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문(효자문으로 솟을삼문이다.) |
안채 (서편의 연못터는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
사당(정면 3칸, 측면 1칸에 전퇴가 있으며 초익공식 맞배지붕) 이곳에 이천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
본문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민속자료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태조의 조카이자 개국공신인 완산부원군 이천우(李天祐)의 증손 이효상(李孝常)이 이곳에 정착한 이후, 500여 년간 20대손이 살아온 전주이씨 양도공파(襄度公派)의 종가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영광 수성도별장(守城都別將)이었던 이응종(李應鐘)의 생가로서, 그가 수성 대책을 세우는 의병청(義兵廳)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숙종 연간에는 이상호(李相虎)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정려(旌閭)가 세워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남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대지 위에 남향으로 건물을 배치하였으며 솟을대문인 정문과 사랑채, 안채 그리고 사당으로 구성되었다. 3칸 솟을대문과 중문은 일직선상에 정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정문을 들어서면 동쪽에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1895년(고종 32)에 건립하였으며, 서편의 연못터는 현재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건립연대를 알 수 없는 안채는 중문을 지나 축에서 약간 어긋나게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안쪽 공간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안채의 동쪽에는 부속채가 있고, 뒤편에는 대나무 숲을 이룬 경사진 지형이 있는데 이곳에 축대를 쌓고 장독대를 두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에 전좌우퇴(前左右退)를 두고 팔작지붕이며, 2고주 5량가의 일(一)자형 겹집이다. 두벌대의 다듬돌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조는 왼쪽부터 머리방 1칸, 큰 대청 2칸, 큰 방 1칸, 부엌과 정지대청 1칸, 건넌방 1칸 순이다. 전면 중앙부와 좌퇴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창호는 2짝 여닫이 띠살 창호이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에 전후좌우퇴가 있는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외벌대의 낮은 다듬돌 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圓柱]을 세운 다음 주두와 툇보, 장여, 도리를 결구하였다. 방 1칸, 대청 1칸, 방 2칸의 순으로 구성되었고 방 2칸은 겹으로 배치하였다. 상량문에 ‘을미년(乙未年)’이라는 기록이 있어 1895년(고종 32)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전퇴가 있으며 초익공식(初翼工式) 맞배지붕이다. 이곳에 이천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에는 종가의 호제집이 있어 양반과 노비들의 주거형태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유적지탐방에 올려진 내용
전남 영광군 묘량면 영양리 567-1 사유 이동혁
영광 이규헌가옥
종 목
시도민속자료 22호
소재지
소유자
연락처
전주 이씨 양도공파의 종가집으로 임진왜란 때 영광 수성도별장을 지낸 이응종의 생가이기도 하다. 사랑채는 건물에 적힌 기록(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고종 32년(1895)에 지었다고 한다.
크게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나눌 수 있다. 안채는 앞면 6칸·옆면 2칸 크기로 앞쪽과 좌우에 퇴를 두었고 방·대청·부엌·건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옆면 1칸 크기이며 앞뒤로 퇴를 두고 방과 대청으로 꾸몄다. 사당에는 양도공 이천우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배치와 구성이 조선시대 민가형식의 전형을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