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교회 주일오전설교(2019.4.21.) -이명직 목사-
창세기 25장 27-34절
27절,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28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29절,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30절,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절,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절,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절,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절,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오늘 절기로서 부활절이라고 하는데, 부활의 생명을 입은 자의 특징이 날마다 죽는 것이죠. 죽은 다음에 부활은 인간의 시간논리이고, 인간이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발상으로, 시간개념으로서는 죽은 다음에 부활이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이지만 항상 보이는 것에 뜻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죽은 다음에 부활이 아닌 부활된 자만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이론이죠. 항상 성경 자체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봐야 됩니다. 십자가가 구약 때는 없었고 신약 이후에 등장했는데, 그 십자가는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십자가를 오히려 창세기 앞에다가 갖다 둘 수가 있는 것이죠. 십자가가 가장 먼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일을 해나가시는 것이죠.
어젯밤에 제가 찬양 CCM이나 복음성가 같은 이런 것을 좀 올려 보냈는데, 오전에 교회 오는데 저희 어머니께서 “나무, 저주 이게 무슨 말이야?” 계속 그러시는 거예요. 어제 올린 복음성가가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은 자’거든요. 가사가 계속 반복이 되잖아요. 그는 저주를 받은 자, 저주를 받은 자. 이 노래를 저는 잘 몰랐었는데 제 아내가 일하러 갈 때 라디오에서 나오는데 유난히 저주, 저주, 저주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 일반적 노래 안에서는 소위 찬양이라는 것도 저주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데, 유난히 저주가 많이 들어가는 노래라고 하길래 제가 바로 찾아보니까 나오더라고요. 왜 그렇게 저주, 저주 말을 많이 하냐고 말씀하시길래, 아니 노래를 듣고서 말씀하시라고. 찬양을 안 들으신 것 같아요.
근데 정답은 말씀하셨어요. “아니, 예수님은 저주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렇죠. 예수님은 죄가 없고 예수님은 저주를 받으실 이유가 없는 분이신데 우리 대신해서 받으셨다는 그런 내용이죠. 그렇죠. 그런 내용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이죠. 나무. 대한민국에서는 천벌을 받을 사람을 보고 벼락 맞을 사람이라고 하죠. 벼락 맞은 사람을 보고서 이 사람은 정말 천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서는,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나무에 달린 자가 아주 저주를 받은 자라는 인식이 있어요. 왜냐하면 레위기에서도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거든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말씀했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을 그대로 믿는 유대인들은 나무에 달린 것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지금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데 어찌 우리가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믿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신성 모독죄로 죽어 마땅한 죄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예수님이 직접 찾아와버리니까, 사도바울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눈도 멀어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만 묵상하게 되죠. 바로 예수님이 갑자기, 주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듣고서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되는 거죠. 바로 그 저주는 예수님이, 주님이 당하셔야 한 것이 아니라 내 저주를 대신 당하신 분이신 것임을 알게 된 것이죠.
이렇게 성도는, 부활된 성도는 날마다 저주를 받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주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라면 저주죠. 내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이 저주고, 내가 망하는 것이 저주인데, 성도는 그 저주를 그냥 달게 받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여러 가지 몸부림들이 있겠지만, 성도에게는 저주를 받으면 그냥 받는 것입니다. “너 이렇게, 이렇게 하면 저주 받아. 너 이렇게, 이렇게 하면 죽어.”라고 하는 어떤 위협도 위협으로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부활의 생명 안에 나는 아니요, 나는 없음, 그냥 죽음이라고 하기 때문에 저주를 받든 천벌을 받든 이렇게 되던 저렇게 되던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각자 약점들이 있는데 그 약점이 폭로당하면 우리는 정말 고통스럽고 정말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약점들, 그 약점들, 정말 우리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그 약점들이 있지만 그게 드러나든 안 드러나든 상관이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고 이미 저주받으신 분, 날마다 그 저주를 드러내는 입장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반복적인 사건을 드러내기 위한 그러한 도구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주를 받든, 복을 받든, 어떻게 되든 괜찮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모습이 있는 거죠.
자,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이 있는 성도들, 그 성도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십자가인 것이고, 날마다 죽노라! 고백을 하는 것이고, 날마다 자기가 부정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지난주에 나눴던 말씀을 생각해볼 때, 22절의 말씀을 보면은요, “아이들이 그의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 할꼬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아들들이 서로 그의 태속에서 싸우고 있죠. 기억나실 겁니다.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자, 지금 가정 안에서 싸우고 있고, 내가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고, 일터에서 싸우고 있고, 뭐 교회 안에서도 싸우고 있고, 지금 떠오르는 싸움의 상대, 나 자신과도 싸울 수가 있고요. 싸우고 있습니다. 싸우고 있는 둘 중의 누가 진리인가 라는 것입니다. 항상 내가 맞다, 라는 식으로 내가 옳다, 라는 식으로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나눴던 것처럼 서로 싸우고 있는 둘 중에 누가 진리인가, 라고 볼 때에, 없죠. 없습니다. 그래도 내가 복음을 나는 내가 맞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 즉시 그건 복음을 아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복음은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대립구조가 절대 성립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끝까지 가보면 알겠네, 라는 그 말도 맞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 라는 말이겠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인간이 줄 수가 없어요. 서로 싸우는 둘 중에 누가 진리인가? 없습니다. 둘 다 진리가 아닌 거예요. 둘 다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28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야곱과 에서도 둘 다 진리가 아니고, 그들의 부모인 리브가와 이삭도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가 없습니다. 누구도 옳지 않습니다. 그냥 다 틀렸습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만이 큰 자가 되는 것이고 우리는 죄인의 괴수로서 언제나 어린 자가 되어 큰 자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고 예수님에게 건짐을 받는 것이라고 지난주에 했던 내용이었습니다. 23절 말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그 큰 자가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만 큰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맏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만 맏이인 것이죠. 자,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이 이렇게 섬기시는 입장이신 거예요. 인간이 섬기게 되면 인간은 교만해지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화를 내게 돼요. 복음서에 많이 나와요.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많이 나오고요. “아니, 제 발을 왜 씻겨주십니까? 아니,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죽으시면 안 되죠?” 내가 섬기는 입장이 되면은요,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이 안돼요. 날마다 우리는 그냥 죽은 자이고 주님의 섬김 아래에 살아가는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본인 자체가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도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섬기러 왔다, 라고 말씀을 하셨고. 자, 예수님께서 섬기시는 것이죠. 성도는 예수님을 큰 자로 인식합니다. 자신이 항상 예수님의 섬김을 받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을 의식을 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새삼 깨닫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섬김을 받는 자가 곧 예수님을 섬기는 자라고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가 섬김을 받는 것이 도리어 그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5절,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정말 어찌 보면 이 지겨운 찬송을 밤낮으로 계속해서 부른다고 하는, 이 천국의 지겹고 지겨울 수가 있다, 라고 하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어쨌든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천국에서는.
