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람들은 근대 합리주의에 의한 ‘이성’의 보편성을 믿어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규칙이나 약속을 지키고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계산적인 합리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물론 이수현씨 사건과 같은 숭고한 인간의 ‘사랑’ 정신에 대해서는 누구나 진심으로 감동하지만, 일상의 사소한 사건에서 정이 규칙을 앞설 때에 일본사람들은 “근대 합리주의는 세계의 상식이다”라는 사고방식으로 한국사람을 비판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일본사람도 그 소요되는 시간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에 오래만 살게 되면 장담하건대 모두가 결국 어떤 하나의 ‘진실’에 대해 깨닫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때까지 그렇게도 비판하던 한국을 완전히 긍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것은 한국 문화에 대해서 머리로 아무리 생각을 하고 있어도 알지 못하는 마음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찾아 온다.
이번 호에는 필자 자신에 있어서의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에 대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 이어 남이 들으면 그냥 우스갯소리로 밖에 안 들릴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경험이다.
◈ “'나'와의 관계인가, '필름'과의 관계인가?”
이것은 내가 한국인 아내와 결혼을 해서 하숙을 나오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결혼식에 참가한 하숙 여동생이 자신이 나와 있는 사진을 현상하고 싶다며 그 필름을 빌려 달라고 했다. “소중한 거니까 꼭 돌려줘” 나는 잊지 않고 그렇게 말했지만 좀처럼 돌아 오지 않은 채 수개월이 지날 무렵 이번에는 그 여동생이 러시아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옥희였는데, 내가 다른 일로 하숙집에 들러 옥희를 본 것은 유학 가기 전 고향 부모님께 인사를 하기 위해 하숙집을 비웠다 마침 돌아왔을 때이다. 조만 간에 그녀가 짐을 싸서 러시아로 유학 갈 것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내 소중한 결혼식 사진 필름이 러시아 하늘 아래로 가 버려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보자 마자 무심코 "옥희야! 내 필름 돌려줘야지!"라고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오빠! 오빠 머릿속에는 필름 밖에 없어요? 고향 갔다 와서 오래 동안 보지도 못했는데 어째서 ‘보고 싶었다’, ‘보지 못해서 외로웠다’, ‘안보는 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 ‘고향 어머니는 건강하셨냐’, ‘감기는 안 들었냐’ 라든가 그런 말들은 한 마디도 없는 거에요?! 오빠와 나와의 관계이에요, 오빠와 필름과의 관계이에요?”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도 못 했지만 정말로 충격이었던 것은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나의 상식과는 다른 또 하나의 상식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두 상식 가운데 나 곧 일본인으로서의 상식은 “빌린 것은 돌려준다”는 규칙인 반면, 그녀가 갖고 있는 한국인의 상식은 “친한 사람과 오랜만에 만났을 때는 약속, 규칙, 대차, 물건 등등 다른 뭔가를 떠올리기 이전에 ‘보고 싶었다’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인간이다” 는 상식이었다.
옥희는 “반가워서”라는 말을 썼지만 ‘반갑다’라는 말은 일본어에 없다. 그래서 번역할 때에는 ‘만나서(원인) 기쁘다(결과)’라고 풀어야 되지만 그 설명으로는 ‘반갑다’가 갖는 뛰는 마음의 심정세계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다.
이 때 그녀의 마지막 말 “오빠와 나와의 관계인가요 아니면 오빠와 필름과의 관계인가요?”라는 물음은 내 마음 속 깊숙이 박혔다. 나에게 정말로 소중한 것은 인간이냐 아니면 다른 뭣이냐…. 내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한국과 일본의 이 두 개 상식 가운데 나에게 훨씬 더 필요한 소중한 상식은 한국의 그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물건이나 기계였다면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한국의 문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내가 그러한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나는 한국 문화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다.
모든 일본사람들은 한국의 문화를 진실로 만나게 됐을 때에 비로서 하나의 인간된 자기 자신의 둘도 없는 가치를 알게 된다. 이것이 나의 한국 생활 16년의 결론이다. 나 자신이 그 때에 처음으로 진정한 인간이 될 수가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
그 며칠 후에 내 필름은 돌아왔다.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필름이 자기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는 거 같이 느껴졌다. 그런 ‘물건’보다 훨씬 중요한, 말로는 그 값어치를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한 것을 그녀로부터 배운 기쁨에 나는 가슴이 벅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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