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철저히 주님에게 소유당하는 것을 잊지 말기를...
이 험난한 세월을 살면서 소유가 버릇이 되었습니다. 주의 것이 된 그것이 구원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창세기 49장 1-4절
1절,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2절,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
3절,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마는
4절,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참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복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탈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받았던 복은 철저하게 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시체정리, 한 마디로 아담이라고 합니다. 아담으로 태어났느냐? 니가 죽는 것을 복인 줄 알아라! 문제는 누가 죽이느냐? 그리고 무엇으로 죽이느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전에 눈치 챌 것은 누가 죽이느냐는 것입니다. 누가 죽이는지를 만난 그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인간을 죽였는가? 그것을 동반해서 야곱을 찾아온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것 가지고 하나님에게 자랑질 하려고 했지만, 그 야곱에게 그것은 어디까지 야곱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 야곱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은 완전히 구라입니다. 신에게 술과 노래를 드리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가짜에게 납득이 되는 신은 인간이 만든 가짜신인 것입니다. 낯설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의 기대와 희망이 좌절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희망으로 삽니다. 아무리 살기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만 있으면 됩니다. 세월호 10억 보상받았어도 좋다고 안 합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아담이 주제넘게 희망을 가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재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을 없애버립니다. 그 없애버리는 작업이 축복이에요. 앞당겨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두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축복이 계속 성도의 본질로서 계속 이어져 나오거든요.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기능이 중요한 거예요. 육적인 존재는 죽어야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희망은 죽음과 동시에 날아가 버렸어요. 이거는 종교가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주님께 부름을 받으면 내가 주님이 오지 않았을 때 내가 설계한 모든 것은 다 잊고 다 잘라내고 주님한테 부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능이 우리에게 왔다면, 이것을 새로운 장반에 담겼다고 봅시다. 이 쟁반이 언약이에요. 우리가 쟁반에 있는 개미라고 봅시다. 개미가 기어 다니다가 쟁반 끝에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그렇게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불렀던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주시는 쓴잔을 마셔야 될 처지인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작 버려야 될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 겁니다.
옛날 아담의 속성의 연속성을 가지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사탄입니다. 거기에는 십자가라는 것이 빠져있어요. 십자가는 철저한 아담적 요소에 대한 징벌이요, 심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태어난 이상 아담적 요소 외에는 없어요. 아담의 요소가 어떻게 그렇게 발휘되는가를..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절대적인지를.. 인생이란 자기정립의 세월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런 인간이라는 재료로 다 모아졌어요. 자기만 달랑 남는 거예요. 야곱의 열두 아들은 야곱에게 복을 받지 못하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만큼은 영원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장차 오실 주의 이름을 담는 겁니다. 아담의 요소에서 예수님의 요소로 바꿔치기의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야곱이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어긋맞게 합니다. 바꿔치기 합니다. 하나님 자체가 뒤집기 하러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인데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이지만 죄인으로 저주받은 길을 가신 겁니다. 그래서 길이 생긴 겁니다. 그게 기능입니다. 제자들은 그 기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저절로 구원이 된 거예요. 언약적 기능은 주님을 구원하는 겁니다. 주와 합한 사람은 덩달아 구원받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라고 합니다. 성령은 성령의 은사와 함께 옵니다. 다양하지만 본질은 똑같습니다. 야곱 아버지가 당했던 재현입니다. 야곱은 밤의 시간에 활동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낮은 인간의 활동시간입니다. 낮에 활동했던 야곱이 밤에 활동하는 천사를 만났습니다. 인간들은 밤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천사와 주님은 저녁에 몰래 활동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잠자고 있을 때 다 처리하시는 겁니다. 천사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들어가야 할 나라는 다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낮에 활동하는 인간들은 자기가 기대한 것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밤에 활동하는 분을 만나지 못해서입니다. 너희들이 아는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낮의 세계는 밤의 세계에 포위당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밤에 야곱을 만나 언약을 쏙 집어넣은 것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달라져야 합니다. 액체는 그 그릇, 환경에 따라서 다릅니다. 액체가 고체를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감정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액체 같은 아담의 요소, 악마의 성질을 감당할 수 없어요. 인간의 육은 육의 지배자를 감당할 수 없어요. 르우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 야곱에게 나온 성질들입니다. 주님의 언약과 만남에서 교체되는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열두 아들에게 분배된 것입니다. "맏이만 천국에 간다. 그런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참, 하나님은 이상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장차 십자가 지신 분이 주가 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역전적인, 먼저 된 자 나중 되게 하는 반전적인 것을 미리 구약언약에 심어놓으셨습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가 되게 만들어버립니다. 그 마지막 웃는 자가 성령을 통해서 올 때 이미 복 받은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안 바뀌는 것을 바뀌게 하는 것, 그게 십자가의 한판승부입니다. 뒤집기입니다. 착한 사람이 지옥 갑니다. 착한 자기 자신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생각보다 자기생각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담의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르우벤적인 기능의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복음을 백날 들어도 우리는 우리밖에 모릅니다. 르우벤의 성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은 오직 그리스의 피만, 그리스도의 사랑만, 그 공로만 높이는 성도일 것입니다. 그 기능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영원한 천국백성입니다.
첫댓글 주님은 인간과 반대로 일하신다.
이것이 실제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