그럼 우리가 천국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거죠. 그럼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어떤 것이죠? 그것은 바로 받을 자격이 없는데, 감히 받을 자격이 없는데 어린양의 피 흘리신 그 사랑을 밤낮으로 새 노래로 부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밤낮으로 새 노래로.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피 흘리신 그 사랑을 밤낮으로 계속해서 새 노래로 부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섬긴다고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그 피의 사랑, 피 때문에, 그 피의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고백인 것이죠. 고백만 그냥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게 섬기는 것이죠.
자, 이런 내용들을 지지난주부터 계속 나눴던 하나의 주제가 있는데,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의 그런 구분을 쉽게 우리가 나눴던 것으로 볼 때에 성도인 자는 늘 항상 예수님을 의식한다, 라는 것이었죠. 반대로 성도가 아닌 자는 혼자 산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내용 안에서 말씀을 또 이해를 했었어요. 성도인 자는 늘 예수님을 의식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의식한다, 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었죠? 처음으로 나눴던 것은, 그게 몇 주 전이었는데, 제가 늘 기억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도는 늘 예수님을 의식하는데, 그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내가 사는 것이 중심이 아니구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는 게 내 사는 중심이 아니구나! 그리고 내 자존심 중심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로서 예수님을 의식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그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드렸어요. 내 사는 게 중심이 아니네. 내 자존심 중심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늘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만 천국은 예수님의 자존심이 늘 충만한 곳이에요.
천국에 대한 비유를 볼 때도 예수님이 불렀는데 안 왔다, 그럼 화가 나서 예수님이 다 몰살시켜버립니다. 예복을 줬는데 안 입고 왔다, 그냥 에누리 없이 바깥 저 어두운 곳에서 이를 갈게 쫓아내버립니다. 본인이 불렀을 때, 아 제가 이 일 좀 하고 올게요, 라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시는 분이에요. 천국은 예수님의 자존심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예수님의 자존심으로. 그러한 곳이에요. 내 자존심을 낄 틈이 없는 곳입니다. 이것을 성도는 날마다 아는 거예요. 내 자존심 때문에 발악하고 화나고 의견충돌하고, 이러한 주님이 만드신 사건 속에서, ‘아, 내 자존심 중심이 아니지.’ 이게 바로 성도가 예수님을 의식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자, 굳이 두 번째로 말씀드리자면 지난주에 나눴던, 바로 성도는 내가 섬길 왕이 있다, 라는 의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 주를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을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굳이 말하자면 이 세상은 예수님 중심이구나! 라는 것을 새삼 아는 것. 그러면서 이 세상은 예수님의 자존심 중심이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지난 주 말씀을 볼 때는 예수님을 의식한다고 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 섬기는 내용은 오히려 내가 섬김을 받는, 나는 뭘 해도 죄인이구나! 라고 하는 의식인 것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뽑혀져 나오는, 제가 은혜 받은 내용으로 나누자면 이 말씀 안에서 그렇게 예수님의 존재를 의식한다고 하는 것의 세 번째로, 바로 나의 주인이 계신다는 의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의 주인이 계신다, 라고 하는 의식. 이것은 제가 2주 동안 계속해서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제가 충만한 은혜가운데 있는 것인데, 나의 주인이 계신다, 라고 하는 의식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항상 의식하는데, 바로 그것은 나의 주인을 의식한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주제로 말씀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말씀 보면서 저는 그렇게 봤으니, 말씀 보시면서 각자가 더 깊이 주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이해하면 돼요.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을 보면 사냥을 하고 돌아온 배고픈 에서가 등장합니다. 엄청 배가 고픈 거예요. 열심히 짐승을 잡고 왔잖아요. 그 배고픈 에서는 동생 야곱이 팥죽을 막 끓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팥죽을 쑤는 것을 보게 돼요. 자, 그것을 보면서, 29절의 말씀을 보면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너무 피곤합니다. 열심히 사냥을 하고 돌아오니까 거의 죽을 정도로 피곤한 거예요. 당이 떨어진 것 같아요. 지난주에 몇 분들이랑 산에 갔는데, 산 정상에 갈 때쯤에 제가 당이 떨어져서 죽을라고 하니까, 제가 산을 제일 잘 탔었는데, 옆에 있던 분들이 얼굴이 왜 그러냐고, 힘들어 보인다고, 다행히 마침 주께서 포카리스웨터를 주셔서 그걸 먹고 살아났었습니다. 너무 정신이 없어요. 몸이 아프면 아시죠? 사람이 완전히 미쳐버려요. 몸에 당 떨어지는 것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이 있어요. 배고픔을 못 참는 사람. 제가 그런데요. 배고프면 막 참을 수가 없어요. 사람이 이상해져요.
지금 그런 심정인 것 같아요. 에서가 막 미칠 것 같은 거예요. 거친 사람이잖아요. 상남자에요. 상남자. 아주 터프가이입니다. 그냥 성경에서 볼 때도요. 멋지게 짐승을 잡아왔는데 바로 이 짐승을 요리해서 빨리 못 먹으니까 당장에 죽게 생긴 거예요. 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으니까, 야곱은 이런 광경을 많이 봤던 것 같아요. 날마다 형이 이렇게 피곤해서 돌아오는 것을. 야곱 자체가 사기꾼이기 때문에. 그래서 에서가 팥죽을 달라고 하자 야곱은 그럼 형의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말을 하죠. 그럼 나한테 형이라고 하는 그 명분을 나한테 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명분을 팔라고 거래를 이제 시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서는 명분을 바로 팔고 팥죽을 먹게 되죠.
