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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직 아악생 양성소(李王職 雅樂生 養成所) 고종이 강제 폐위된뒤 교방사를 장악과(掌樂課)로 고쳐서 궁내부(宮內部) 예식과(禮式課)에 부속시키고 국악사장(國樂師長) 이하 305인의 인원을 줄였으며,김종남이 초대 국악사장이 되었다.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궁중의 각종 자체행사가 줄었기 때문이다. 1910년, 일본이 강제로 대한제국을 병합한 후 궁중음악은 더욱 험난한 수난을 겪는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장악과는 아악대(雅樂隊)로 바뀌고 305명의 궁중악사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아악사장 이하 189인의 인원으로 줄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이 종묘제례를 위해 장악과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자, 일제는 대신「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아악(雅樂)이라는 말은 ‘정아(正雅)한 음악’이라는 뜻으로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고, 궁궐 밖에서 연주하는 속악(俗樂:민속악)에 대비해서 궁중음악을 총칭해왔다. 1911년엔 또다시 180여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리고 4년 뒤인 1915년에는 84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이 인원으로는 종묘제례악 연주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도 안되는 숫자였다. 1917년에는 또다시 48명을 해고(解雇)하여 이제 겨우 남은 악사는 57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왕직아악부에 최소한의 인원만 허용했다. 수 백년의 전통을 가진 아악은 위기에 처하였고 더욱이 노령(老齡)과 총독부의 지원 부족으로 해가 거듭될 수 록 쇠락(衰落)의 길을 걷게된다. 이러한 위기를 막고 아악의 보존과 육성을 목적으로, 1917년에 설립한 기관이 이왕직아악부가 부설한 아악생양성소(雅樂生養成所)인 것이다. 장악원(掌樂院)에서 잔뼈가 굵은 조선의 마지막 원로(元老) 악사들은 턱없이 부족한 인원으로 온갖 행사를 치루며 궁중음악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우선 1917년에 3〜5년 과정의 ‘아악부원 양성소’를 설치해 악생을 모집하며, 인원을 안정적으로 확충하면서 궁중음악을 계승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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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제는 불과 20년만에 궁중악사 772명에서 무려 715명을 줄여 57명으로 만들어 버린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ㅡ단재 신채호~~
일본 놈들이 우리의 역사를 말살시키려고 아주 악랄하게 시도를 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미력하지만 정악을 좀더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야 겠습니다
57명이면 정말 말살수준이네요
온전히 전승되기엔 턱없이 역부족이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