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속에서 예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1)-허병섭
<허병섭 그는 1941년 경남 김해에서 가난하게 태어났다.
경상도사람은 전라도사람들에게 역사적으로 많은 빚을 갖고 있다면서 지역감정 해소에 앞장을 섰고 많은 전라도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계기가 되었다. 허병섭목사, 아니 인간 허병섭은 항상 새로운 실험을 향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는 현재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에 귀농하여 생태교육을 통해 이세상의 희망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는 자신을 소심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고 남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내성적인 볼품없는 사람이었는데 어렸을 때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접하고 소시민적인 자신의 성품과 이웃에 대한 해야 할 역활을 명확히 인식하였다는 그의 말은 예수를 본받고 살고자 하는 참신앙인이 현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위의 권유에 의하여 허병섭목사에 대하여 소설형태의 글로서 기록을 준비하는 과정에 그의 삶의 행로를 통해 가식적인 기독교인으로서 나는 많은 반성을 하였다. 아래의 2편의 글 중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꼬방동네 허병섭'은 일전에 KBS 역사스페셜(감추어진 현대사)의 일부 내용을 제가 부분적으로 보완 편집하였고, 나머지 한편인 '허병섭목사와 포장마차'는 양국주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1.'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꼬방동네 허병섭'
<꼬방동네 목사 허병섭>
70년대 서울 신설동 창녀촌을 무대로 소외계층의 삶을 그려낸 영화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 여기에 빈민 목사로 등장하는 공병수 목사,
그 실제 인물이 허병섭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도시빈민의 대부',
'살아있는 예수', '길 잃은 목자', '목사직 버린 달동네 성자'.
청계천 꼬방동네에서 중랑천 뚝방으로 서울의 어두운 그늘을 찾아다니면서
가난한 자의 벗이고 형제이고 부모였던 허병섭 목사.
그는 그들과 똑같이 입고 자고 먹고, 목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빈민으로 살며
그들과 애환을 함께 했다. 가난과 절망과 자기멸시에 빠져있던 그들에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도록 이끌었다.
병든 그들에게 무료 진료를 알선하고, 집 없는 그들에게
공동주택조합을 만들어 내집 마련의 방법을 가르치고,
당국의 무자비한 철거정책에는 몸으로 맞서 싸웠다.
<유신정권에서 온갖 고초을 겪고>
1971년 박형규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활동가들은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라는 빈민선교단체를 만든다.
이 단체의 활동가들은 판자촌으로 대표되는 근대화, 산업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빈민들의 권리를 인식시키는데 주력했다. 허병섭은 제대와 동시에
선교위원회의 총무를 맡고 신설동 꼬방동네로 들어갔다.
76년 선교위원회를 눈엣가시로 여기던 당국은 선교위원회가 북한과
조총련의 지시로 남산공산화를 시도했다는 조직사건을 꾸민다.
허병섭과 박형규 목사 등 선교위원회 관계자들은 시경 대공분실로 끌려가
50일 이상을 온갖 취조와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 뒤로 가난한 자의 편에 서고자 했던 그는 20여 차레
연행 구금 고문을 받아야 했고, 도피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월곡동 달동네에 세운 최초의 민중교회 - 동월교회>
청계천 뚝방동네가 철거되자 허병섭은 월곡동 산꼭대기 달동네로 들어간다.
그는 여기에 동월교회라는 민중교회를 세우고, 민주적, 민중적, 민족적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실험을 했다. 임진택씨와 함께 판소리로 설교하고,
국악 찬송가를 부르고, 심지어 무당과 굿을 하면서 예배를 보기도 했다.
교회가 단순히 예배 보는 곳, 주민들에 자선을 베푸는 곳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 스스로 참여하고 깨닫고 자립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다.
달동네의 가난한 맞벌이 부부에게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던 아이들을 모아
82년 교회 안에 '똘배의 집'이라는 탁아소를 세우고, 자모들 스스로
이 사업을 운영하도록 해 주민들이 자립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했다.
그들을 위해 외쳐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것이다.
최초의 탁아방이라 할 수 있는 '똘배의 집'은 이후
87년 탁아소 입법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목사에서 막노동꾼으로, 다시 노가다 공동체 대장으로>
88년 그는 결국에는 목사직까지 버리고, 노가다 미장이가 되었다.