자, 30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제가 읽겠습니다. 30절,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계속 읽겠습니다. 31절,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32절, “에서가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절,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절,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이게 오늘 본문이에요. 이런 내용입니다.
이런 에서의 모습을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죠? 이런 에서의 모습을.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냥 말씀이 떨어지면 제 말은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요. 그냥 던져지는 말씀만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냥 제 자신이 날마다 그냥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을 그냥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 보고서 이제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지, 라고 결단하는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임을 아셔야 되는 것이고, 그냥 죄인 것만 보시면 되는 거예요.
항상 우리가 살아가면서 말씀이 뚝 떨어질 때, “아, 내가 이 정도까지 죄인이었나? 내가 여기서 이러면 안 되지? 어떻게든 용서를 받아야지.” 이렇게 나가게 되는데, 그냥 어떤 상황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냥 그걸로 끝이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 보여주려고 주께서는 모든 것을 동원시킨 거예요. 그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로서 감사하면 끝인 겁니다. 그걸로 끝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자체가 아직 여전히 자기에게 주목을 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장자의 명분을 판다, 라고 해서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은 사실은 아니죠. 그것을 에서도 또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알고 있는 거죠. 근데 지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지금 그 장자의 명분이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나를, 에서가 지금 죽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너무 진짜 정말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죽을 것 같은 자신에게 자신의 배를 불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지금 당장에, 에서에게 필요한 것은 배부름인 것입니다. 배부름. 장자의 명분은 배고픈 자신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라는 것. 쓸데가 없다, 라는 것이죠.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병든 자에게만 내가 쓸데가 있느니라(마9:12). 어찌되었든 지금 에서에게는 이 장자의 명분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쓸모가 없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팥죽은 지금 내 눈앞에 분명히 명확하게 보이는데 장자권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니 당연히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죠. 이런 내용들을 복음으로 생각을 하게 될 때, 복음도 지금 유익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쓸모가 있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자, 복음도 지금 유익이 있어야 된다, 라는 것이죠. 지금 당장.
그러나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복음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정말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명확하게, 냉철하게 생각을 해볼 때 복음이 나의 삶에 도움이 됩니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내가 천국에 가는데 도움이 된다? 이거 복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안 돼요. 복음은 나에게 전혀 쓸모가 없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전혀 도움이 지 않아요. 성경 자체가, 성경 66권이 나오는 이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복음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복음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도움을 줍니까? 안 줘요. 그렇죠?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복음의 내용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죽으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삶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볍게 여기는 거죠. 성경은 이런 복음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망령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망령된 사람. 자, 성경은 복음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망령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복음은 살아가는데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아! 그렇죠?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망령된 자가 있을까 살피라. 망령, 망령이 바로 판 거죠.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복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망령’이 제 성경책에 헬라어가 나와 있는데, ‘베벨루스’라는 단어입니다. 베벨루스. 베벨루스라는 뜻을 보니, 그 뜻은 문지방을 걷는다, 라는 뜻입니다. 자, 이것을 쉽게 좀 더 말씀드리자면, 바로 성전출입구로 걸어간다, 라는 뜻이에요. 베벨루스는 성전출입구로 걸어간다, 라는 뜻이에요.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성전에서 쫓겨난다, 라는 뜻이에요.
문지방을 걷는다. 성전출입구로 걷는다. 이건 그냥 걷는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냥 성전 밖으로 쫓겨난다는 의미에요. 이게 망령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성전에서 쫓겨난다는 거예요. 성전에서. 그럼 성전이 뭡니까? 성전. 너희가 주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라고 말씀하시죠. 성전이 지금 그 성전이 아니죠. 성전은 지금 성도들 안에 있습니다. 그럼 성전이 뭐냐, 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주의 성전이잖아요. 성전은 보여 지는 어떤 건물과 형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능을 봐야 하는데, 기능이 뭐죠? 성전 안에 있는 기능은 늘 피와 죄입니다. 죄와 피에요. 죄와 피. 죄가 늘 고백이 되어 지고 날마다 그 죄를 양에다 전가하고 양의 목을 따죠. 따고 가죽을 벗기고 다 분해해서 물로 다 씻어내고 다 태워버립니다. 이런 작업을 날마다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조각조각 각을 다 뜨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완전히 태워서 완전히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 향기를 좋아하시고 주님은 죄가 타는 그 향기를 즐거워하시죠. 주님은.
자, 그렇게 성전은 피랑 죄가 같이 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때, 우리가 주의 성전이니 우리가 우리 몸을 더 강하게 가꾸어야지, 라고 하는 이것 자체는 웃기는 것이고요, 성도 안에 성전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죄와 피라고 하는 그러한 기능이 날마다 발생, 이것이 작동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의 성전이라고 하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날마다 내 안에 죄가 발생된다고 하는 것이고, 날마다 그 죄를 벗는, 그 죄를 덮어버리는 피가 날마다 기능이 발휘된다는 차원에서 주의 성전은 죄랑 피가 같이 늘 마주치는 곳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서른 살, 마흔 살, 쉰 살, 예순 살, 예순 하나, 나날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새로운 죄를 마주치는 거예요. 계속해서 내가 상상도 못했던, 아니 내가 두려워했던 그 죄가 계속해서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 죽을 때까지 그 죄가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계속 피는 덮어버리는 것이죠. 그 죄랑 피가 날마다, 날마다 기능을 하는 곳이 성도의 몸이에요.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자비가 드러나는 거예요. 나의 구원이 아닌 그리스도의 구원을 증거 하기 위한 구원 말입니다. 자,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볼 때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피와 죄가 계속 마주치는 곳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와 피와의 관계. 함께, 함께 라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성전하면 함께, 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가 없어졌으니 죄가 없다, 라고 말을 해버리면 피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죠. 이게 혼자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항상 함께 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고, 같이 라고 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데, 성전 밖으로 나가게 되면, 쫓겨나게 되면 혼자인 것이죠. 피도 필요가 없는 나는 완전한 자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혼자는 피가 필요가 없습니다. 혼자라고 하는 것은 혼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거죠. 같이 있어도, 수많은 군중가운데 있어도 혼자 있는 사람은 내가 괜찮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나는, 나에게 내가 소중한 것이고, 나에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피가 필요 없다, 라는 거예요. 피가 쓸데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망령은 뭐예요? 망령된 자는 혼자 사는 것이죠. 망령이라고 하는 베벨루스는 성전에서 출교, 성전에서 쫓겨난다고 하는 것이니까, 성전은 함께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성전에서 쫓겨났으니 혼자 사는 거죠. 혼자 사는 자가 망령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좀 더 깨끗합니다. 이게 망령된 자예요. 망령된 자. 나는 거룩합니다. 나는 은혜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죄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망령된 자예요. 주위에서 왜 다 죄라고 하느냐, 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또한 나가신 분 중에 한 분도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자체를 왜 그것을 죄라고 말하느냐?”하는데, 그렇게 굳이 말하고 안 말하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나를 부정하지 못해요. 그 사람들이.
