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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가해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있을 수 있을까?” 고(故) 장자연 사건을 밝히고자 후배 윤지오가 쓴 ‘13번째 증언’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짧게 책을 소개했는데 이런 글이 있었다. 그걸 읽으면서 불현 듯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당한 예수님입니다. 그 사람 속에 나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저 사건에서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아니면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일까? 꽃다운 나이에 목매어 죽어버린 자가 있고, 아무도 그 죽음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남겨진 흔적과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은 말이 많다. 그러나 절대로 나서지 않는다.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세상이 이러할진대, 모든 사람들에게 당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누구도 가해자로 나설 생각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셨고, 그 죽으심으로 나는 죄인 되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기적이다.
그렇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해자는 분명히 존재한다. 가해자 없는 피해자는 있을 수 없다. 그 누구에게나 말 못할 당한 피해는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가해자는 존재한다. 얽히고설킨 그 관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뒤죽박죽이 된다. 결국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누가 가해자인지 누가 피해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전부 가해자가 되고 단 한 분만 피해자가 되는 사건이 있다. 십자가사건이다. 십자가사건은 시공간을 장악한 사건이기에 영원히 변치 않는 존재 그 자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이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고 지금 현대인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그것도 너무나도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관심조차도 없다 할지라도.. 자기들만의 역사,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민족주의에 전념하기도 벅찬데, 남의 나라, 그것도 전쟁의 발상지인 이스라엘이라는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에 불과한, ‘예수’라는 한 인물의 죽음에 관심가질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때나 오늘이나 동일한 죽음으로 다가오신다. 그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온 인간은 전부 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 다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 한분만이 죄가 없으시고 의이시기 때문이다. 오직 그분만이 죄가 없다고 하늘의 선포가 주어진 이상,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죄인들이 되는 것이다. 아무런 핑계도 댈 수 없다. 아무 조건도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에 다 갇혀있다. 그 죽음이 말해주는 죄 아래 다 갇혀있다.
사고사이든 자살이든 간에 세상은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자들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오래도록 애도한다. 그러나 그들만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 아니다. 예수도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서 말이다. 아무 죄도 없는 한 젊은 청년이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가 왜 그렇게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무책임한 죽음이라고도 한다. “누가 누구 대신 죽어? 예수라는 자가 내 죄 때문에 내 대신 십자가에 죽어?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내가 죄가 어디에 있어?” 이것이 십자가 죽음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다. 나는 죄 없다. 내가 왜 죄인이야? 죄가 어디에 있어? 그때 그 시대에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죽인 것을 가지고서 덮어씌우려고 하느냐? 그때 그 시대에 그 현장에 있지도 않았는데,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할 뿐인데, 예수의 죽음과 나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래서 단지 역사는 그의 죽음을 혁명으로 해석했다. 자기백성 유대민족을 위해서 로마의 압제에 대한 해방운동으로 말이다. 예수는 혁명하다 죽은 희생자로서 애도되고 있는 것이다.
죄 때문에 죽은 예수님의 죽음은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 실패한 자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시아였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메시아와 그들이 그려낸 메시아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에나 한명쯤은 있을법한 영웅적인 순교자도,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로마라는 적과 싸우다가 순교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백성 유대인들의 고소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예수님을 혁명가로 몰고 가려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세상 신, 공중권세 잡은 자 악마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행적을 초인으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복음을 가리기 위한 술책이다.
그래서 악마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을 참고인으로 불러 세운다. 그가 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되었는지, 로마와 유대인 간의 긴장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로마와 유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 예수를 이방에 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한통속이 된 그들은 정치적인 이해관계 속에서 서로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다. 유대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힘인 민중들의 지지를 뺏어가는 예수를 죽여서 좋고, 로마는 식민지 유대를 다스림에 있어서 꺼림칙하고 위험한 인물인 예수를 제거해서 좋고. 악마는 예수도 만난 적도 없고-다메섹도상에서 만난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라고 함-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바울이라는 자, 그가 전하는 예수는 무용지물이라 것을 내세워서 좋고.
이런 역사의 흘러감 속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세상 속에 묻혔다. 단지 종교에서만 호출된다.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있음에도 살아있다고 우기는 자들이 예수님을 호출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나타나신다. 참, 친절하시게도 말이다. 호출한 그들의 요구는 한결같다. 어찌되었든 간에, 무슨 이유로 예수님이 죽었던 간에, 하나님을 믿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기에 그 다리 역할로서 예수님을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천국가기 위한 하나의 중보자로서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 살아생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까, 나를 믿는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으니까,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했으니까, 이해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식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거대한 권력에 맞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해도, 설명도 될 수 없다. 이것은 어쩌면 권력에 무참하게 죽어버린 자와 권력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살아있는 자 사이에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간극과도 같은 것일까? 어린 자신을 아기 대해주듯이 호의를 베풀었던 선배언니의 죽음의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증언대에 서서 증언했지만 권력은 피를 토하는 절망으로 내몰았다. 다시는 세상 앞에 설 수 없으리라는 공포로 10년 동안 숨어 지냈지만 짧은 1년의 만남이 가져다 준 파장은 10년이 흘러도 언니의 죽음을 잊지 못하게 했다. 평생 잊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자신이 먼저 다가서지 못한 자책감과 회환으로 13번의 증언을 한다. 그것이 언니를 위해서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고백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증언, 이 용기를 흘끔 넘봤다. 하지만 ‘이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서는 안 돼!’라는 신음소리가 나지막하게 흘러나온다. 이런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냥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 모르겠다. 오래도록 모니터 화면에서 커서만 깜빡이고 있다.
