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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동행. 欠けることのない同行。( 2024년 4월 21일 주일예배)
본문: 시편 23:1~6
시 23: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1. 【賛歌。ダビデの詩。】主は羊飼い、わたしには何も欠けることがない。2. 主はわたしを青草の原に休ませ/憩いの水のほとりに伴い3. 魂を生き返らせてくださる。主は御名にふさわしく/わたしを正しい道に導かれる。4. 死の陰の谷を行くときも/わたしは災いを恐れない。あなたがわたしと共にいてくださる。あなたの鞭、あなたの杖/それがわたしを力づける。5. わたしを苦しめる者を前にしても/あなたはわたしに食卓を整えてくださる。わたしの頭に香油を注ぎ/わたしの杯を溢れさせてくださる。6. 命のある限り/恵みと慈しみはいつもわたしを追う。主の家にわたしは帰り/生涯、そこにとどまるであろう。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에 대한 주님의 약속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감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드러나고 환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나타내 주시는 존재감으로 살 때 비로소 모든 갈등과 난관, 그리고 고난과 고통, 아픔, 불안과 불평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존재감에 의지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존재감으로 든든하고 축복이 풍성하게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시편 23편인데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역성경 번역으로 많이 암송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저도 또한 마음에 공허함이나 혹은 속된 욕심에 대한 유혹이 피어오르려 할 때 암송하며 마음을 지키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특히 가장 첫 번째 구절을 반복하여 고백하면서 기도하면 언제나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심을 체감하게 되는데요. 이는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기 위해 신념을 불태우기 위한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떠올리면 주님께서 부족함이 없는 삶에 대해서 눈을 열어 주시고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하치오지에 개척을 하기 전에 신주쿠의 중앙영광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사역을 했었는데요. 당시 릴레이 금식기도회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금식하고, 시간표를 만들어 자원하는 기도자가 한 시간씩을 예배당에서 자리를 지키며 릴레이로 기도하는 기도회였습니다. 지금은 한 시간을 기도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요. 당시는 한 시간을 기도한다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저런 중보기도와 기도제목을 떠올리며 기도를 했는데요. 그러고도 아직 40분 이상이 남았습니다. 그때 당시에 암송하고 있던 로마서 8장의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그래서 주님께 기도할 고백을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떠오른 구절이 곧 시편 23편이었습니다. 성경을 펼쳐서 1절부터 6절까지를 고백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1절을 반복하여 고백하며 기도하는데 내면이 채워지고, 부족함이 없다는 구절이 믿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마음과 생각으로는 부족하지 않은 나의 삶과 이 세상의 질서와 주님의 섭리하시는 증거들이 마구 떠오르게 하시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너무 짧게 느껴진 시간이었는데, 어느새 릴레이기도를 이어갈 다음 순서의 기도자가 예배당에 온 것을 알고 자리를 비웠는데요. 제 사무실에 가서도 그 감동이 이어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제가 단지 시편을 암송했더니 갑자기 기도를 잘하게 되었다는 성공사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반복하면서 고백하며 기도할 때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어야 부족함이 없고 넉넉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그리고 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물리학적으로는 뭔가 채워져야 할 공간이 비어있는 것을 부족하다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대체로 사람들은 소유의 부족함에 갈급함을 느낍니다. 관계의 부족함에 갈증을 느끼지요. 또한 건강의 부족함에 아쉬워하며, 인생을 돌이켜 보며 시간의 부족함에 후회하며 한숨을 쉽니다.
물리적이고 육신적인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 넘치는 결핍의 일상을 겨우겨우 버티며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 일본사회의 비주류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하면 더욱 그 부족함과 결핍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본문,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지요. 우리에게는 여전히 재정적인 결핍과 인간관계와 여러 가지 행실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이유를 주님과의 관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나누었던 그리스도인의 존재감과 같은 맥락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 시를 지은 이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그의 인생이 그다지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제 중에 막내였지만, 아버지로부터 귀여움받는 존재가 아닌 집안의 허드렛일을 땜빵하듯 맡아서 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왕의 측근이 되는 좋은 자리에 있었지만,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왕이 된 후에도 큰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또 도망을 다녀야 했지요. 이 외에도 다윗은 조금 편하게 지낼 만하면 문제가 생기는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편하게 지낼만 하면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해결하여 이제 좀 한숨을 돌릴만 하면 뭔가 바쁜 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오는 일상이 아닙니까?