성경 읽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고 있는 나는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을 하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개혁주의 신학이 왜 잘못되었느냐? 라고 말을 하는 것을 볼 때는 개혁주의 신학을 신봉하고 있는 나는 옳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 끄집어들여서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 이게 망령된 자입니다. 혼자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뭐예요? 혼자 산다, 라고 하는 것은 영생보다 지금 배부른 것이 낫다, 라는 것입니다. 영생보다, 여러분 성경에서는 영생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영생에 관심이 없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영생에 관심이 없잖아요. 진정한 영생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를 아는 그 영생요.
자, 영생보다 지금 배부른 것이 더 낫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는 가치도 없고 지금 당장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망령된 자, 망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 십자가를 전하게 되면 여러 가지 수많은 정보들이 우리 안에 있죠. 저도 많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또 우리 안에 각자 많은 정보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정보, 또 성경 외에 여러 가지 수많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자, 그 정보, 수많은 정보와 또한 어떤 이는 정보를 잘 풀어낼 수 있는 수사학적인 능력도 있을 거예요.
십자가를 전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수많은 정보와 어떤 수사학적인 전달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할지라도 팥죽과 같은 호감은 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팥죽과 같은 호감을 절대로 줄 수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내용 자체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복음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도 또 이러한 복음을 듣고 있으니, 나는 이런 복음이 너무 좋아! 라고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은 정말로 호감을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잖아요. 복음 자체가. 사람 자체를 기쁘게 하지 않고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다 죄라고 규정을 해버리잖아요. 사실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그렇게 좋지를 않아요. 그렇죠. 모든 말씀은 죄인인 것을 폭로시킵니다. 만약에 계속해서 모든 행실을 다 죄라고 한다면, 사실은 기분이 좋지를 않아요. 또 많이 복음을 듣고 또 이런 내용들, 또한 타성에 젖어서 복음의 내용을 듣고, 쉽게 말하면 오래된 신자가 복음을 모릅니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죠. 오래 들은 자가 복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항상.
항상 십자가는 이제, 이제야, 지금이에요. 지금. “내가 이제야 눈을 떠 주님을 봅니다.” 이 이제야가 지난주가 아니라 오늘도 그래야 되고 내일도 그래야 되고 계속 십자가의 현재성 앞에 놓여져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밝히 보여 지는 것인데,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는 내용들을 생각해볼 때,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눈앞에 보이는 어떤 본이 되는 인물들을 비교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항상 성도라면 예수님과 대조를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인물과 대조할 게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어떤 사람과 대조해서 나는 애보다 괜찮아, 라고 절대 보면 안 돼요. 성도는 항상 십자가가 밝히 보이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서야 돼요.
그러면 그 십자가 앞에 서게 되면 반드시 다 죄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 죄인인 거예요. 예수님과 대조를 해야 돼요. 예수님의 행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우리를 다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그래서 옆에 다윗과 모세와 아니면 바울과 내 옆에 있는 집사님과 권사님과 목사님과 선교사님과 옆에 있는 애들, 이런 사람들과 대조할 게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볼 때,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다 죄로 규정합니다. 그렇게 복음은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 죄라고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느냐? 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말을 할 때, 당연히 운영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주께서 우리를 모이게 하시지만, 운영이 안 될 수가 있단 말입니다.
자, 운영이 안 되면 막 하다가 갑자기 교회가 없어져버리게 돼요. 그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없어지는 거예요. 교회가. 운영이 잘 안되니까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상인 거예요. 그렇게 없어지는 게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다 또 주께서 생산시키고 발생시키고 우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또한 교회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쥐고 해나간다는 이것 자체가 아 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복음이 계속해서 일을 하고 복음이 찾아가서 성도들을, 교회를 만들어낸다, 라고 생각을 분명히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 복음은 절대로 호감을 줄 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자, 그러면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사고자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자의 명분을 산다면 모든 재산을 상속받아서, 모든 재산을 상속받기 때문에 그 장자의 명분을 그렇게 원했고 산 것이니까, 야곱도 자신이 장자권을 샀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인 이삭이 큰아들, 장자로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형에게 장자권을 샀다고 해서 모든 재산을 자기에게 다 준다는 그런 기대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여러분, 장자권은 한 마디로 상속권입니다. 상속권. 그러니까 이전에 말씀을 나눴던 대로 약속의 자손들은 재산을 말하지 않고 상속자인 것임에 대해서 그 가치를 뒀었어요. 자, 그러니까 장자권은 상속권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자, 단순히 재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장자권은.
자, 장자권은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단순히 돈을 바라본 것이 아니죠.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듣다가. 그런데 에서는 그것에 대한 것을 모르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도, 내가 지금 판다고 해도, 내가 재산을 상속받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고 문제가 없음을 생각하고 그냥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자신과 지금 죽을 것 같은 자신의 현실만 바라보는 망령된 자의 모습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자, 에서는 이런 언약에 대한 관심도 없고, 주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팔아버린 것이고 반대로 언약에 대한 엄청난 관심과 그 언약에 대한 복을 취득하고자 하는 그러한 열심을 나타냈던, 야곱이 다 계획한 거 아니겠습니까? 형이 배고플 것을 알고 지금 죽을 끓이고 있는 거니까. 자, 이렇게 야곱 또한 언약적인 복을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갖고자 하는 탐심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복을 자기가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걸 가지려고 하는 탐심을 보게 되는 거죠. 야곱이. 자, 그래서 둘 다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게 돼요.