목사라는 신분이 가지는 마지막 권위를 끝내 벗어버렸다.
그리고 진정한 빈민으로 살기 위해 막노동판에 뛰어 들었다.
변변한 기술없이 1년을 거의 무보수로 잡부생활을 하며 미장기술을 배웠다.
막노동꾼들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담배도 배웠다.
90년 허병섭은 하월곡동 노동자 15명과 함께 최초의 막노동꾼 공동체
'건축일꾼 두레'라는 조직을 만든다. 건축노동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건축주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간 알선업체들이 공사비의 4,50%를 가져가는
다단계 도급체계 때문임을 알고, 이를 건축주와 건축노동자들의
직거래를 통해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두레'는 여덟시간 노동엄수,
생활비보장, 성실공사, 이익균분과 재산공개, 잘못된 공사장 관행과
건축용어 바로잡기, 상부상조로 살기좋은 동네 육성을 모토로 삼았다.
먹고 살기 위해 고용되어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의 주체가 되어
공동체의 자립 자활 위해 스스로 하는 노동, 이를 통해
달동네 노동자들은 천대와 소외감과 자기멸시를 떨쳐 낼 수 있었다.
두레 등 허병섭목사의 실천적인 활동을 모형으로 현재의 자활후견기관의 제도화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흙에서 깨닫는 밀알의 삶>
96년 허병섭은 무주로 내려왔다. 억압받고 소외된 도시 민중들의 삶,
그 속에서 꿈꾸었던 민중세상을 뒤로하고 허병섭은 이제 흙에 씨를 뿌리고
흙이 되돌려 주는 대로 거두는 농부가 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나니'라는 성경구절처럼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값진 열매를 맺기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생각하기 보다 먼저 실천하는 삶,
그는 그의 삶을 이제 흙이라는 새로운 실험 속에 올려 놓고 있다.
<이젠 일생을 후진양성으로>
그는 명예 등을 앞세워 남에게 절대로 알리지지 않을려는 사람이다. 자신을 일종의 일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알의 밀알이 되는 존재로 남기를 원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제정구 선생과 청계천빈민운동으로 해외에서 막사이사이 상 수상자로 추천되었을 때 자신은 극구 수상을 거부하고 대신 제정구님에게 이를 양보하였다는 일화도 주변사람들이 나중에 글로써 이를 세상에 알렸다. 그는 특히 주민조직에 관심을 갖고 구체적인 현장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고 이를 자신의 문제로서 극복하도록 이들과의 관계설정을 중요시한다.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소비의 근원지인 도시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현재는 자연을 중심으로 생태교육을 통한 후진양성에 모든 정성을 쏟고 있다.
2. 허병섭목사와 포장마차
허병섭목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논산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최전방에 배치되었던 겨울 성탄절 전야였다. 학생운동 하느라 감방에서 정보부로,보안사로 끌려 다니며 쥐어 터지다 청와대 입구에 있던 수경사 병원에서 한 밤중에 신검을 마치고 자원입대서라는 종이에 사인을 한후 강제 입영된 탓에 세상과 권력에 대한 항명이 많았다. 그 해 겨울 강원도 깊은 산골에는 서러운 눈물인양 눈도 많이 내렸다. 암울했던 박정희 정권의 독재 열기가 정점으로 치닷던 무렵, 도심 생활에 젖어 살던 내게는 생경한 풍경화였다.
허목사께서는 도시산업선교 활동을 하다가 군목으로 나보다 한달 전에 같은 부대로 배치되셨다. 교회당 밖의 들 판에 앉아 높이 솟은 초생달을 그리운 벗인양 양철 세수대야에 싸리 나무로 끓인 라면을 안주 삼아 막걸리로 외로움을 풀던 게 전부였다. 혹시 집에서 용돈이라도 풍족히 보내 주면 고등어 안주가 추가되었다.운동권 친구로 함께 배속된 최재현은 독일유학을 마치고 서강대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다 동아일보 논설위원 시절 간암으로 홀홀 털고 먼저 세상을 등졌다.
