전했다.
경남 김해 출신인 이 전 의원은 경남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18기)를 거쳤다. <제5공화국>에서 자신과 함께 ‘보안사 3인방’으로 묘사되는 허화평·허삼수 두 전직 의원의 육사 1년 후배다. 육사를 졸업하고 동해안에 있는 모 부대에서 장교생활을 시작한 그는 21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있던 1967년 보안사령부(보안사: 지금의 기무사령부)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윤필용 당시 보안사령관이 육사 기수별로 몇 명씩의 청년장교를 점찍어 보안사 근무 명령을 낸 것이었다. 보안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대공수사계장을 6년이나 맡을 정도로 대공 분야에서 입지를 굳혀 갔다.
“내일이면 다 잡혀갈 놈들이 나를 조사해?”
청년장교 이학봉은 보안사 대공수사계장으로 근무하던 1969년 청와대 외곽 경비를 담당하는 30경비단 단장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게 된다. 기수별 육사 출신들이 사적으로 만나는 ‘하나회’ 모임을 통해서였다.
10년이 더 지난 1979년 3월, 1사단장으로 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보안사령관이 되면서 두 사람은 업무상의 상하관계로 만난다. 이 전 의원은 전방의 보안부대장 등을 맡아 잠시 보안사를 떠나 있다 1976년에 복귀해 대공수사과장을 맡고 있었다.
그로부터 7개월이 더 지나 10·26이 발생한다. 유신체제의 종말을 알린 10·26은 훗날 ‘신군부’ 또는 ‘5공 인사들’로 불리는 사람들의 운명이 격랑 속으로 빠져드는 계기이기도 했다.
-10·26 이후의 언론 보도 등을 보면 이 의원의 직함이 여러 개로 나옵니다. 그 무렵 정확한 직함이 무엇이었습니까?
“10·26이 일어났을 때는 보안사 대공수사과장이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한 합동수사본부(합수부)가 발족하면서 합수부 수사국장을 맡았습니다. 1980년 1월 제가 보안사 대공처장으로 진급하면서 합수부에서의 직함이 수사단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직함이 바뀌었지만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책임자라는 직책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 시해 소식은 언제 접했습니까?
“사건이 일어난 그날 저는 업무차 부산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저녁 9시가 다 돼 갈 때 ‘최대한 빠른 방법으로 사령부로 올라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김해비행장으로 가서 공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서울공항을 통해 27일 새벽 1시가 넘어 사령부에 도착했죠. 공항에서 기다리던 운전병이 박 대통령이 시해된 것 같다는 보고를 하더군요.”
-수사국장으로서 김재규 부장을 직접 조사했습니까?
“수사 전 과정을 제가 지휘했고, 직접 대화도 많이 했습니다. 부산에서 급히 상경해 사령부에 도착해 보니 우리 요원들에 의해 체포된 김재규가 조사실에 있더군요. 모니터로 조사실의 김재규를 보니 참 가관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일 새벽이면 새 세상이 와서 다 잡혀갈 놈들이 나를 조사한다고 이러느냐’며 호통치고 있었습니다. 보안사로 연행돼 온 뒤로 김재규는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게 해주면 이야기하겠다’며 진술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이거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가 직접 조사실로 갔습니다. 10월27일 새벽 4시가 다 됐을 때였습니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할 때 제가 대공수사계장을 맡았고, 사령관이 국방장관이나 참모총장에게 보고할 때 수행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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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1980년 5월24일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장으로 향하고 있다. | |
-김재규가 알아보던가요?
“제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얼굴은 알아보더군요. 조사실로 들어서면서 ‘제가 수사 책임자입니다’라고 했더니 ‘자네 이군 아닌가’하더군요. 그러면서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 자네를 만나자고 할 걸 그랬네’라는 말도 했습니다.”
-체포된 상태의 김재규가 전두환 사령관을 만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김재규는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전 사령관을 만나 같이 혁명해야 한다’며 ‘이 이야기를 꼭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전 사령관에게 이야기를 전했습니까?
“보고는 했지요. 하지만 전 사령관이 김재규를 만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대통령을 시해한 혐의로 붙잡혀온 사람이 보안사령관과 혁명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김재규는 왜 박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하던가요?
“1979년 들어서부터 정국상황을 놓고 많은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야당과 미국에 대해 조금만 유화적으로 나가도 국정이 원만하게 돌아갈 수 있었지만, 강경책을 고집하면 1980년 봄을 넘기기 어렵다’는 판단도 했다고 합디다.