일반적으로, 이 야곱과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욕심을 가져서 언약적 복을 얻기 위해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하는 내용도 많이 있어요. 여러분 그렇게 야곱 또한 죄 인거예요. 자기가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이걸 취득하려고 한 거기 때문에. 에서도 마찬가지인 것이고. 둘 다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예수님을 죽이는 꼴을 나타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어요. 대적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감정과 자기 느낌대로 그냥 주님과 상관없이, 주의 생명과는 상관없이, 성경은 관심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라고 말하면서 복음의 삶을 영위해가며 열심히 나를 부인하며 거룩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나 저들이나 다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인 거예요. 구약은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고 그 이방인들을 다 멸절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서 우상숭배라는 것 때문에 주께서 멸절시켰다고 하니,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말씀중심, 성전중심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살아갔던 그들이 결국 행했던 것이 뭐였죠? 바로 예수님을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 저러니 다 예수님을 죽이는 꼴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열심히 행함으로 살아가니까, 이게 바로 죄라고 했으니, 이제 열심히 행하지 않는 쪽도 있어요. 그럼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체도 행함이기 때문에 이래도 저래도 다 죄 인겁니다. 우리 안에 다 죄밖에 발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이 상속권, 장자권, 곧 복음이라고도 볼 수도 있고요. 이 상속권은 우리 앞에 눈물이 나는 현실에서, 정말 비참한 처절한 눈물이 나는 이 현실 속에서 정말 기쁨을 줄 수 있는 건가? 라는 그런 생각과 정말 내가 죽을 것같이 배고픈, 정말 죽을 것같이 너무나 힘들고 배고픈데 누가 와서 내가 밥 한 그릇을 줄 테니까 믿음을 팔라고 한다면, 만약에 그렇게 그 복음을 팔라고 한다면,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볼 때에 지금의 상황만 볼 때는,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있는 상황만 볼 때는 믿음이라고 하는 그런 것은 아무런,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주님의 영생과 믿음, 이 복음은 이 세상에서 전혀 쓸모가 없이 느껴질 때가 계속 우리 안에 나타나는데요. 그리고 이 복음이 잠깐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것이 세상의 모습인데, 그 모습이 우리 안에 계속 나타나는 것이죠. 자, 지금의 상황만 볼 때는 믿음, 복음, 이런 것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일 때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자, 그런데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지금이 종말이지만, 주님이 오시는 이 마지막 때에는 세상에서 믿음이 가장 귀한 보배로 남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부분을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처해져있는 상황과 현실 가운데에서 믿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지만, 세상 마지막 때에는, 마지막에는 바로 믿음이 가장 귀하고 믿음 하나만 남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만. 잠깐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여러분, 세상의 마지막 때에, 종말이 확정된 그러한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믿음을 보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은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인 거죠.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을 해보겠다, 라는 것입니다. 자, 마태복음 8장 10절을 찾아보겠습니다. 자,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자, 이렇게 백부장에게 하신 유명한 말씀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이 믿음이 뭘까요? 예수님께서 보신, 인정하시는 믿음이요? 이 믿음은 뭐냐 하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믿음입니다.
아까 초반에 말씀드린, 성도는 예수님의 존재를 항상 의식하는데, 오늘 생각했던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의식이죠. 그러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믿음은 뭐냐 하면은 나의 주인이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이요. 나의 주인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주인이 계신다는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계속 이런 논리들을 열거했습니다. 첫 번째 성도가 예수님의 존재를 의식한다, 라는 이 명제를 던졌을 때, 이거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으로서는 이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니구나! 내 자존심 중심이 아니네! 이거였어요. 두 번째는 예수님만을 의식한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섬긴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섬김은 결국 예수님이 나를 섬긴다,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 오늘은 성도가 항상 예수님을 의식한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의식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의식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 내용이에요. 시키는 대로 그냥 사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산다는 것. 자,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그 내용을 생각해 볼 때, 여러분 오늘 내용을 다 생각하고 잊으신다고 하더라도 내 주인이 되신다는 의식가운데, 내 주인이 계신다는 의식은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만 기억하셔도 좋아요. 왜냐하면 저는 그것만 계속 생각을 했었는데요. 오래전부터 제 이야기를 하자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냥 기도해요.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일어나서 바로 기도를 합니다.
여기서 늘 하는 기도는, 마지막으로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하고요. 제가 기도하는 것은 “주여, 오늘도 살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주님 시키는 대로 살겠습니다.” 그냥 이게 저에게 무의적으로 나오는 습관성기도에요. 근데 이 내용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시키는 대로 사는 겁니다. 잊어버려요. 기도해놓고서 잊어버리는데, 주님께서 나중에 알려주시지만. 시키는 대로 산다는 의식인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사는 거예요. 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산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계신다는 의식이에요.
자, 그러면 생각해볼 때, 우리가 지금 백부장 이야기가 나온 마태복음 8장을 읽어본 거예요. 그렇죠. 8장 10절을 읽어본 겁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지 못했다고 예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이 나와요. 어찌되었든. 자, 그런데 이 믿음은 뭔가 봤더니,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9절을 보세요.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자, 이 내용이에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온다, 라고 하는,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산다는 이 믿음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때 마태복음 8장이라는 자체가 7장 다음에 나오는 거죠. 원래는 장이 없지만 장을 매긴 것을 볼 때는 이어진 내용이에요.
자, 그러면 7장은 무슨 내용이냐 하면은 유명한 산상수훈입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 이 세장이 가장 유명한, 나름대로 도덕윤리를 뛰어넘는 엄청 깊은 내용을 갖고 있는 산상수훈이란 말이에요. 자, 5,6,7장이. 그러면 예수님께서 산에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시고 내려오시고서 나오는, 발생된 사건입니다. 8장 1절을 보면은,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라는 말씀이 나와 있죠. 자, 산상수훈을 쫙 설파하시고 나서, 내려오시고 나서 나오는 사건들입니다. 자, 그러면 산상수훈이 마쳐지면서 시작되는 이 8장 내용을 볼 때, 곧장 누가 등장하는가 하면은 나병환자 한명이, 나병환자가 등장을 해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2절 말씀,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이렇게 시작이 되죠.
