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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가져다주는 것 말고 하나님이 가져다주시는 것을 날마다 찾는 보람으로 살도록 기도합시다. 생계에 필요한 것을 찾고 은근히 기다리는, 그러나 하늘에서 주는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람이 줄 수 없는 것을 날마다 주셨건만, 저희들 주님이 주신 것보다 사람이 주는 기대로 그게 가리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의와 용서가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창세기 49장 5-7절
5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6절,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7절,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분명히 축복한다고, 창세기 49장 28절에 보면,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라고, 그들에게 축복했다고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그 축복 내용 속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저주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 저주가 어떻게 복이 되는가를, 그 과정을 놓치면 안 됩니다. 저주조차도 복이 된다면, 그동안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에 주눅 들어서 살았는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기회가 되는 겁니다.
시므온과 레위에게 야곱이 저주에 대해서 예언했을 때에 다른 열 명의 형제들은 신바람이 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다행이다, 고소하다, 상대적인 여유로움에 도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감추어진 죄성과 저주성이 폭로되는 순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야곱에게 받은 축복이 야곱에게 주어졌지만 그 다음에 야곱의 자손들에게 분산될 때에는 이게 일종의 프리즘이라고 보면 됩니다. 햇빛을 받아서 삼각형 유리를 통과할 때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로 우리 눈에 그림자로 비치죠. 빨강색이 저주를 받았다면 주황색이 신나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다 한통속이거든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만큼 자손이 번창 한다고 했는데, 번창한 별 같은 자식 하나, 하나가 다 복이에요.
야곱은 열 두 명의 자식을 놓게 됩니다. 레아의 자식에게는 르우벤-보라 아들이다. 시므온-기도를 들었다. 레위-같이 연합함. 유다-여호와를 찬송함. 잇사갈-보상 받았다. 값을 쳐서 받았다. 스불론-함께 거쳐할 수 있게 되었다.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는 갓-복되다. 아셀-기쁘다.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 단-하나님의 심판. 납달리-경쟁해서 이김. 라헬은 요셉-수치를 제거했다. 베냐민-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어요. 장래에, 미래에 다 잘된다는 것입니다. 저주나 분노가 없어요.
르우벤, 보라 아들이다. 시므온은 기도를 들었다고 할 때에, 기도의 응답이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야곱으로 종속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거예요. 이름의 뜻대로 전부 다 천국 생활을 이야기한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개인적으로 저주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그런 나쁜 짓을 했다고 다른 형제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남이 갖고 있는 특징이 나에게 잠복되어 있는 것입니다. 7절,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이 저주를 시므온과 레위 그 형제들에게만 국한되어있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가 바로 전체적인 통합을 의미하는 언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기도를 들었다고 했는데, 49장 5절에 보니까,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거예요. 그럼 결국 그들에게 기도응답이 해당되지 않는 걸까요? 그게 아닌 겁니다. 또 레위는 같이 연합이라고 했는데, 7절에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레위 지파는 열두 지파에 48성읍으로 파견근무하게 되어 있어요. 레위 지파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본래의 그들의 운명 속에 다 흩어질 수밖에 없는 계기가 그들에게 찾아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전 세계적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레위적인 예언이 그들에게 적용된 것입니다. 오늘날 유대인 뿐만 아니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니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과거의 일을 통해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오히려 과거를 미래의 거울로 보면 됩니다. 미래에 있는 것은 최종성이거든요. 인간은 단편적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 운명의 최종성에 대해서 본인이 몰라요. 개인적으로 니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가 소속된 전체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이렇게 될 것이다. 니가 그 중에 일부가 될 것이다. 이게 오늘날 예수 안입니다. 우리들, 택한 백성들의 그룹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걸 나만의 운명으로 뽑아내면 그게 반칙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모세언약의 취지와는 정반대는 성질, 마귀적인 성질이 뭐냐 하면 단독적으로 자기 것을 챙기려고 하는 그 의식, 그 사고방식, 이게 오늘 본문에 보면 저주받는 예언으로 시므온과 레위에게 해당이 된 것이죠.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런 저주의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기 34장에 세겜의 아들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했어요. 성폭행이라 말은 잘못된 거예요. 그냥 강간이에요. 폭행중의 하나로 보면 안 돼요. 따로 봐야 돼요. 성폭행은 죽음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강간은 상대의 인격성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어쨌든 강간하고 아내를 삼고자 후속조치를 자기 딴에 배려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세겜의 남자들을 죽이려고 모의했어요. 할례를 행하라고 해서 3일에 고통이 미칠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주동자가 되어 세겜 성읍의 남자들을 다 죽여 버렸어요.