‘그렇다면 4·19 같은 사태를 막으면서 국가를 존속시키는 방법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했고, 그 과정에서 박 대통령을 이대로 두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는 ‘혁명위원회를 구성하면 어떤 사람들을 선임하고 경제정책이나 대미관계는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직접 쏜다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저도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수사관들을 내보내고 ‘허심탄회하게 한번 이야기해 보시라’며 물어보았어요. ‘평생 동지이자 은인이기도 한 대통령을 그렇게 시해한 경우는 우리 역사에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느냐’고 했더니 ‘나는 방법이 없었네’라고 하더라고요. ‘대통령을 시해한 도덕적 책임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랬느냐’고도 물어보았어요.”
-김재규 부장이 뭐라던가요?
“‘그 문제는 은폐할 수도 있고 밝힐 수도 있다. 그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사건 전모가 밝혀지기 전에 계엄령이 선포되면 자신이 상황을 장악할 것이고, 그렇게만 되면 시해사건의 진상도 얼마든지 은폐하거나 조작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은폐나 조작할 생각이었다고 하던가요?
“제가 우선 떠올려 본 시나리오는 차지철이 박 대통령을 시해한 것으로 꾸미는 것이었습니다. ‘차지철이 권력을 찬탈할 생각으로 박 대통령을 쏜 직후 내 총에 맞아 숨졌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만찬장에 있던 몇 사람만 윽박지르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죠.”
-김재규가 실제로 그런 시나리오를 염두에 뒀다고 하던가요?
“‘그런 식으로 진상을 조작하려 했던 것 아닙니까’라고 물었더니 김재규는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있지 않겠느냐’면서도 ‘그 부분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대통령을 시해하고 계엄령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고, 계엄령 하에서 자기가 상황을 장악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죠. 그 다음에 전개되는 상황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는 식이었죠. 김재규의 이야기에는 허술한 데가 참 많았습니다.”
-허술했다고 느낀 점이 또 어떤 것이 있나요?
“혁명을 하겠다면서 군 동원 계획을 전혀 세워놓지 않은 점입니다. 김재규는 ‘군 동원 계획을 미리 세울 필요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자신과 같은 경북 출신인데다 수도권의 주요 부대를 지휘하는 이건영 3군사령관은 자신의 직속 부하인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있었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일단 일을 벌인 뒤 이야기만 하면 다들 자기 편이 될 것으로 믿었다는 뜻이죠. 군 동원 계획을 미리 세웠다가는 보안 유지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하더군요.”
허술한 구석 많았던 김재규의 ‘혁명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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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봉 전 의원이 1995년 12·12 사태 등과 관련해 검찰의 수사를 받고 나서 기자들과 얘기하고 있다. | |
이학봉 전 의원은 김재규가 ‘혁명 성공’을 믿었던 배경이 또 있었다고 말했다. ‘중앙정보부장의 한마디면 다 통한다’는 확신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재규가 그린 그러한 상황은 박 대통령의 후광을 등에 업었을 때의 이야기였을 뿐이라는 것이 이 전 의원의 분석이다.
이 전 의원은 “박 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도 중앙정보부장의 위세가 여전할 것으로 믿은 것이 김재규의 첫번째 착각이었다”면서 “그러한 착각만 하지 않았어도 김재규는 ‘혁명 성공’을 위해 더욱 치밀한 계획을 꾸몄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을 시해한 후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함께 육군본부 벙커로 향할 때부터 “계엄령부터 선포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국방부 회의실에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장관은 ‘박 대통령의 상태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엄령을 선포할 수는 없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학봉 전 의원은 이 대목을 상기시키면서 “김재규는 평소 자기 앞에서 꼼짝 못하던 장관들이 대놓고 자기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상당한 혼란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재규 부장이 수사에는 협조적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대통령을 시해한 범죄사실이 워낙 명확했고, 무엇을 둘러대거나 은폐할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순순히 진술했습니다. 저도 ‘불편한 것이 없도록 해드리겠다’고 했고 김 부장도 ‘이군, 고맙소’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드라마에는 합수부 수사관들이 김재규를 고문하는 듯한 장면이 나오던데요?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수사하는 과정에서 윽박지르는 경우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신체적으로 무슨 위협을 가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 김재규는 당뇨와 간경화 증세가 있었고 심장도 나빴습니다. 그런 사람을 고문하다 죽이기라도 하면 수사진이 어떤 책임을 추궁당할지 모르잖습니까? 김재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저와 이야기를 많이 했고 수사에도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가혹행위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나눈 대화 가운데 기억나는 부분이 있다면….