다윗만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 인생이란 이미 고생과 분주함과 번잡함, 그리고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난의 바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성경도 인생의 모든 노력들은 괴로운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전 1:13)
소위 금수저를 물고 나온 사람이나, 흙수저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나, 모든 것이 갖춰진 집안에서 태어나 출발선이 이미 한참 앞서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이미 인생이란 각자의 괴로움과 고난과 결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허무하고 고생스러운 삶이라도 부족함이 없는 길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주님을 목자로 고백하는 내용인데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 10:11)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바로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기 위한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의 모든 것을 상세히 알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시며,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시며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선한 목자는 자기의 목숨을 버려 양들을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4-15)
바로 이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자기 양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증거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육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함께 조각한 십자가가 아니라 비어있는 십자가를 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아 죽으시고 끝나지 않고,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의 삶에 임재하시고 동행하고 계신다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10:17)
그리고 오늘 본문의 2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나다운 나로서의 평안과 안도감을 체감하며 살게 하신다는 뜻이지요. 이는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구절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일용할 양식인 ‘꼴’이 있는 풀밭과 갈증을 해갈할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하십니다. 영혼이 소생하는 것이 곧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단시 육신의 욕구와 갈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에 생기가 돌고 활력과 활기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는 곧 소망을 갖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활력과 생기가 도는 일상생활을 회복하는 것이 소망을 갖는 것이며, 이는 영혼이 소생한다는 표현으로 고백하는데요. 영어 성경 중에는 이 구절을 Refresh라고 번역한 책들이 많습니다.
인생과 일상에서 매일 기대감과 소망을 하루에 하루만큼 갖게 되는 것이 곧 영혼이 소생하는 것이며, 또한 영어로 refresh하는 것이지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한 그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소망에 대해 기쁨을 느끼며, 주님께 기대하는 것을 기도할 때 우리가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으로 체감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께서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우리를 기뻐하게 하시며 기도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본문의 4-5절은 우리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결코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임재하시며 동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비록 사망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되더라도 두려움이 없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막대기와 지팡이를 갖고 계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그중에 21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계시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어 하나가 되게 해 주시길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주님과 동행하며 그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안심하며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소원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불안한 마음이 생기고, 의심하게 되더라도... 그 염려와 두려움은 소용이 없는 허무한 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죽음이 코 앞의 현실로 다가오는 그 어떤 고난과 절망과 괴로움에도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신 것은 도무지 부정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는 진리요, 사실이며, 현실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결코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고 영광인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육신을 가진 인간이 보기에는 고난이지만, 실은 육신의 소욕에 절어 있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나를 미워하는 원수와 같은 존재 앞에서 잔치의 상을 차려 주시는 주님의 축복인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사망에 속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멸망으로 향하는 이기심에 물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 신념에 가득 차서 분노하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탐욕과 탐닉에 휘둘리며 분주하고 정신없이 사는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러한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자기 신념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을 따라 살아갈 때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는 주님의 풍성하고 풍족한 축복을 영원하도록 누리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잔이 주님께서 부으시는 기름으로 넘치고 또 넘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6절에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반드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특별히 믿음이 좋아서... 그래서 놀라운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연약함과 사악함을 가진 인간입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질그릇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담겨진 보화를 그는 잊지 않고 반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보화가 지금 우리 안에도 계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다윗은 영원토록 여호와의 집에서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이라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임하여 계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실력과 재능으로 자랑을 삼을 일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질그릇과 같은 나에게도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주님을 자랑하며 감격할 수 있는 눈이 열리시길 축복합니다. 지금 당장 어렵고 힘들고 괴롭고 죽을 것 같이 불안하며 두려워 떨리고 짜능나서 싫은 환경이라면... 오히려 주님을 더욱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욱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꾸 자신의 일과나 행실을 개선하려 하거나, 채우려고 하거나, 더 모으려고 하거나 하기보다 먼저 주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와 가장 선한 것을 우리의 삶과 내면에 충만하게 차고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과 재능, 그리고 재산과 넉넉한 인맥으로 편리하게 살 수 있어야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평안과 안도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으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임재하심을 분명히 체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문제와 역경, 그리고 환란 가운데에서도 평강을 누리며, 안심하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소유와 실력, 그리고 인맥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분명하다면 문제는 사라집니다. 더 이상 부족할 것이 없는 일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직 주님과 동행함으로 모든 다가오는 문제에 넘어지지 않고, 디딤돌을 삼아 더욱 풍성하고 충만한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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