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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 문화와 언어 사상 그리고 관습 등을 통해본 의의 이해
히브리사람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의 사상에 의하면 보고 말하고 듣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죽은 자 일수도 있음과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을 받았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라는 말은 정확하게 동의어라고 언급해드렸습니다. 즉 히브리사람들의 복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신 대로 충만한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복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못 배우고 못살고 못생겼다고 해서 아이고 지지리도 복도 없는 놈 그러면 안 되시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의라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의하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으로 많이 해석을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그런 의미와 조금 다릅니다. 성경은 타락한 모든 인간을 가리켜 불의한 자다 그럽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8절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예수님이 우리들의 불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8장 12절로 갑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도대체 의가 뭐고 불의가 뭐길래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 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5장으로 갑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다 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었다 그럽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하셨다 그럽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뭘 했길래 의롭다 그러시죠? 창세기 15장 6절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럽니다. 아브라함이 뭘 했나요? 아브라함이 죄를 멀리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수준까지 잘 살아냈기 때문에 그가 의롭다 이렇게 칭함을 받은 것입니까?
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거기서 의를 이야기 하셨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서구사상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의가 뭡니까? 어떤 도덕적 윤리적 수준을 정해 놓고 거기에 맞게 살아내는 것을 우리가 의롭다 그러고 그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을 우리가 불의하다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조차도 의 하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사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어졌고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 이렇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의라는 것은 그런 서구 사고에서 나오는 의 Justice Rightness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이 의에 대한 개념은 이러합니다.
네페시 이 존재는 항상 관계를 갖고 살게 됩니다. 네페시와 네페시와의 관계 네페시와 자연과의 관계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 관계 속에서만 우리들은 존재하게 돼있습니다. 이 네페시는 존재들은 그 관계의 대상이 요구하는 것이 있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면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그 관계의 요구가 있습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순종하고 자기를 의지하기를 원하는 그런 요구가 있고 자식들은 부모가 나를 보호해주고 사랑해주고 하는 그런 관계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하는 그런 관계가 요구하는 내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사람들은 그 관계가 요구하는 그 내용에 맞게 살아내는 것을 의롭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너무 엉터리로 배워왔기 때문에 여태 알고 있는 것들은 다 내려 놓으시고 새롭게 쌓아가셔야 됩니다. 성경에서 이 의 라고 하는 것이 오해될 만하게 쓰인 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를 속이고서 후사를 얻기 위해서 시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며느리가 후사를 얻기 위해서 시아버지와 동침했다는 것을 알고 이 유다가 다말을 가리켜서 네가 나보다 의롭다 사다크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게 뭐가 의로운 것입니까? 며느리가 시아버지 속이고서 시아버지하고 동침을 한 게 의로운 것입니까? 그것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따지면 화형에 처해져야 됩니다. 유다가 화형 시켜 버려라 그럽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이 그게 의롭다 그러는 것입니까? 다말은 하나님과의 그 언약의 관계 안에서만 충실한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의롭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 관계 안에서 충실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하신 분이다 뭐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대상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끝까지 지키신다 라는 것입니다.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신다 라는 것이 하나님은 의롭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로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를 보이십니다. 어떻게요?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몰살시키십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 안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해야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민족들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분처럼 그렇게 대하신 것입니다.