“한번은 제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동지이자 은인이면서 상사이기도 했던 분을 확인사살까지 할 용기가 있었다면 김 부장도 그 자리에서 머리에 총을 쏘고 자결했어야 옳지 않으냐’는 것이었죠. ‘지금 김 부장이 주장하는 혁명의 취지를 담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더라면 훗날 그 유서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대헌장으로 읽혔을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했고요.”
-김재규의 반응이 어떻던가요?
“제 말을 듣고 나서 ‘그때는 내 꿈이 그것보다는 컸다’고 하더군요.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잡고 싶었고, 자신이 국정을 맡으면 박 대통령보다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김재규가 박 대통령을 시해한 데는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 부분도 조사했습니까?
“미국과의 교감이니 뭐니 하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드라마는 미국이 김재규를 부추기거나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것처럼 묘사하더군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김재규가 미국 대사관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에 있었던 중앙정보부 통역관까지 면밀히 조사했지만 김재규와 미국의 교감 운운할 만한 정황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최근 일부 인사들이 “김재규를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운동을 한다는 무슨 위원회 사람이 전화를 해온 적이 있습니다. 저는 ‘김재규라는 사람은 민주화의 ‘민’자도 개념도 없던 사람이다. 국가원수를 시해한 사람을 민주화운동을 한 것으로 평가하면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러니 더 이상 김재규를 놓고 민주화라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아 달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어 버렸죠.”
-최근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학봉 전 의원도 면담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국정원 측이 어떤 내용을 묻던가요?
“전두환 전 대통령께는 ‘실종 직전의 김형욱을 만난 이상렬 당시 주 프랑스 공사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던 모양입니다. 전 전 대통령이 1980년 4월부터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했잖습니까? 그러니 이상렬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상관이 된 전 전 대통령을 찾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죠. 전 전 대통령이 ‘나는 그 사람을 만난 기억이 전혀 없다’면서 ‘그 무렵의 상황은 이학봉 씨가 잘 아니 정 궁금하면 만나서 확인해 보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국정원의 국장급 간부가 만나 뵙고 싶다며 연락해 왔더군요.”
-그 간부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서울 시내의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똑같은 질문을 하기에 ‘그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김재규를 수사하면서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느냐는 질문도 하더군요.”
-당시 합수부에서는 그와 관련된 조사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국정원이 주장하는 대로 김재규가 지시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논란이 일거나 다른 무슨 소문이라도 있었다면 당연히 그 문제를 조사했겠죠. 하지만 합수부가 김재규를 조사할 때는 김형욱이라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거든요. 국정원 간부와의 대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국정원 측이 중간 조사결과에 무게를 싣기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조사했다’는 명분을 쌓으려고 그랬던 것 아닌가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로 김재규가 김형욱 살해를 지시했을 것으로 보십니까?
“저도 그 점이 참 궁금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판단을 내릴 자료도 없지만, 자기가 지시해 김형욱을 살해했다면 비록 수사관들이 묻지 않더라도 김재규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해봅니다. 김형욱이 실종된 것이 10·26이 일어나기 불과 보름 전 아닙니까? 어차피 사형을 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김재규인데, 그렇다면 ‘이런 일도 있었다’면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재규는 합수부에서 20일 가까이 조사받으며 저와 많은 대화를 나눌 때는 물론 재판이나 변호사 면담 때도 김형욱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10·26 직후 합수부가 청와대를 조사하다 박 대통령 금고에서 9억 원이 넘는 돈을 찾아냈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금고는 김계원 비서실장실에 있었는데, 9억5,000만 원이 들어있더군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돈의 성격상 압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박근혜 씨한테 줬죠.”
-합수부 수사경비로 쓰기 위해 3억 원을 떼고 나머지만 줬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그건 아닙니다. 전액을 박근혜 씨한테 넘겼는데, 그 뒤에 박근혜 씨가 ‘아버지 사건 수사하는 데 써 달라’며 전두환 사령관 비서실장한테 3억 원을 갖고 왔죠. 2억 원은 계엄사령부 운영비로 쓰라고 정승화 총장한테 줬고, 5,000만 원은 국방장관 앞으로, 나머지 5,000만 원이 합수부 앞으로 전달된 것으로 압니다.”