허목사의 중위 군목 봉급이 2만원뿐인지라 만원은 부인의 생활비로 내어놓고 나머지 만원으로 담배와 껌을 사들고 최전방 참호를 방문하여 병사들과 침식을 함께 하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 굳이 자신의 봉급을 털지 않아도 좋았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닐텐데 스스로 일을 만들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으셨던지 병사들의 어려운 형편을 상담하고 격려하시는데 적지 않은 시간을 바쳤다. 가정 형편도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둘 째 딸을 낳을 때는 마땅한 곳이 없어 우리 집에서 해산을 도와야만 했다. 그렇다고 목좋은 자리를 위해 부당한 청탁을 하지도 않으셨다. 최전방으로만 전전하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딸의 폐렴이 도져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큰 교회에서의 목사 청빙을 거절하고 하월곡동,중량천의 하꼬방 동네에서 포장마차를 차렸다. 제대를 하고 허목사를 뵈었을 때 어엿한 포장마차의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남편이 생활비를 주지 않으셨던지 사모님이 인삼 찻집을 열어야 했다.
허목사는 매일 초저녁 포장마차에서 벌어 들이는 수입에서 다음 날 장사 밑천이 되는 액수를 먼저 떼어 놓은 다음에는 나머지 재료로는 공짜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정말 일용할 양식인 셈이다. 주로 가난한 일용 근로자, 동네 깡패, 입에 풀 칠하기도 벅찬 사람들이 소주 한잔에 서러움을 풀고자 목사님의 포장마차를 찾았다.
그래도 목사라고 교회는 해야하니 하월곡동 판자촌 동네에 무허가 집을 터서 예배를 드렸다. 반은 가난한 교인이고 더러는 감시나온 형사와 정보부 요원들이다. 포장마차에서 만나 예수의 인격으로 다듬어지고 나중에는 출세까지 한 사람들 가운데 이동철이라는 사람이 있다. ‘어두움의 자식들’,’꼬방동네 사람들’, ‘오과부’들을 소설로 써내 유명해지더니 국회의원까지 지낸 분이다. 이 이동철씨와 영화감독 이장호가 허목사의 열혈 교인이었고 이동철은 장로가 되었다. 말이 가난한 산 동네지 주민의 90퍼센트가 호남 지역에서 올라 온 전라도 개똥새였다. 변변한 화장실이 없어 집에 적당히 모아 두었다가 비라도 오는 날이면 남모르게 슬적 내다 버리는 통에 비오는 날의 하월곡동 길은 오물 냄새로 충만했다. 허목사는 태생이 경상도다. 그분은 술 한잔만 들어가면 의례 ‘경상도는 전라도 사람들에게 빚진게 많아.!!’
주기도문처럼 입에 달고 다닌 이 말이 막상 전라도 출신인 내게 왜 그리 달콤했는지 모른다. 사랑의 빛이 많은 사도였다.
내가 회사를 경영하며 돈이라도 조금 만지게 되었을 때 호주머니에 이삼십만원을 찔러드리면 으례 술먹고 싸우다 유치장 간 사람들 빼 내오는 일에 쓰시는 듯 했다.
1986년,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제정구 동지가 시흥의 판자촌 이주민을 위한 봉사로 막사이사이상을 받고 돌아와 “원래 이 상은 허목사님이 받으셔야 했는데 그 분이 고사하는 바람에 내가 받게 되었어” 라며 미안해 하던 고백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요즈음 명예와 공 다투기를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세상에 사람을 귀히 여기고 상처받고 고통 당하는 이들을 지성으로 섬겼던 우리 시대의 선지자, 그 허목사께서 지금은 무주에서 젊은 이들을 기르고 자연과 하나되는 생태운동을 벌리고 있다.
오늘같이 추운 겨울이 되면 허목사께서 빈민들에게 바가지로 퍼주던 오뎅국물이 허기진 오관을 자극하고 부끄러운 영혼을 깨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은 호사스런 십자가로 장식된 교회에만 있는게 아니다. 허목사가 섬기던 달동네야말로 그분의 사죄와 은혜가 넘치던 곳이다. 목회나 포장마차 주인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나 하는게 아닌 모양이다.
<위의 글은 여수YMCA에 제가 정리하여 게재한 글입니다. 지난 9월15일 부산교육연구소에서 구들장의 주관하에 "오래된 미래"와 생태.문화.교육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하신 허병섭님의 쉽지 않았을 그간의 삶의 흔적을 되살펴보는 것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옮겨 보았습니다>
퍼왔습니다. 그런데 주소를 함께 스크랩하지 못했군요. 언제 누가 쓴 글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