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강-YouTube강의(기분의 오류)20190402-이 근호 목사
제 273강, 제목은 ‘기분의 오류’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몰입할 때 결과는 망칩니다.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은 우리가 압니다.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은 뻔한 이야기고 누구나 알아요. 근데 그 예수님을 구약에서는, 다윗언약에서는 그 예수님 중심이 오기 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왕이라고 해요. 왕.
구약은, 다윗언약에서 백성들의 개개인의 기분과, 사람은 기분에 따라서 살잖아요. 기분과 왕이 무슨 뜻을 갖고 있는가를 아주 극한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잠언서 16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오늘날은 민주주의 사회에요. 각자의 가치를 서로가 인정해주자는 그런 정치제도거든요. 그런 정치제도는 그런 정치제도가 좋다고 연구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가 되다보니까 할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왜 자본주의 경제일 수밖에 없었는가? 옛날에는 자본주의가 없었을 때는 왕의 제도가 있었는데 왜 지금은 자본주의 제도가 있느냐? 인구가 늘어나서 그런 겁니다.
늘어난 인구를 왕 하나가 통치를 못해요. 그럼 왕이 통치를 못하면,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그것을 다 입히고 먹여야 되죠. 그럼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분업이 되어야 해요. 분업이 되면 각자의 전문분야가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전문분야가. 인간이 모든 특정분야를 다 알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임금님이 온갖 전문가죠. 군사, 경제 뭐 모르는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자기가 알아야 돼. 북한 김정은이하고 똑같아. 군대도 갔다가 봉제공장도 갔다가 이거는 뭐, 양어장에도 갔다가 근처 식당에도 갔다가 이거는 뭐, 뭘 알아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불어나는 인구는 그만큼 양식이 많아지니까 인구가 팽창했고요. 그 팽창한 인구가 더욱더 팽창하다보니까, 이게 무슨 위주냐, 각자 자기 집에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전문직업, 직장에 따라서 집을 옮겨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도시화라고 합니다. 도시집중화. 도시화. 아무리 나라가 잘 살아도 늘 가난에 쫓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인구증가와 도시집중화입니다. 지금도 촌에 가면 빈집이 많거든요. 서울은 집값이 비싸죠. 촌에는 집이 그냥 비어있어요. 고양이 집인지, 쥐 집인지, 새 집인지, 그냥 날짐승만, 멧돼지만 왔다 갔다 해요. 집에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왜 촌에서 안 살고 도시에 가는가? 도시에 가야 돈벌이가 있잖아요. 그러한 것이 자본주의고 민주주의거든요. 특정직업을 갖고 있어야 돈벌이가 되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누구한테 몰입해야 돼요?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24시간 누구 기분과 누구 마음에 몰입해야 돼요? 내 마음과 내 기분에 몰입을 해야 된다고요. 혼자서 울고불고 TV보고 책보고 맨날 혼자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하자가 없고,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인간이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성경을 펼치고 성경말씀을 듣기도 전에 이러한 처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내 기분을 풀어 달라, 개인적인 기분을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고 뭐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순간 뭘 놓친 거예요? 잠언서 16장 10절의 말씀을 놓친 거죠?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왕의 입술에 있다고 했죠. 그럼 왕의 입술이니까, 자, 왕과 어디 자신을 한번 비교해봅시다. 왕 키가 165cm다. 근데 내 키가 170cm이다. 그럼 내가 왕보다 더 높네요? 키가 크니까. 그리고 왕은 발음이 좋지 않다. 근데 나는 발음이 좋다. 그럼 내가 왕보다 더 질 좋은 인간이네요? 자, 왕은 위장이 안 좋다. 나는 위장이 튼튼하다. 그러면 여러모로 보나 내가 왕보다 더 높네요? 뭐 그런 겁니까?