이 전 의원이 수사단장으로 참여했던 합수부는 10·26 발발 직후부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조사를 추진했다. 하지만 계엄사령관에 오른 정 총장을 조사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참모총장 공관으로 찾아가 정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는 합수부 측과 참모총장 측이 총격전을 벌이는 사태도 발생했다. 10·26이 발발한 지 50일이 채 안 돼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한 양측의 입장은 지금도 평행선을 긋고 있다.
합수부 편에 섰던 사람들은 정승화 총장 연행은 “김재규와의 공모 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정당한 직무 수행”이었다고 주장한다. 정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총격전은 “직무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우발적 사건”이라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정승화 총장 편에 섰던 인사들과 검찰의 입장은 다르다. 이들은 12·12를 “군사반란이자 하극상”으로 규정했다. 검찰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 체포에 대한 재가를 강요하고 상관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병력을 동원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학봉 전 의원은 이날 인터뷰에서도 “정승화 총장에 대한 조사는 불가피했다”며 “12·12는 정 총장이 순순히 조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우발적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0·26 당일 정부와 군의 책임 있는 사람들이 임무에 충실했더라면 박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가 합수부로 넘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그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한 채 석연찮은 행동을 한 사람에는 정승화 총장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10·26 당일 최규하 총리의 ‘실망스러운 행동’
-임무에 충실하지 못했던 사람들 때문에 시해사건 수사에 차질이 있었다는 뜻인가요?
“대통령 시해라는 위기상황 속에서 전개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많았다는 것이죠.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날 대통령 시해사건의 진상을 가장 신속히 규명할 수 있었던 사람은 최규하 총리였습니다.
최 총리는 시해사건 발발 직후인 저녁 8시50분께 김계원 비서실장한테서 ‘김재규 부장이 차지철 실장과 말다툼을 하다 잘못 쏜 총탄에 대통령께서 돌아가셨다’라는 보고를 받습니다. 이것만으로도 6하원칙 중 ‘누가·언제·어디서·무엇을’이라는 4가지가 밝혀진 것 아닙니까. ‘왜·어떻게’라는 나머지 두 가지만 확인하면 대통령 시해사건의 진상은 그 자리에서 밝혀지는 것이죠.”
-최규하 총리가 진상을 규명할 책임이 있었다는 뜻인가요?
“정말 용기 있고 책임감이 있었다면 김계원 비서실장을 추궁했어야죠. 총리실이나 청와대에 확고히 진을 치고 국무위원들 다 모이라고 한 뒤 경호실 병력으로 하여금 사건 현장부터 장악하도록 했어야죠. 바로 대통령의 시신을 확인하고 범인을 신속히 체포하도록 해야 옳지 않습니까? 이치가 그러함에도 헌법 규정상 대통령 권한대행이 될 사람이 범인이 체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범인이 기다리고 있는 육군본부 벙커로 갔다 다시 국방부 회의실로 옮기는 등 도무지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10·26 당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 또 있습니까?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최규하 총리 못지않게 책임이 큰 사람이 이재전 경호실 차장이었습니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최 총리에게 보고한 것과 비슷한 시간에 이 차장에게 ‘대통령이 유고이고 경호실장도 유고이니 당신이 경호실장 대행을 해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경호실 병력의 외부 출입을 통제하고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고 합니다.”
-그 뒤의 이재전 차장의 행동에 문제가 많았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경호실은 오로지 대통령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입니다. 당연히 대통령 유고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병력을 풀어 대통령의 상태부터 확인하고 누가 대통령을 해쳤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경호실 차장이라는 사람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었잖습니까? 경호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이튿날 아침 6시가 돼서 ‘아버지 시신이라도 수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박근혜 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습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정승화 총장의 행적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했습니까?
“정 총장은 시해사건 현장 바로 옆에 있었고, 총성까지 들었습니다. 총성이 울린 직후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한 김재규로부터 박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정 총장은 ‘내부 소행이냐, 외부 소행이냐’고 묻고 김재규는 ‘내부 소행’이라고 답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정황만으로도 대통령 시해범은 차지철 아니면 김재규라는 판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상황에서도 정 총장은 유력한 대통령 시해 혐의자와 함께 한동안 의심받기 충분한 행동을 합니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김재규와 함께 육군본부에 도착한 정 총장은 전방 주요 부대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수도경비사령관한테 전화를 겁니다. 사령관이 이상 없다고 하자 ‘지금 육군본부로 오라’고 합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대통령과 경호실장만 지휘 권한을 갖는 청와대 경비사령부였습니다. 차지철이 대통령을 시해하고 쿠데타를 도모했다면 끌어들일 병력은 수도경비사령부뿐입니다. 그런데 이 부대가 이상이 없다는 것은 차지철이 범인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거든요. 그렇다면 김재규가 범인일 가능성이 더욱 확연해졌는데도 정 총장은 그 뒤에도 김재규를 편드는 듯한 행동을 계속합니다.”