자, 그러면 여기서 볼 때에, 이걸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겠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정말 깨끗함을 받은 사람은, 주의 이 말씀을, 모든 것을 실천해내는 율법의 실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지켜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속으로 짓는 죄까지도 이겨내는 것. 자, 깨끗함을 받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실천이 아니라 뭐예요? 바로 예수님으로만 받음을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어요. “내가 이렇게 말씀을 지켜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내가 깨끗해졌다.” 여러분, 이렇게 살아온 것 자체가 저주인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못 살았으니 나는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까? 이렇게 두려워서 어떻게 해요?”라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저주아래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를 쥐고 있는 것이고, 내가 믿어서라도, 깨끗하게 살아서라도 천국 가고자 하는 심보라는 거예요. 자신의 문제를 볼 수가 없어요. 모든 영역에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의 실천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예수님으로 받음을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3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이렇게 나와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은 내가 율법을 실천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만 받을 수 있어요. 어떻게요? 못 받아요. 그러니까 몰라요. 본인만 아셔야 돼요. 저는 이 말씀을 나누니까 저도 그냥 그렇게 알 뿐인 것입니다. 저도 몰라요. 예수님께서 그냥 깨끗해지게 해줬으면 깨끗해진 것입니다. 내가 그걸 실천해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 깨끗해지는 칭의를 입었다, 그러면 내가 계속해서 거룩한 성화를 이루어야 된다, 이게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인간의 철학적 발상인 거고요. 불교인 것이고요.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했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막 살아도 돼? 이렇게 나오는 것 자체가,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자기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이고 아직 죄가 뭔지를 몰라요. 죄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데요. 여러분, 우리는 죄를 못 짓습니다. 주님만이 죄를 알려주세요. 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인가는 주님이 그냥 알려주시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해도 모릅니다. 주님이 알려주실 때만 그냥 죄 인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 죄를 인간 마음대로 지을 수가 없어요. 자, 그렇게 예수님으로만 깨끗함을 받는 것을 말씀하시죠.
그래서 나병환자는 2절 말씀대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이렇게 말을 하죠. 여기에 나병환자의 그런 생각이 있어요. 뜻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이냐 하면은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두고 있는 거예요. 주여 원하시면, 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두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주님이 깨끗하게 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연합니다. 마땅합니다.”라는 태도가 항상 있다, 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돼요.
여러분, 주님이 나를 지옥에 보내셔도, 정말 끔찍한 생각이지만, 주님이 저를, 우리를 지옥에 보내신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처럼 주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연합니다, 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으로 말을 한 거죠. 이것 자체로 보면 자기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았어요.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거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 이미 주님이 하신 일로서의 결과물로 나타나는 것을 봐야 돼요.
성경은 성령 받은 자가 쓴 것이고, 성령 받은 자가 쓴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성경을 볼 때 자신의 추악함만 드러내요. 요한복음을 볼 때도 자기가 가룟 유다 보다 낫다, 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요. 요한 자체가요. 내가 유다라고 말하면서 쓴 거예요. 요한복음 봐도. 마태복음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게 그래요. 내가 바로 그런 자라고 하면서 성령 받은 자가 썼단 말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이요. 그리고 십자가가 바로 창세기 앞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렇게 말씀을 봐나가는 것이죠.
이렇게 볼 때에, 여러분, 나병환자의 모습을 통해서 이미 주께서 하신 일을 보게 되는 거예요.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남아야 된다는 그런 생각가운데 예수님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면 하신다는 말을 통하여서, 낫든 안 낫든, 혹시 깨끗하게 해주든, 안 해주든, 당연하다는 그런 태도인 것이죠. 이렇게 자기의 주체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는 것을 가지고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믿음인 거예요.
이게 인간으로 발생되는 믿음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믿음이라는 거예요.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 주께서 행하신 일이 자기에게 도착되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닌 거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나에게 그냥 도착했음을 인정하는 게, 그게 믿음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렇게 된 거예요. 주께서 구하게 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긍휼로 구하게 하신 것이고,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는, 지금 우리가 강대상도 이거고(보면대), 기타를 치고 있고, 피아노도 없고, 우리 모여 있고, 앉아서 예배 안 드리고 서서 예배드리고(장소가 좁아서 서서드리는 분도 계심), 여러분 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구애받으면 안 되고, 항상 예배는 모든 원인을 예수님께로 돌려드리는 거예요. 제가 지금 나누지만 예배드리든 안 드리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안 드려도 주중에 그냥 드리시면 돼요. 그런데 항상 기억하셔야 할 것은 모든 원인을 예수님께로 돌려드리는 거예요. “예수님 때문에 내가 이 모양이네요. 이렇게 됐네요. 이런 일이 일어났네요.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이 발생됐네요.” 이게 예배인 거예요. 예수님을 주로 높이자는 그 말이. 그렇죠. 모든 원인을 주님께로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영광이고 예배인 것입니다.
자, 이렇게 주체가 분명히 다르죠. 나를 생각해서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이 찾아오셔서 주님을 찾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이 믿음을 본다, 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예요? 곧 나 믿음 없음이죠. 내가 믿음 없다, 라는 거예요. 내가 믿음 없는 것을 본다, 라는 거예요. 내가 믿음이 없다, 라고 말하는 그 믿음요. 그 믿음. 믿음 자체는 내가 믿음이 없다, 라는 거잖아요. 날마다 믿음 없음을 폭로당하면서 주님에게 끌려가는 것이잖아요. 그 믿음을 내가 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인 한 백부장을 찾아가시죠. 자, 찾아가신 거예요. 찾아가셔서 이스라엘의 믿음이 천국의 믿음이 아닌 것을 증거 하십니다. 오늘 8장 말씀이 그러해요. 이스라엘의 믿음이 천국의 믿음이 아닌 것을 예수님께서는 폭로시키는 내용이에요. 8장 자체가. 8장 11절, 12절 말씀을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절,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내용이에요.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볼 때에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 결국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자, 이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고 했는데, 그 나라의 자손들은 어떻다고요? 바깥 어두운 데에 쫓겨나서 울며 이를 가는,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께서 백부장을 찾아가셔서 드러내신 것이 뭐였냐면 너희들이 믿는 믿음이 지옥에 갈 믿음이다. 이들은 확신을 갖고 있었어요.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구원파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자체가 이 사람이 지옥 갈 사람인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은 뭐죠? 내가 구원받겠다, 라는 것이고 나는 구원받았다, 라는 자기 구원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오류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이스라엘의 믿음이에요.
