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성령이 오시면 십자가에 달리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한 분 빼놓고는 일괄적으로 다 저주받은 죄인이요, 집단적인 죽은 자가 된다. 개인구원은 없다. 집단구원이다. 성령은 개인으로 일하지 않고 집단으로 일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일은 똑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개인이시고 나머지기 모든 인간은 집단이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이기에. 주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새로운 집단이 등장하는 것이다. 계속 우리는 죽은 자로 있어야 한다. 죽은 자를 통해서 주님은 살아있는 것이다. 모든 일은 주님 홀로 하신다. 우리는 일 한 적이 없다. 영원토록 죽은 자이기에.
사람들에게 당했던 예수님, 그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동원된 자들이 누구냐? 우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개별자는 빠진다.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을 보니 죄인 맞네요!” 이게 우리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과는 나는 잘났다, 나는 정당하다, 를 다 배제한다. 그래서 개별자의 자격으로 나갈 수 없다. 개별자가 집단으로 들어가도 개별자가 생생하게 살아있을 뿐이다. 닫힌 문은 집단의 표상이다. 문밖에 주님이 계신다. 닫힌 문이 열릴 때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자기의 가치, 자기는 잘났다고 우기는 것들, 문이 있음을 비로소 주님으로 인해서 아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우리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 발각 나는 것이다. 죽음을 유발한 범죄자로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살고 싶다.”라는 이 생각이 옳다고 여긴다. 이 옳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투입되는 것이 뭐냐 하면 윤리와 도덕이다. 여기에서 뭐가 빠졌는가?
예수님이야기가 빠졌다.예수님 이야기가 빠져버리면 살고자 하는 게 옳다 된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윤리도덕으로 무장되어 있고 자기 정당성을 확보할 여지를 항상 두기 때문에 개인으로 다가가서 아무리 십자가 바라봐도, 여기서는 죄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
주님은 만유의 주가 되신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언약이 주어진 곳, 하나님의 오른편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출발해서 그 자리로 언약의완성자가 도착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다 적용의 대상이 된다. 주님의 사역에 묶여버리는 그런 관계망 속에 놓인 것이다.
개별자가 날아가는 것이다. 주께서 일해서 구원한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원인도 이런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
내가 죄인된 것, 뭘 해도 죄인이어야 했다.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그게 신기한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죽은 자가 누구에요?”를 찾는 것이다. 거기에 희한하게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면 신기하다. 진짜 기쁨은 예상치도 못한 기쁨이 왔을 때다. 그것은 오래간다. 성도는 이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영원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는 슬퍼서 못산다. 죄인이라 기쁜, 그 기쁨이!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죄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 혼자 설 수 없다. 누구를 의지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니면, 모든 일에 허허 웃으면 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누가 건드리면 분노한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