-구체적으로 정 총장의 어떤 행동을 말씀하십니까?
“우선 지휘권이 없는 부대를 지휘한 월권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청와대를 포위하라’는 지시를 내립니다. 그와 동시에 이재전 경호실 차장한테 전화를 걸어 김계원 실장이 한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병력을 이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차지철이 범인일 것으로 착각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백번 양보해 그렇다 쳐도 지휘 권한이 없는 부대에 명령을 내린 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이죠. 그리고 제대로 된 지휘관이라면 경호실 차장한테는 ‘전후방 부대는 내가 단단히 단속해 두었으니 당신은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대통령 시신부터 확인하고 범인을 신속히 체포하라’고 하는 것이 맞죠. 정 총장은 김재규와 어떤 병력을 출동시킬 것인지를 논의하고서는 9공수여단은 육군본부로, 양평의 20사단은 태릉 부근으로 출동하라는 지시까지 내립니다. 국방장관한테는 보고하지도 않았죠. 나중에 이게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다시 부대 이동을 취소하는 명령도 내렸고요.”
이학봉 전 의원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정황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짧은 기간 김재규에게 협력한 측면이 많았다”면서 “따라서 수사 실무진은 정 총장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두환 합수본부장은 정 총장 조사를 망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10월27일 오전 11시쯤 시해사건과 관련된 최초의 서류보고를 하면서 전 본부장에게 정 총장 조사의 필요성을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전 본부장은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된 지 이제 몇 시간 지났다고 그러느냐’며 ‘좀 더 알아보라’고 하더군요. 그 뒤로도 세 차례나 더 비슷한 보고를 했지만 거듭 부정적인 입장이더군요. 저는 수사 책임자 입장만 내세웠지만 전 본부장은 수도권의 주요 부대 지휘관들이 모두 정승화 총장과 가깝다는 점 등을 두루 고려했던 것 같아요. 섣불리 수사를 시도하다가는 역풍이 오기 십상이라는 판단 말이죠.”
-그렇다면 정승화 총장에 대한 조사 결정은 언제 내려졌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정황을 근거로 합수부는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직무유기로 구속했습니다. 그런데 사법 관할권이 있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이 차장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리더군요. 이 차장이 재판에 회부되면 10·26 당일 자신이 수경사 병력이 청와대를 포위하도록 하고 경호실 병력 이동을 차단한 것 등이 논란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한 부담 때문이었던지 12월5일 이재전 씨를 불기소 처분하더군요.”
“최규하 대통령한테 재가 강요한 적 없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계엄사령관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달리 무슨 방도가 있습니까? 다음날인 12월6일 합수본부장한테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러다 김재규도 사형이 아닌 무기로 감형해 버리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럽니까’라고 물었죠. 전두환 본부장도 그 말을 듣고는 생각을 바꾼 것 같아요. 그날 정 총장에 대한 조사 지시가 내려졌거든요.”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 총장을 체포한 것도 논란이 됐는데요.
“보안사령관이 그 정도 사안을 갖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러 가면 대통령은 당연히 재가하는 것이 역대 정부의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최 대통령이 재가를 미루는 바람에 논란의 여지가 남게 된 겁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 총장을 연행하는 그 시점에서 대통령 재가를 얻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예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일을 추진한 것처럼 호도하면 안 됩니다.”
-검찰은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 “대통령의 재가를 강요했다”고 밝혔는데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 총장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거듭 설명한 것이지,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시의 합수부 측이 대통령에게 무엇을 강요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나중에는 최 대통령의 하야를 강요했다는 말도 나오던데, 정말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군인 몇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합니까? 사람을 욕하더라도 앞뒤는 맞춰가면서 해야죠.”
-드라마에는 이 전 의원이 수감된 정승화 총장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는 장면이 나오던데요?