이 사건이 과거사건입니다. 과거 사건은 미래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이런 짓을 했기 때문에 미래에 니가 벌 받아라가 아니라 미래에 드러나야 될 비언약적이고, 지옥속성, 하나님에게 대드는 악마적인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과거에 이런 사건이 유발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거예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없어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실패를 하나님 자기 실패로 간주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없어요. 선악과 따먹은 것이 과거거든요. 과거의 실패를 재료로 해서 미래에 나타낼 하나님의 진짜 모습, 진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그러한 재료로, 의도적으로 선악과 따먹도록 했습니다. 아담이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 28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이게 신약이잖아요. 마지막 때의 최종적인 의미와 최종적인 하나님의 자기만족이 죄인의 죄를 통해서 오히려 비로소 획득된다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악마는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미를 훼손하기 위해서 아담의 독자적인 의미를 챙기도록 부추긴 것입니다. 인생에 니가 잘못한 것은 니가 책임져야 된다. 우리 내부에서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촉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니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더 나은 운명을 위해서라도 니가 미리 반성하고 회개에서 니 운명을 단도리를 해야 된다, 라고 가르치는 거예요. 모든 교회가 그렇게 해요. 모든 종교단체가. 배후에 악마가 있으니까.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조차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에 보면,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간은 그냥 안개에요. 뭐 열중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작은 물방울로 소멸되고 마는 겁니다. 악마는 모든 가치와 의미는 바로 너한테 있다는 거예요. 니가 행동 똑바로 안하고 니가 죄를 지으면 너만 손해 본다. 너만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지옥 못가요. 우리 마음대로 지옥 갈 수 있는 없어요. 지옥은 주님이 가게 하는 사람만 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무슨 짓을 해도 지옥 불합격. 끝난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전1:20). 앞에서 사도바울이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아멘이라고 하는 것을 과거에서 아멘한 것으로 보지 말고, 자기를 미래의 작품으로, 결과물로 보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결과물로 본다면 그 자체가 찬송이에요. 우리의 솜씨가 아니에요.
우리의 할 일은 뭐냐, 아들을 위반하고, 기도를 듣지 못한 요소를 보여주고, 연합되지 못할 요소를 드러내고 찬송 할 수 없는 그러한 행동을 드러내는 거예요. 죄는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자동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최종적인 의미와 하나님의 자기만족에 대드는 요소가 육 안에 있어요. 언약의 반대되는 요소가 육에서 스멀스멀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예언하게 한 것입니다. 예언은 과거에서 미래로 달려가거든요. 그 과정을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예언을 한 것입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인 예언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공통적으로 공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안개기 때문에. 나라는 최종적인 것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출된 거예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그 내막이 프리즘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한 것은 단 하나에요.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자기만족이라는 겁니다.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이런 일이 벌어져야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도전은 “나는 뭐꼬? 내게 돌아올 이익은 뭐냐?” 이런 식이에요. 우리는 단독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 단독성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도전하는 성깔을 부리게 되어 있어요. 시므온과 레위가 저주받는 것은 그들의 결정의 의사가 전체 의견이 아니었어요. 그들은 개인적인 의견, 사적인 분노를 폭발한 거예요. 그런 것들이 시므온과 레위 속에 들어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세겜 땅으로 의도적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세겜추장의 아들에게 디나를 이쁜 여인으로 보이게 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객관이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를 몰라요.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왜? 안개기 때문에. 아담 자체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니가 드러낼 죄가 있고 내가 드러낼 죄가 있다. 그래서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은 주님 마음대로에요. 주님 만족이에요.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 만족에 입각해서 우리가 존재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가 어떻다고 하는 것, 우리는 수시로 주관적으로 살 수밖에 없지만, 이게 바로 내가 감추고 싶었던, 내게 잠복하고 있었던, 주께서 이것을 용서로, 의로 바꾸어줄 재료로서 죄라는 것을 본인이 미래를 통해서 소급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밖에 모르는 것이 악마적인 요소인 것을 기쁨으로 자인하게 되죠. 왜? 이런 죄는 주님이 손댔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죄가 되기 때문에. 그냥 죄가 아니고 주님의 용서와 결부된 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이라는 공통적인 과정을 거쳐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같이 연합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성도 안에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통합된 이스라엘이 다 들어있습니다. 과정으로서의 저주이지만 결과적으로, 최종적으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고 미래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내가 하는 내 일에 대해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자체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자기만족에 대드는 악마적인 요소인 것을 미리 우리가 눈치 채고 감을 잡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내 인생에 대해서 책임질 것이 일체 없습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소관이 아니에요. 죽을 만들 재주도 없고, 밥을 만들 재주도 없습니다. 여동생 디나가 강간당한 것을 참을 열두 아들이 없습니다. 다 같이 분노하고 잔인하게 살해할 것을 아시고 의도적으로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만족, 자기 증명을 위해서 인간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몰랐던 죄를 경유해서만 감사와 찬양과 기도가 됩니다. 소경된 자, 귀머거리 된 자, 절뚝발이가 된 자, 예수님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상이 아님을 알아야 됩니다. 귀신 7마리, 2000마리 귀신이 들어와도 합당함을 인식해야 됩니다. 단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느낄 때에, 우리가 진즉에 심판의 대상임을 알 때, 심판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과거사로 돌려주신 그 모든 혜택은, 하나님의 자기만족, 최종의미는 사적인 니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최종의미가 있음에 고개 끄덕이는, 그것이 언약완성, 언약백성에게 주신 주님의 축복이고 주님의 혜택입니다.
첫댓글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 만족에 입각해서 우리가 존재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내가 어떻다고 하는 것, 우리는 수시로 주관적으로 살 수밖에 없지만, 이게 바로 내가 감추고 싶었던, 내게 잠복하고 있었던, 주께서 이것을 용서로, 의로 바꾸어줄 재료로서 죄라는 것을 본인이 미래를 통해서 소급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밖에 모르는 것이 악마적인 요소인 것을 기쁨으로 자인하게 되죠. 왜? 이런 죄는 주님이 손댔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죄가 되기 때문에. 그냥 죄가 아니고 주님의 용서와 결부된 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