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vXq3x4hz9gM
(안치환 노래)
부용산(1948)
박기동 시 안성현 곡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 노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노래로 과거 운동권 학생들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간간이 불리어진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1998년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위원이 이 노래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신문에 소개하면서
노래는 본격적으로 세인의 주목을 끈다.
아울러 같은 해 목포 항도여중 출신 경기대 김효자 교수(아래 사진 右)는 동국대 정종 교수가 보관
하고 있던 부용산 원본을 건네 받아 세상에 발표한다.
또 한 사람 목포 출신 연극인 김성옥은 오랜 세월의 집념으로 노래의 배경과 악보를 찾아 내 목포에서
부용산 음악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 분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밝혀진다.
노래는 목포 항도여중생 김정희(사진 左)의 요절(병사)을 애도하며 같은 학교 교사였던 안성현이 동료
교사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곡을 단 것, 당시 빨치산들이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는 것.
또한 작곡자 안성현은 6.25 때 월북하였고 작사자 박기동은 호주에 이민 가 있다는 사실 등.
1999년 집념의 사나이 김성옥은 호주(시드니)까지 박기동을 찾아가 노래에 관한 소상한 내용을 직접
듣는다. 아울러 노래의 2절 가사를 지어 줄 것을 권유한다.(노래 가사는 1절뿐이었다)
박기동은 이건 무슨 형식같은 거 없이 읊은 자유시여서 2절을 붙이는 게 어색하다고 사양한다.
그러나 멀리까지 찾아와 준 성의에 못 이겨 결국 붓을 드는데,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히 예 서 있으니' 대목을 쓰면서 한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절은 다음과 같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2절 가사는 1절 가사 후 반세기를 훌쩍 넘겨 다시 쓰면서도 저 애잔한 정서가 전혀 손색 없이 이어지고
있다. 때에 선생의 나이 83세였다.
83세에 쓴 저 2절 가사를 보니 한 영웅의 모습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박기동은 1917년 여수 돌산도에서 태어난다. 어려서 벌교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자랐고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를 졸업한다. 귀국하여 교직에 봉직한다.
1947년 순천사범학교 재직 시 남조선 교육자협회에 가입하여 한 성명서에 서명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부용산'과 함께 평생의 굴레가 되는 것이었다.
그 성명서는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신생 한국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것이라
한다. 이로 인해 4개월 구금을 당하고 6개월 교사직 정직을 당한다.
같은 해 누이동생이 병사하여 벌교 '부용산 오리길'에 묻고 그 슬픔을 못 이겨 시 한 편을 짓는다.
바로 '부용산'인 것이다. 그 때 선생의 나이 31세였다.
1948년 목포 항도여중으로 전근을 간다. 거기서 안성현 음악 교사를 만난다. 안성현은 동경 동방음대
성악부 출신이다. 나이도 비슷하고 생각이나 의기가 서로 맞아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된다.
여기서 누이동생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쓴 시가 안성현에 의해 병사한 학교 학생을 위한 조가가 되는
것이다.
6.25가 터지면서 선생은 고난의 길로 접어든다.
노래 '부용산'의 작곡자가 월북한 점,
이 노래를 빨치산들이 부른다는 것.
(아마도 가사 중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하는 대목에서 애처롭게 죽어간 동지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과거 남조선 교육자협회에 가입했다는 것,
48년 김구 일행이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북행할 시기에 쓴 '밤중에라도 어서 가야지'라는 헌시 등의
이유로 좌익계열로 몰리며 늘 감시 하에 지내게 된다.
선생은 결국 교직을 접고 서울로 올라간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관의 감시와 탄압 속에 살아야 했다.
어떤 시국 사건만 생기면 연행, 구금, 폭행, 가택수색, 심지어 시를 써 둔 노트 까지 여러번 뺏앗긴다.
이는 군부 독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명색이 시를 쓴다는 사람이 자신의 '시집'한 권 내놓을 수 없다는 현실에 깊이 좌절한다.
1993년(76세) 시인은 분과 한을 안고 결국 단신으로 호주로 떠난다.
조국을 떠나가는 저 분의 뒷모습엔 과거 이 나라의 일그러진 모습이 빼곡히 박혀 있을 것이었다.
선생은 이 2절 가사를 보내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써놓고 보니 좀 껄끄럽게 된 것도 같고 너무 애상적으로 흐른 느낌이 없진 않지만 원래 「부용산」
이란 시와 곡에는 그런 뉘앙스가 다분히 흐르고 있으니 어떡합니까. 눅눅한 음지만을 헤매던 이 곡이
소리의 주인공을 만나 햇볕 쏟아지는 양지로 나온다니 반갑습니다.
아옹다옹 쫓기고, 뜯기고 할퀴면서 이것도 사람 사는 동네인가 싶을 만큼 썩어 문드러진 현실을 살아
가는 우리 동포들 중 몇 명이라도 이 노래로 인해 위안을 받는다면 보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2003년 귀국하여 2004년(88세) 영면에 든다.
작곡자 안성현은 2006년 북한에서 타계하였다 함.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도 안성현이 작곡한 또 다른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벌교 '芙蓉山 시비' 앞에 선
일시 귀국한 박기동 시인(右, 2000)
左측에 작곡자 안성현 미망인 송동을 여사도 참석하고 있다.
https://youtu.be/QPUw13Yvd2s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시 안성현ㅡ 김광수곡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