“당치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할 이유도 없었고요. 제가 무슨 일 때문에 출장을 다녀오다 육군교도소로 찾아가 정 총장을 만난 일은 있습니다. 어떻게 지내나 싶어 찾아간 것이죠. 불편한 점은 없는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왔습니다. 그러다 정 총장에 대한 재판이 열리기 전날 또 보자고 한다기에 가서 만났죠. 그날 정 총장은 ‘군 검찰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할 테니 재판에서 나를 봐줄 수 없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답했습니까?
“봐 주고 안 봐주고 할 상황이 아니라고 했죠. ‘군 검찰도 준비를 다 마쳤으니 총장께서도 최대한 유리한 결과를 얻도록 자기 변호를 하시라’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드라마에는 제가 ‘7개월 후면 풀어주겠다’거나 ‘세상이 바뀌어 보안사령관이 대통령보다 더 높아졌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한 것으로 나오더군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른바 ‘5공 신군부’는 10·26 이후 시간이 갈수록 역사에 깊이 발을 담그게 된다. 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었다고 하나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련의 사태는 훗날 군사 쿠데타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1980년으로 들어서면서 신군부 인사들이 더 깊이 역사 속으로 빠져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5·17 비상계엄 확대와 그 직후 발생한 5·18 광주항쟁이다.
드라마 <제5공화국>이 6월 중순 현재 재현하고 있는 대목도 ‘5·18 광주’다. ‘5월 광주’는 12·12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로 5공화국을 짓누르는 멍에가 되고 만다. 아직도 숱한 논란을 안고 있는 ‘1980년 5월’의 상황 가운데 몇 대목을 화두로 삼아 보았다.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5공화국의 본격 출발선으로 풀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신군부가 마침내 집권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그것 역시 수긍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1980년 들어서의 정국 상황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많은 자료가 남아 있으니 한번 찾아 보세요. 재야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최규하 정부를 압박하는 가운데 정국 혼란을 틈탄 북한의 장난도 요란했거든요. 그 무렵의 북한은 남북사회단체회담이니 장관회담이니 하는 것을 연이어 제의하면서 어떻게든 대한민국을 흔들려고 들었거든요.”
“비상계엄 확대 불가피”
-하지만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계엄으로 확대할 명분이 약했다는 주장이 지금도 제기되고 있는데요?
“당시 국민연합을 중심으로 한 재야에서는 1, 2차 대국민선언을 통해 5월22일까지 계엄 철폐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국적으로 국민총궐기대회를 가질 것임을 다짐했어요. 서울은 장충단공원, 각 시·도는 시청과 도청 앞이라는 식으로 장소도 공표돼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국민총궐기 이후의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정부가 져야 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좀 더 강도 높은 조치를 논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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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국회의원으로활동할 때의 이 전 의원. | |
-강경대응을 주장한 것은 군 아니었나요?
“그 무렵 ‘더 밀리면 안 된다’는 논의는 정부 안에서 더 활발했습니다. 각 부처 장관들만 해도 어느 한 사람 재야나 학생 시위대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한 경우가 없었습니다. 최 대통령이나 총리, 장관 모두 재야와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었거든요. 그런 가운데 드라마에 나오는 대로 전국 대학교의 총학생장들이 성균관대에서 회의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화여대로 장소를 옮긴 이들 학생회장에 대한 조치가 우선 급했습니다. 그 회의가 5월17일 끝나게 돼 있었거든요.”
-재야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총학생회장들을 타깃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학생회장들이 전국적인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고, 그들 뒤에는 복학생 대표들이 있었습니다. 복학생들은 시위 경험이 많아 학생 동원력도 뛰어났습니다. 이들은 예외없이 재야와도 연결돼 있었죠. 따라서 시위를 진정시키려면 총학생회장들에 대한 조치가 우선 필요했습니다. 회의가 끝나는 날짜에 맞춰 5월17일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결정된 것입니다.”
일본 내각조사실이 전해 준 ‘북한군 이상동향’ 정보
-드라마에서는 보안사가 ‘북한군 이상동향설’을 일본으로 흘리고, 그 정보를 다시 받아들여 계엄 확대의 명분으로 이용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실제로 그랬습니까?
“그거야말로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일본 정치권이 그 드라마를 본다면 ‘한국의 방송사가 참 웃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그 대목을 보면서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한민국 방송사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실제로 북한군의 동향이 심상찮다는 정보가 있었습니까?