자, 11, 12절 말씀을 보면 11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언약을 위한 구원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언약을 위한 구원이에요. 언약 완성을 위해 동원된 구원이에요. 인간 나 자신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구원인 거예요. 구원이 그러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천국에 간다는 그러한 확신의, 이스라엘식의 믿음은 구원이 불가능한 것임을 예수님께서 지금 나타내보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에 확실히 간다, 라는 그 생각, 바로 그것, 그 확신 자체가 이미 믿음과 십자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그러한 생각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들어 세움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믿음이, 믿음이 아님을 지금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고자 열심을 낸 사람들입니다. 자, 열심을 낸 사람이죠. 구원받았으니 율법을 지켜야 된다, 라고 하는 사상이에요. 유대교 사상이 그러해요. 유대교의 가르침이 이미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으니까 율법을 우리는 열심히 지켜야 된다, 라는 이 메시지에요. 한 마디로. 많은 그런 사람들의 메시지하고 똑같아요. 유대교 메시지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자가 아니라 구원받았으니까 지켜야 된다, 라고 하는 거예요. 유대교 메시지가 그러해요. 자,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자 열심을 냈는데, 천국은 이러한 ‘열심’이 담긴 믿음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건 거예요.
예수님께서 계속 하신 말씀이, 회당에서 가르치신 말씀도 인간의 모든 실천과 행함을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을 계속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계속 그렇게 하셔요. 일부러 열 받게도 많이 하십니다. 유다가 떡을 먹고 사탄이 들어갔어요. 이것도 몰라요. 성령 받고 나서 안 거예요. 요한이. 예수님은 열 받게 만들어놓고서는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말입니다. 누가 이렇게 “너 그거 죄야!”라고 말하면 갑자기 화가 나서 하는 행동들이 있죠. 그렇게 돼요.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가 나를 팔자다.”라고 그냥 줘버리잖아요. 그 말 듣고 화가 나서, 더 분노가 극에 다다른 것이라 말입니다. 화를 내게 만들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손은 그렇게 가게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굳이 그렇게 말을 하죠. “그거 죄야!” 이렇게 말하면서 다 부서져버리죠.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고. 주께서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백부장의 믿음이 뭐죠? 이스라엘의 믿음이 천국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예수님께서 본 자손은 떨어져 나가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는데, 그 백부장의 믿음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거죠. 그럼 그 백부장의 믿음을 우리가 또한 닮자! 그럼 그 백부장의 믿음을 발견해서 그 백부장의 믿음대로 살자! 라고 하는 그것도 또한 율법을 내가 지키고자 하는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그것도 아닌 것이죠. 그것조차도 이스라엘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가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으로 우리가 살자, 라고 하는 것 자체도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그냥 내 주인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내 주인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믿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내 주인이 살아계신다는 믿음, 다시 말씀드리자면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뭐예요? 그냥 시키는 대로 사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여러분,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이 뭐죠?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이에요. 그냥 뭘 했지만, 그냥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요. 하지만 연연하죠. 저도요. 그러니까 거짓 믿음이 폭로당하면서 끌어가시는 거예요. 우리 모두를. 그냥 할 바를 했기 때문에 그냥 하루만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만 사니까요. 많은 내용들이 들어가 있어요.
마지막 세상 끝에 믿음을 보겠느냐(눅18:8), 라고 할 때에 그 믿음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믿음인데, 백부장을 통해서 드러난 믿음인데, 이 믿음이 아니고는 다 바깥 저 어두운 데서 이를 갈고 운다, 라고 했는데, 그 믿음은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으로서, 바로 그냥 주님이 나는 무익한 종이니 그냥 할 바를 한다, 라는 내용으로서 믿음은 절대로 내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기꾼들의 거짓된 믿음을 볼 수가 있어요. “내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체적으로 그냥 아닌 것입니다. “내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 줄 알아! 내가 이때 결심했고 내가 결단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게 뭐예요? 이스라엘의 믿음, 구원의 확신 믿음이죠. “내가 이때 구원받았어.” 구원의 확신, 자기구원을 지금 자랑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구원은 없습니다. 언약을 위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구원일 뿐이에요.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재료로 사용되는 것을 성도는 그냥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렇게 그냥 구원의 재료로 살아가는 것을 아는 거죠. 다른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져줄 주인이 계시고 나는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산다, 라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시키는 대로 사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면 돼요. 그럼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이것저것 말씀을 드렸지만, 각자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하고 싶은 감정대로 산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느껴지는 느낌대로 산다, 라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 이것도 분명히 생각을 하셔야 돼요. 시키는 대로 산다, 라는 것은 나에게 지금 들어오는 감정대로 산다, 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대로 산다, 라는 것은 뭐예요? 잘 생각해보면 이거는 내가 지금 나한테 시키는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내 감정대로 산다, 라는 것은 내가 지금 나에게 시키고 있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감정이 말씀 안 읽을래, 기도 안 할래, 교회도 안 나갈래, 내가 이렇게 할래, 내가 쟤한테 저렇게 할래, 이 자체가 자기한테 자기가 시키고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게 혼자 사는 사람이에요. 이게 주인이 없다, 라는 겁니다. 주인 없음이에요. 주인 없음. 자기감정대로 살잖아요.
