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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존재감. キリスト者の存在感 (2024년 4월 14일 주일예배)
본문: 요일 3:1~7
요일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4 ○죄를 짓는 사람마다 불법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6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7 자녀 된 이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같이 의롭습니다.
1. 御父がどれほどわたしたちを愛してくださるか、考えなさい。それは、わたしたちが神の子と呼ばれるほどで、事実また、そのとおりです。世がわたしたちを知らないのは、御父を知らなかったからです。2. 愛する者たち、わたしたちは、今既に神の子ですが、自分がどのようになるかは、まだ示されていません。しかし、御子が現れるとき、御子に似た者となる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なぜなら、そのとき御子をありのままに見るからです。3. 御子にこの望みをかけている人は皆、御子が清いように、自分を清めます。4. 罪を犯す者は皆、法にも背くのです。罪とは、法に背くことです。5. あなたがたも知っているように、御子は罪を除くために現れました。御子には罪がありません。6. 御子の内にいつもいる人は皆、罪を犯しません。罪を犯す者は皆、御子を見たこともなく、知ってもいません。7. 子たちよ、だれにも惑わされないようにしなさい。義を行う者は、御子と同じように、正しい人です。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의 매력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관계에 의해서 자신의 소유물과 성취감에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의 존재감이 갖는 능력에 대해 사도 요한의 가르침으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은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과 일상에서 동행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 체감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이미 주님께서 동행하고 계신 것을 실감나게 경험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은 사자후(獅子吼)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어미 사자를 잃은 새끼 사자가 어느 농가에서 양들과 함께 길들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새끼 사자는 자신이 사자인 줄도 모르고, 양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양처럼 풀을 먹었습니다. 목소리도 양의 그것을 흉내 냅니다. 야트막하게 울타리를 쳐 놓은 양의 우리에서 벗어날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그 삶의 터전도, 음식물도 애초에 사자의 몸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목소리도 잘 내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왕따가 되어 버립니다. 겉모습은 사자의 것을 갖고 있지만, 내면세계는 다른 양들보다 못난 것을 붙들고 있습니다. 자존감과 존재감은 잊혀진 지 오래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 멀리 광야에서 숫사자의 포효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소리가 귓전을 때리는 순간 그의 피는 맹수의 본능을 일깨웁니다. 사자후에 응답하듯 자기 목소리로 포효합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토록 따라하려던 양 한 마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습니다. 지금까지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양 우리의 울타리를 부수며 광야를 향해 뛰쳐나갑니다. 사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이 사자후처럼... 사도 요한이 성도에 대한 극심한 박해와 온갖 방해, 그리고 고난과 고생스러움을 견디며 겨우겨우 버티듯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쓰는 강력한 증언입니다. 사자의 본성을 깨우는 사자후처럼 우리의 존재감을 일깨우는 단 한마디의 촌철살인의 영적 사자후를 들읍시다.
오늘 본문의 1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라고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성경을 꽉 짜서 액기스를 내면 ‘사랑’이라는 말로 응축된다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성경은 사랑을 강하게 증언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성도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암송하는 요한복은 3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 주실 정도로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직접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어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이 직접 만들거나 사연이 있는 물건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소유물’과 ‘소장품’의 차이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소유물’은 삶의 스토리가 없이 그저 갖고만 있는 것이고요. ‘소장품’은 삶의 스토리가 들어 있어서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소유하는 것은 1년이 지나도 쓸 일이 없으면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스토리가 배어 있는 소장품은 쉽게 버릴 수가 없지요. 인간의 소장품도 그러한데...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하고 아끼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심지어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랑의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똑같은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원래는 그도 충분히 구원을 받을만한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단지 당신을 믿는 자들만 자격조건을 따져 속속 골라서 천국에 보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걸러내어 지옥에 떨어뜨리는 정도의 조건부 사랑이라면, 그것은 종교의 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사랑의 저력을 평가절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증거로 당신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물론 이 말만 갖고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소장품과 같은 창조세계를 사랑한다고 아들을 속죄제물로 삼다니... 참으로 하나님은 잔인하신가? 하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32)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 주신 것은 그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이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점은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모든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스스로 제물이 되어서 속죄의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능력의 측면으로만 보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 삶의 고통과 죽음의 고난에 동참하고 체휼, 다시 말해 함께 경험하시기 위해서였다고 믿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분명 예수님은 죽으시지만, 다시 살 것을 하나님은 예언서를 통해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언된 예수님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관람하듯 보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외치셨습니다. 시편 22편에 나오는 탄식의 기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고 외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그 끔찍하도록 고통스런 고난과 저주의 잔을 지나치게 하시거나, 고통스럽지 않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기도와 탄식은 아버지의 그것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하나님도 그 아들의 아픔과 수치를 공감, 체감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죽으신 아들을 사흘 만에 부활시킬 것도 미리 약속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을 즐기셨던 것은 아닙니다. 기적의 능력이 있으셨지만, 자신을 제한하신 것입니다. 왜죠?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짧은 말 한 마디로 그 사랑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풀어주셨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도인 우리와 복음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세상이 그 사랑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성도를 박해했습니다. 성도를 무시했습니다. 복음을 등한시하였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님 당신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세상의 소유를, 명예를 얻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십니까? 그 아픔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임하여 함께 고통하고 계심을 잊지 마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고통과 고난, 그리고 낙심과 절망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알지 못하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이 성도인 우리가 누릴 것들에 대해서 대체로 이 땅에서의 형통과 성공만을 말하는데요. 그것은 육신의 가진 인간의 이상적인 소원일 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하고 좋은 것은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는데도 형통하고 성공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저주일 수 있습니다. 그의 형통함과 소유가 그의 영혼과 미래를 오히려 망하게 할 것입니다. 성경의 잠언은 여러 곳에서 지나친 소유가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맘몬이라고 불리는 돈의 신을 섬기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데, 그 중심에 재물과 그 욕심의 때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올라가는 데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유하신 어떤 목사님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1-5)
그리고 말세를 살게 될 부유한 자들에게는 이렇게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 6:17-19)
물론 소유와 재산이 넉넉하지 않으면 순간 고민이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요. 갑작스런 일을 위해서 비축해 놓은 돈이 없으면 불안하고, 마음에 짜증이 생기며 불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에 꼭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소망으로만 그 고민과 염려를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떠오르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본문의 1절에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2절에서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1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러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시고, 2절에서는 이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데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의 세속적인 현실은 신분만 변화되었고, 실제로는 그 신분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가령 예를 들어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신분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정말 삶의 여건이 하루아침에 변화되었나요? 어떤 사람들은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져 있었다고 고백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유명해지기까지는 수도 없이 많은 성실한 하루들이 쌓여 있었던 뒷이야기도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신분이 변화되는 것과 그 신분에 합당한 환경을 체감하는 것은 다르게 여겨지는데요. 오늘 본문의 1절과 2절의 뉘앙스가 바로 그러합니다. 1절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부여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 즉 영적 신분의 변화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그런데 그 권세를 사용하고 누릴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요.