“일본의 내각조사실이 북한군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정보를 우리 중앙정보부에 제공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본 측은 베이징(北京)에 있는 정통한 소식통으로부터 그러한 정보를 입수했다더군요. 그렇게 전달된 정보를 놓고 우리 관계기관은 물론 주한미군까지 나서서 분석했습니다. 결론은 ‘북한이 행동에 나선다고 해도 전면전의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보다 남파 간첩 등을 통한 사회 혼란이 더 우려된다는 판단이 내려졌어요. 이를테면 공작원이 시위대 속에 숨어 사망자가 10명 정도만 발생하도록 해도 바로 무정부 상태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계엄 확대는 불가피하다는 최종 결론이 나온 것이죠.”
-정치인들까지 활동을 규제하거나 구속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단기적으로는 학생회 간부들을 검거함으로써 시위 차단 효과를 얻되 장기적으로는 정국 안정도 중요하다고 본 것이죠. 재야 인사들은 국기문란 혐의 등으로 처벌하고, 자기 주장만 하는 정치권도 조용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 정치활동을 규제하고 권력형 부정축재자까지 검거하게 된 것이죠.”
이 전 의원은 정치인들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검거하는 데는 중앙정보부가 축적해 온 자료가 상당한 근거자료가 됐으며, 보안사의 ‘존안자료’도 일부 참고했다고 밝혔다.
5·17 비상계엄 확대에 맞춰 5월16일 저녁 10시를 기해 시위 주도 학생과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작전이 전개됐다. 합수부는 국별로 혐의자 검거와 조사를 분담했다. 학생들은 경찰로 구성된 3국과 5국이, 권력형 부정축재자는 보안사 수사국이 중심이 된 1국이 맡았다. 국기문란자에 대한 신병 확보와 조사는 중앙정보부 수사국으로 편성된 6국에서 담당했다.
-드라마를 계기로 새삼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만, 5·18 광주항쟁의 책임은 누구한테 있다고 보십니까?
“광주사태는 신군부나 5공과는 무관합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광주사태는 5공화국이나 전 대통령과는 아무 관계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5공화국은 당시의 시위 진압이나 계엄사의 지휘 체계와도 관계가 없어요. 그럼에도 광주에서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고, 그 뒤에 권력을 승계하다 보니 광주에 대한 정치적 책임까지 떠안은 것이죠. 그로 인한 정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전 대통령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 아닙니까?”
-당시 군의 주요 보직을 맡고 있던 인사들이 훗날 5공화국의 집권층이 됐는데도 광주항쟁이 5공화국이나 신군부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과적으로 집권하게 되니 그런 식으로 연결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5공화국 사람들이 시위를 진압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논리상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광주항쟁을 5공화국의 원죄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결과만 놓고 따지면 그런 시각도 가능하겠지요. 5공화국이 광주로 인한 정치적 책임을 얼마나 추궁받았습니까? 그 얘기는 그 정도로 해둡시다.”
-신군부 인사들이 처음부터 집권 욕심이 있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아무리 소명을 해도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생각까지 강제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차를 몰고 간 사람이 도중에 사고를 일으켰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처음부터 사고를 낼 목적으로 차를 몰고 나서지 않았느냐’거나 ‘아예 사고를 내려고 차를 구입했던 것 아니냐’고 매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5공 청문회 때 이 전 의원이 수감 중인 자신(DJ 본인)을 찾아와 ‘이제 당신은 죽는다. 재판은 요식행위일 뿐이다. 사는 길은 우리에게 협력하는 길뿐이다’라며 회유했지만 거부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광주사태가 마무리되고 난 뒤 찾아가 만난 적은 있지만, 그런 식으로 회유나 협박을 한 사실은 결코 없습니다. 필요하다면 김 전 대통령과 토론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렇다면 수감 중인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간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날 저는 ‘광주에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해 적잖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광주 시민들에게 무슨 말씀이라도 해 주시면 국가 안정과 국민 화합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죠.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내가 이렇게 갇혀 있는 상황이라 무슨 말을 할 계제가 아닌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게 전부입니다. 당시 무슨 협박이나 회유를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 전 의원은 광주항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사실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원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김 전 대통령 두 사람이 만나기로 돼 있었는데, 내가 전 사령관을 설득해 만나지 못하게 하고 약속 장소에 대신 나갔다”고 말했다.