그리고 내가 죄인인 것 같아. 죄인인 것 같아서 이렇게 저렇게 절차를 밟아야 하고 내가 믿음으로 결단해야 돼! 여러분 이게 뭐예요? 자기가 지금 시키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죄 안 짓고 사는 거고, 어떤 부류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 죄짓고 살고 있는 거예요. 또. 여러분, 이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시키는 대로 사는 사람은 본인이 본인에게 일을 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거는 주인이 없는 사람, 자기가 주인이죠. 여전히 자기가 주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주인이 계신다는 의식, 나에게 주인이 계신다, 라는 그 의식은 내가 주인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이죠.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날마다 폭로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제가 너무나 이것에 감사한데, 아! 여러분, 시키는 대로 사는 거예요. 성도는. 시키는 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오늘은 몸이 힘들고 아프니까 저 사람 안 만나야겠다. 나 저기 안 가야겠다.’ 이게 주님이 시키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거예요. 내 감정대로. ‘내 기분이 이러니까 내 감정에 충실해야지. 이런 말을 막 던져야지.’ 여러분, 이거는 뭡니까? 이거는 자기가 자기한테 지금 시키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은 성도라면 예수님을 의식하는데, 예수님을 의식한다, 라고 하는 것은 나의 주인이 계신다는 거예요. 그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죠. 이게 백부장의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럼 주인이 시키는 대로가 뭐냐고 하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바로 내가 나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셔야 돼요. 항상 말을 제가 아시겠죠? 라고 말을 하는데, 어떤 형제님이 이 목소리까지 똑같이 흉내 내면서 맨날 들으면 모르겠는데, 아시겠죠? 라고 이런다고 그래서. 자, 나의 일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아는 거예요. 이게 시키는 대로 사는 겁니다. 엄청난 은혜인 것입니다.
나의 일이란 원래 아예 없었음,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주의 일이에요. 이게 주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관계나 살아갈 때에 모든 일이 다 지금 생각하면 매치가 되실 거예요. 지금 설교하는 것? 지금 제가 죄짓고 있는 것이잖아요. 십자가 앞에 다 죄란 말입니다. 뭐가 죄냐 할 게 아니라 십자가가 내 눈앞에 보이면 본인만 알아요. 십자가가 내 눈앞에 보이면요. 십자가가 내 눈앞에 보이면. 자, 만약에 제가요, 이걸 하면서 누가 또 오고 안 오고 신경을 쓰면서, 그리고 제가 어떤 죄를 지었어요. 여러 가지 내가 선한 일을 했어요. 내가 볼 때에 악한 일을 했어요. 여러분, 시키는 대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내 일이 없어요. 나의 일이란 아예 없다, 라는 것을 주께서 알게 해주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합류적인 일로서 그냥 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저는 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아, 내가 만약에 했고, 못했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때는, 이게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시키는 대로 안 사는 거죠. 안 사는 겁니다. 혹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어요. 이것 때문에 고통스러워요. 자, 그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에요. 그냥 그거는. 나의 일이란 아예 없었음을, 새삼 순간순간 알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이게 시키는 대로 사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사는 게 뭐예요?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밖엔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밖에 없어요. 아, 예수님을 위한 세상이고 나의 일은 존재하지 않았구나. 내가 이렇게 잘하고 열심히 했는데, 이건 내 일이 아니었구나. 나는 죄만 퍼질나게 지었네. 예수님의 일만 증거 하는 자로서, 죄인으로서 죄짓고 살았음을 사후적으로 알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 때문에 화가 불현 듯 막 일어났습니다. 내가 무시당하고 내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고통스러워요. 자, 이때, 내 일이 없구나! 이건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이 이렇게 발생시켰네! 주님이 시켜서 모든 게 이렇게, 이렇게 나왔었구나! 주님이 시켰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사건이 일어났구나! 내 일은 없구나! 내가 이렇게 여기서 발작했던 이게 바로 예수 죽인 죄였구나! 이렇게 예수님만, 그냥 예수님의 일만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거예요. 아침에 눈뜨자마자 오늘도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살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한 주간 실컷 눈뜬 것 자체만으로도 죄 인건데, 그냥 죄만 퍼질러 지으면서, 아, 나의 일이란 없었네. 그냥 주님의 일만 있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이 부르실 때에는 제자들도 자기들 일만 행했어요. 내가 더 높아지려고. 인정받으려고. 주님은 그냥 이끌어가세요. 그러니까 모든 게 주님의 일이에요. 항상 주님은 부르시고 주님은 주님의 일만 하시고 우리는 우리 일만 해요. 복음 안다고 하지만도 계속 복음도 모르고, 계속 또 뭘 원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데, 주님은 그냥 주님의 일을 이루셔요. 그렇게. 야곱도 다 지옥가야 되는데, 거기서 그냥 야곱은 주님이 끄집어내서 사용하신 겁니다. 아, 어찌되었든 장자의 소중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중함을 갖고 있어요. 주께로 건짐 받는 사람은 본인이 압니다. 본인이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본인이 안다 말입니다. 아시겠죠?
주님이 시키는 대로 산다, 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주님이 시켰다는 것이고, 모든 걸 다 주님이 시켰기 때문에 모든 게 발생되는 것이고, 이 모든 일은 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내 개인적인, 내 개인적인 단독성을 가진 존재성도 없고 일도 없다,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얼마나 평강이고 감사입니까? 정말 이것만큼 큰 은혜와 예수님 안에서의 안식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안식은 없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 마지막 날에 보시는 믿음이에요.
세상 마지막 날에 보는 믿음이 뭐라고요? 예수님만 계속 알아가는 거예요. 예수님만 말하고 예수님만 바라보니까. 예수님만 원하고 예수님만 사모하니, 그 예수님을 볼 때 그 예수님만 그냥 보는 거죠. 예수님만 바라보는 사람에게 예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 아니요 예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세상은 예수님의 일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변해도 내가 예수 죽인 것밖에 이 세상은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죽였다는 그 사실만 역사는 계속 남아있어요. 모든 것이 바뀌었어도. 근데 그 죽인 자를 용서하신 그 예수님 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는 성도되기를 기도합니다.
첫댓글 주님께서 또 언제 시키실지 모르시겠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녹취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주님께만 미친, 그 미친 복음을 전해주셔서요.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설교의 테크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설교에 감사했다.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바울은 복음을 그냥 던지듯이 던졌다.
그렇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