증언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주님의 입장에서는 수에 칠 가치조차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주님은 버리지 않고, 그 사건이 가져다주는 결과로서 삶이 아니라 죽음이요, 영생이 아니라 저주요,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증언은 이 세상이라는 권력에 맞서는 것도 아니고, 이 세상에 이해를 시킬 것도 아니고, 설명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사람과 사람을 상대하는 증언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증언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숙제를 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이 없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다 억울한 죽음이고 미스터리한 죽음이기에 증거나 증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증거나 증언을 위한 증인이 필요치 않다. 주님의 죽으심은 역사가 몰아가는 혁명가의 죽음도 순교자로서의 죽음도 메시아로서의 죽음도 아니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죽으신 것이다.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오직 주님이 주님을 위해서 증언하신다.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시면 그만인 것이다. 그 누구도 넘봐서는 안 될 혈연의 울타리, 가족이라는 이름에 흠집만 나지 않는다면 그게 행복이라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내 이름인 것이다. 가족이 아니라 그 가족에 속해 있는 나다. 다 죽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나다. 다 불행해도 나만은 행복해야 된다는 것이 나다. 그래서 묻고 싶다. “단지 연기를 하고 싶어서 배우가 꿈이었을 뿐이라는 순수함 그 자체였다고 하는데, 막 피려던 한 송이 꽃이었을 뿐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 순수를 더럽히고 인정사정없이 꺾어버린 어떤 이들의 만행에 대한 죽음이기에 억울하다 했고,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기의 신변의 위협마저 포기하고 나서서 증언하는 그 갸륵함에 말이다. 과연 이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 죽음 앞에 어떤 죽음인가를 말이다. 나와 관계된 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는가 말이다.”라고 묻고 싶다. 그래서 나를 지키기 위한 것에서 죽어도 벗어날 수 없는, 죽어서까지 연속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은 죽어서 가야 할 곳인 본점인 지옥, 그 지옥의 지점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기적인 것이다.
인간의 배후가 악마라는 사실을 모른다. 악마의 덫에 걸려 서로에게 덫으로 작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인간은 전부 다 가해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피해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시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셔서 저주를 다 받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분, 숨어있는 악마가 표면상으로 드러나 인간 행세하는, 그 인간에게 당한 분이시다. 예수를 인간으로 봐서 약점이나 캐고, 막장드라마 같은 스토리로 엮고, 혁명가로 위장시키고, 사회를 위한 민주주의 운동가로 변모시켜 베스트셀러 작가에 이름을 올려서 강연이나 하는, 이 배후에는 악마가 심어준 인기를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겠다. 돈벌이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필요하다. 악마마저도 예수님을 시험할 정도로, 인기라는 것은 인간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감당할 수 없는, 빠져나올 수 없는, 마약에 중독된 것과 같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복음을 대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지고 있고, 주님과 악마와의 영적전쟁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런 이유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뿐이요, 영구히 미제사건으로 남을 뿐인데, 그러나 이 간단한 이유를 그 누가 알랴! 사건현장이 이미 벌어지기도 전에 사건의 실마리가 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기적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13번째 증언’이라는 책 제목처럼(?), 물론 열세번이나 증언을 했다는 말이겠지만,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예정된 부르심을 입어 13번째로 증언자가 되었다. 그것이 사도바울을 통하여 성령이 전하신 복음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만 복음이다. 주님만이 주인공이신 복음, 그 복음의 증언자들을 주님이 만들어내신다. 마지막 번 째 증언자로 말이다.
세월호가 일어난 사건의 주기가 되면 어김없이 너도나도 노란리본을 단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플랜카드가 여기저기 걸린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데... 13번째 증언을 했고, 재수사까지 합치면 16번째 증언을 했어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오히려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탈선된 기차는 달릴 수가 없다. 정해진 선로로만 기차는 달린다. 내가 타고 있는 기차는 이탈해서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잘 달리고 있다고 망상에 빠져 그 망상 속에서 달리고 있는 게 인간이다. 이 기차의 종착역은 지옥이다. 종착역이 지옥이라면 지금 살아가는 모든 것이 어차피 지옥이다. 주님이 정하신 선로를 달리는 기차 안에 주님이 타고 계신다. 종착역은 천국이다. 그 기차 안에 주님과 함께 타고 있다면 지금 살아가는 모든 것이 천국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만이 죽음이다.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죽음 앞에서 그것이 무슨 일이든 잊지 않겠다고 하지 말고 다 잊자! 가해자는 바로 나다! 그렇다면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