왕은 또 성질이 고약하다. 나는 점잖다. 그럼 인간적으로 봐도 내가 왕보다 더 우수한 인간이네요. 그러면 내가 왕 할까요? 내가 왕을 하겠다는 이 말이 바로 민주주의 사고방식이에요. 하나님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신 것은 왕이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왕을 주신 것이 아니고, 왕 자리 자체에서 뭐가 샘솟듯이 터져 나오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계시가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을 왕이라고 지정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백성, 십만 명, 백만 명 다 떨이로 합쳐도 누구하나 보다 못하다? 왕 하나 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재자이기 때문에.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가 없다면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오지 않는, 중요한 지점에 왕이 있어요.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간단한 겁니다. 나 안쳐다보고 누구 쳐다본다? 예수님 쳐다본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안 쳐다본다. 왜? 내 쪽에서 기분이 안 좋아서 예수님을 볼 여유가 없어요. 왜 안 쳐다봅니까? 기분이 영 엉망이라서 안 쳐다본다는 거예요. 그리고 기분 좋을 때만 예수님 쳐다보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과 오늘날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을 한번 대비해보세요. 아까 272강처럼 내 이름을 빛내기 위한 길과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오직 주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그 길과.
주의 이름을 빛내면 끝은 천국이고 영생이고, 내 이름을 빛냈다면 아무리 주위에서 동조를 하고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해도 그거는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거든요. 부인을 해도 부인할만한 건덕지가 있어야 되거든요. 뭐 아무 때나 중처럼 “나는 부족하다.”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뭘 쳐다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는 안 쳐다보는 어떤 분이 독보적으로 내 기분을 덮쳐야 돼요.
내 기분에 좌지우지 하지 않아야 되고, 유동적인 내 기분을 완전히 개무시 할 수 있는 어떤 특정분의 말씀. 그것이 바로 주님 입에서 나온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에서 눈 돌리면 우리는 또 기분 따라 살아요. “아! 오늘 기분 잡쳤다.” “아! 오늘 기분 붕 뜬다.” 뭐 기분 좋을 때는 기분 좋다고 해야죠. 하지만 그것이 다시 내 것으로 소지돼서는 안 되거든요. 기분이 좋다면 그 기분을 주신 주님을 독보적으로, 내 존재보다 주의 존재를 더 우선시하는 관계가 다시 정상적으로 형성돼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거는 기분이 아니고요. 실제고 현실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내 기분을 망치게 하는 그 모든 사태가 왕 되신 주님이 나 여기 있다는 시그널이었다. “나 여기 있잖아! 니가 고민할 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왜 고민하느냐? 나 여기 있잖아! 니가 중보자가 아니고 내가 중보자야! 니가 구세주가 아니고 내가 구세주고! 니가 너의 심판자가 아니고 내가 심판자야! 심판해도 주님이 하시고 구원해도 주님이 하시는데, 왜 니가 너를 가만두지 못하고 심판하고 정죄하고 지적하고 자책하고 왜 그러느냐?” 이 말이죠.
기분에 울고 기분에 웃었다가 하는, 그것은 바로 주의 말씀 말고 홀로 서려는 마귀적인 습성이 발휘돼서 그래요. 자, 정리해봅시다. 마귀는 우리의 기분에 치중하게 만듭니다. 니 기분이 어떠냐? 컨디션이 어떠냐? 계속해서 거기에다가 몰두하게 만들어요. 그러나 성령은 이런 마귀를 이깁니다. 어떻게 이기느냐 하면은 너는 말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받는 빈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죠.
그래서 잠언서 16장 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왜 그릇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기분에 따라 살다보니까 너무나 사적이고, 소위 쉽게 말해서 너무나 민주주의에요. 그리고 너무나 자본주의에요. 개인주의로 우리는 훈련받았고 양육 받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 너무 젖어들었어요.
이제는 왕 중심주의로 바꿉시다. “나는 주님의 백성이고 주님은 영원한 나의 왕이십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십니다.” 이런 식으로 바꿔서 살도록 성령께서 이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