“‘5·18 광주’는 5공화국과 무관한 일”
-그 무렵의 전두환 사령관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정국 운영에 협조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더군요. 당시 전두환 사령관은 김영삼 씨나 김종필 씨는 정당을 이끌고 있으니 정부 여당 사람들이 얘기하면 되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면복권이 안 된 상태의 재야 인사여서 메시지를 전달할 마땅한 파트너가 없지 않으냐는 판단에서 자기라도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좋은 뜻의 만남이었을 것 같은데 왜 말리셨나요?
“비밀이 없는 세상이니 두 사람이 만난 사실은 금방 소문나지 않겠습니까? 형평성 논란이 일면 나머지 두 김씨도 만나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보안사령관이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얘기가 바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 오해가 빚어질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는 건의를 한 것이죠. 전 사령관도 납득하면서 ‘그렇다고 약속 자체를 취소하는 것은 모양새가 안 좋으니 권정달 정보처장하고 당신 둘이 가서 만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만났죠.”
-어디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광화문 인근에 있던 내자호텔에서 만났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금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있는 이용희 씨와 함께 나와 있더군요.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니 김 전 대통령도 그 무렵 전 사령관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합수부에서 10·26 수사를 지휘했던 이학봉은 5공화국 출범 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면서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1986년 1월까지 5년이 넘도록 대통령 민정수석을 맡으며 전두환 대통령의 측근 참모 역할을 담당했다. 1986년 1월부터 전두환 대통령 퇴임 때까지는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2차장도 맡았다.
군 시절부터 따지면 전두환 전 대통령을 그만큼 오랜 세월 가까운 위치에서 보좌한 인물도 드물다. ‘숙명적인 5공 인사’로 분류될 그가 5공화국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할지 궁금했다.
‘전두환비자금’의 진실과 거짓
-5공화국은 어떻게 평가되리라고 보십니까?
“언젠가는 제대로 된 객관적 평가를 받을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국가 위기를 극복하면서 민주화로 가는 데 일조했고,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에도 분명한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이 단임으로 물러난 경우는 5,000년 역사상 전두환 대통령이 처음 아니었습니까?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계기가 된 올림픽도 유치함으로써 우리 국민의 자긍심을 높이기도 했고요.”
-그런데도 당대 사람들이 5공화국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은 뭐라고 보십니까?
“그 얘기를 하려면 정치자금 얘기를 해야 하는데…. 나온 김에 얘기합시다. 박 대통령 시절의 정치자금 조달 창구는 대통령비서실장·중앙정보부장·부총리와 여당 재정위원장 등 4명이었습니다. 이들을 창구로 해서 자금을 모으지만 떡고물이다 뭐다 해서 새는 돈이 생겼고, 그 때문에 부정과 부패가 싹텄던 것입니다. 하지만 5공화국은 달랐죠.”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공식적인 창구를 두는 데 따르는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정치자금을 관리한 것이죠.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장관 지낸 사람들 가운데 정치자금 문제로 감옥 간 경우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대통령이 부정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그렇게 거둬들인 액수가 수천억 원에 달하지 않았습니까?
“검찰이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에 거둔 것으로 밝혀낸 액수는 9,000억여 원이 조금 넘습니다. 그 가운데 6,800억여 원은 방위성금·새마을성금·새세대육영회·새세대심장재단·일해재단 등에 사용 또는 지원된 것으로 검찰이 확인했습니다.”
-나머지 2,205억 원은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돼 추징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전 전 대통령이 지금까지 납부한 액수는 314억 원에 불과한데요?
“말씀하신 2,000억 원이 넘는 돈 가운데 1,800억 원 정도는 검찰 조사를 통해 대통령선거와 총선, 여당 운영자금 등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럼에도 법원은 이른바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해 다 추징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전 전 대통령이 마치 돈을 감춰놓고 내놓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호도하는 분위기도 있고 말이죠.”
-정치자금 말고도 인권탄압이나 언론 통폐합 등 5공과 관련된 부정적 이미지는 여럿 있지 않습니까?
“5공화국은 민주주의를 부정한 정권이 아닙니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출범하다 보니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거리가 있어 보이는 면이 있을 수 있겠죠. 하지만 의도적으로 민주주의를 거부하거나 한 경우는 없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언론 통폐합이나 공직자 숙정 등도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될 겁니다.”
이학봉 전 의원은 “좋은 역사든 싫은 역사든, 모두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기록”이라면서 “잘된 역사는 승계해 발전시키고, 잘못된 역사는 그 속에서 교훈을 찾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는 말로 5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