사사기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과 야빈하고 그 시스라와 군대를 모두 몰살시킨 후에 드보라가 찬양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가리켜서 의로우신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니 아무리 다른 민족이라도 그렇지 가가지고 어린아이 부녀자까지 다 몰살 시킨 것이 의로운 일이냐 말입니까? 그렇지만 성경은 그것을 의롭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충실히 언약을 지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롭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의 의에 대한 개념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그 네페시들이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을 의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의에는 관계 당사자에 대한 이해와 순종과 경외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대상에 대한 경외감과 순종함과 이런 것들이 있어야만 그 대상이 살아내라는 대로 살아낼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타락을 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복을 잃어 버렸고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게 된 사망의 죽음의 지배를 받는 죽은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죽은 자였습니다. 그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보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그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전 보지도 못한 어떤 영감이 나타나가지고 떠나라 그러는데 어떻게 믿었을까요? 하나님이 오셔서 그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순순히 순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아브라함이 순순히 따르겠다고 대답을 했단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기셨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해버린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의로 여기심을 받은 분들이란 말입니다. 그 개념을 잘 알고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언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까 라고 이렇게 질문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목적이 있으셨습니다. 의도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 라고 선악과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만 하면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명기 6장 25절 보면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그 언약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에게 하셨지만 우리 전 인류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언약을 어겼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아서 6장 7절 보시면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그럽니다. 아담은 그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몫을 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불의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네페시가 그 관계에서 요구되는 행위를 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불의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불의한 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자들 중에서 어떤 무리를 의롭게 만드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의 관계가 요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회복을 시키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첫 모델을 바로 아브라함으로 삼으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타락을 했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보여주십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될 것이다 하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믿자 그를 의롭다 여기십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실 것인지를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시는데 재물을 쪼개 놓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홀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어떤 언약 약속을 할 때에 재물을 쪼개 놓고 그 사이를 이 약속 당사자가 손잡고 지나가게 돼있습니다.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쪼갠 고기처럼 죽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거기를 누가 지나가십니까? 하나님 혼자 지나가십니다. 내가 내 몸이 쪼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약속은 지킨다. 왜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원래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시면 왜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 성자 예수님을 죽인 게 자기의 목숨을 내놓은 것인지 금방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끝까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그 행위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6장 13절 보시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했다라고 나옵니다.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맹세하셨다는 것입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목숨을 걸고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보시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다 우리를 붙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목숨을 끊어버리셨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 라는 말의 진의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의로운 자가 되었다라는 말의 진의가 바로 그 뜻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언약 관계 당사자들을 건져 내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들은 의롭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왜 전 인류를 다 건지지 않으셨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 중에 우리를 건져 내셨다라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로마서 5장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제 화평하게 됐습니다. 그 관계가 회복이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의롭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절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장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지금 들으시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지금 들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그 복음을 이해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 의로운 자 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하는 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 가 된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 그래서 우리가 의로운 자로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삶을 살겠다 라고 하는 것을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선물하시는데 다른 방법을 쓰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 붙여 놓으신 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그 의의 상태가 불의의 상태로 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제는 더 이상 타락하지 못하게 더 이상 하나님을 배반하지 못하게 우리들을 예수님과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할 수 없으신 예수님께 우리를 그냥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왜요? 우리를 다시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또 타락할까 봐 우리에게 이제 영원한 그 생명 영원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에게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영원히 타락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그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그 영원한 생명을 100%의 happiness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기 위해서 예수에게 붙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게 Union Christ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요구하시고 의도하신 내용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어떤 명령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문화명령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바로 이 요구가 복을 받고 의롭게 된 영생을 얻은 우리들에게 다시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지상 대 명령이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제 복음으로 가서 세상을 정복해라 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땅을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 창세기에 우리에게 처음 명령으로 주어졌던 그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했던 이 내용을 우리는 지킬 수 없는 자였는데 십자가 때문에 지킬 수 있게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너희는 복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우리는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명령을 이 회복된 명령을 우리에게 해 놓고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하신 데로 완전하게 재 창조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를 자랑하고 그 나라만을 소망하며 그 나라로만 위로를 받는 참 복을 받은 의롭다 하심을 받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교회인 것입니다.
이제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명은 무엇인지 의라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 자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걸 아시는 분들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복음으로만 위로를 받습니다. 다른 위로는 거절하는 자들입니다. 다른 위로들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곧 소멸되어 버리고 불타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이 복음이 돋을새김으로 양각되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우리들이 명확히 알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설교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교회인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우리들이 생각할 때에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재수없는 놈 같아 그렇게 느끼는 만큼 힘이 들 때도 우리들은 이 복음만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 복음으로만 위로를 받으시고 감옥에 있을 때 찬양을 하고 실컷 두들겨 맞고 나오면서 하늘을 보며 기뻐했다는 그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었던 진정한 행복과 그 기쁨이 우리들의 기쁨으로 이해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시는 그런 분이 있으시다면 지금 예수께서 당신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음성이 선포되었습니다. 그 죽은 자들이 살아날 때 그 죽은 자들이 그 말을 알아 들을 때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 예수를 믿으시고 그 예수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들이 살 길입니다. 그 예수를 믿으셔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