아기가 태어나면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과 자는 것, 먹는 것과 싸는 것 밖에 없습니다. 물론 가끔 어른들을 향해 웃어 주는 것처럼 보이는 배냇짓도 하지요. 갓난아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른바 “사람구실”을 하고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시간과 여러 가지 배움이 필요하지요.
하나님의 자녀로 갓 태어난 사람, 거듭난 사람은 하루에 하루만큼 자라나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과 세월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로 성장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신분에 합당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 때 거룩함과 구원의 열매가 맺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배워가는 과정에 중에 있는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지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 4:13,15)
우리는 주님을 만나서 구세주로 고백하는 순간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 삶의 자리에서 체험과 배움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마지막 날에 주 예수님을 만나 뵙고 변화될 모습에 대해 오늘 성경은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모두 잠에서 깨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하시는데요. 그때 우리가 모두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지요.
...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 15:51b-52)
본문의 2절 후반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는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우리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주님과 같은 모습... 즉 부활의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노력이나 실력으로, 혹은 수행하여 득도에 이르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 때에 반드시 주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변화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의 상태에 관하여는 누가복음 24:36~47절까지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소망으로 사는 사람, 임재의 복음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거룩함을 지키며 사는 사람인 것을 믿습니다. 4절부터 7절까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성도는 하루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며 죄를 대적하며 사는 것이다... 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죄를 이기는 능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매일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리고 감사의 제목들을 정리하면서 제게도 바뀌어가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 진행형인 것도 있구요. 이미 완전히 극복하여 정리가 된 것도 있고, 종종 유혹이 오지만, 주님께 신경 쓰는 기회로 삼게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과정과 진행 중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어머니께 대한 노여움입니다.
처음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생긴 어머니를 향한 노여움이 제 안에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게 정돈되면서 그런 저의 모습과 직면하였습니다. 부모님을 향한 노여움은 점점 견고해지고 교묘하게 자기변명을 하면서 여러 가지 죄와 허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교만과 시기, 음란함과 폭언, 거짓과 사기 등등... 그러나 이제는 주님과의 친밀한 동행을 연습하며 하나하나 제거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제 안에 쓴 뿌리처럼 도사리고 있던 노여움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죄짓게 하는 쓴 뿌리와 같은 악한 의지와 자아를 주님의 보혈로 처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범죄의 열매가 하나 둘 씩 고사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6절에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 쓴 뿌리처럼 도사리고 있어서 우리가 범죄로 열매를 맺는 죄의 자아, 죄의 의지를 그리스도께서 없애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쓴 뿌리’는 소위 내적 치유에서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과거의 상처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이지요. 물론 마음의 상처가 쓴 뿌리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지요.
신명기 29:18절에 이스라엘 백성 안에 존재하는 쓴 뿌리는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신 29:18)
히브리서 기자도 이 말씀에 근거하여 믿는 자들 안에 아직 자리잡고 남아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은 내면의 상태를 쓴 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상처를 노여움으로 키우는 악한 의지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 악한 의지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의 방법으로 노여움을 키워온 의지가 쓴 뿌리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쓴 뿌리를 주님 앞에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주님께서 모든 악한 의지를 보혈로 덮어 죄를 없애 주시고, 의를 행하는 거룩한 자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의 존재감은 먼저 사자후와 같은 복음을 들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며 거룩함을 연습하며 점점 뚜렷해집니다. 이것은 죄를 없애기 위해서 애쓰는 수행이나 도를 닦는 과정이 아닙니다. 먼저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뚜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시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이름만 하나님의 자녀였던 우리가 지금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생활을 실습하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매 주일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그 은혜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교회 문을 나설 때부터 본격적인 실습이 시작되고 있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의 삶은 주님의 성령님과 동행하는 기회인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 날에 부활의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주님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마지막 날의 약속이 구체적인 현실이 될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내면에 깊이 내린 쓴 뿌리와 같은 불신을 예수님의 보혈로 씻읍시다. 그리하여 정결한 모습으로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대하며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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