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고향이 베트남 국경에서 가까왔던 관계로, 일찍부터 훗날 자신의 정치적 지원자가 될 베트남의 정치, 군사적 리더들과 접촉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보고가 있음.
프놈펜의 친천 집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여러 종류의 청년 정치활동에 참여함. 캄보디아 공산당 내부의 권력투쟁과정에서 "캄푸치아 공산당"(CPK)이 1966년 창당되고, 친-베트남계가 실각하면서 세간에는 "크메르루즈"란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함.
1968년(공식 나이로 17세)에 이미 훈 센은 크메르 루즈를 포함한 몇몇 조직을 포괄하는 무장단체 "마퀴스"(maquis)에 가담하여 활동했다고 함. 론 놀 정부와의 반정부 전쟁 기간동안에, 자신의 고향인 껌뽕 짜암을 포함한 동부지역 전투에서 적어도 4번 이상 부상을 당했고, 외쪽 눈의 시력도 상실함. 그 사이 그는 주목받는 핵심당원으로 성장했다.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하고 캄보디아를 장악하였다. 주요한 전승기념 행사에 적어도 1회 이상 초대됨.
1975 (24세) 이른 나이로 사단장(division commander)에 오름. 폴 포트, 이엥 사리, 키우 삼판 등 고위당직자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고 전함. 그러나 이러한 영광은 오래가지 않음.
이후 크메르루즈의 학살광풍이 시작되면서, 껌뽕 짜암의 핵심 당원이자 크메르루즈 지휘관인 훈 센 역시 이러한 종류의 일부 사건에 직접 연루되었다.
그의 짧은 학력과 전공 덕분에 처음에는 잘 견디었지만, 동부지역이 폴 포트의 유형적 정책에 반기를 들면서 훈 센 역시 숙청의 위협에 서서히 직면하게 된다. 특히 1977년에 껌뽕 짜암 지역의 핵심당원 숙청 문제와 관련하여 그의 태도가 머뭇거렸던 점도 위기를 자초했던듯하다.
1977년 9월 동료 4명과 함께 베트남으로 탈출. 그곳에서 "인민의 지도부"가 되기 위한 추가적인 교육을 받음. 동시에 예전 크메르 루즈 동부구역 사단장을 지낸 헹 삼린이 위원장을 맡고 베트남의 지원 하에 건설된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NUFNS)의 멤버로도 소속됐다.
1978년 12월 12만명의 베트남군이 폴 포트 정권을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17일만에 프놈펜을 함락하고 "캄푸치아 구국민족통일전선"(KNUFNS)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위성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을 세움.
1979년 1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 수립
헹 삼린(Heng Samrin)이 국가주석, 총리는 쩐 시(Chan Sy)가 맡음. 훈 센은 외교부장관 겸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 정치국 위원.
1981 부총리 겸 외교부장관
하지만 UN과 미국, 중국 등 국제사회는 PRK를 인정치 않고, 크메르 루즈와 시하누크 국왕의 왕당파, 손 산의 공화파 등이 연합한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를 지지하고 있었고, 1982년 이후로는 4만명의 크메르 루즈 군을 비롯한 이들 3파의 반군들로 인해 불안정한 요소가 지속되었다.
1985년 1월 (34세) 총리 겸 외교부장관 (세계 최연소 총리)
동시에 국회의장으로도 선임됨
신병치료 중이던 쩐 시 총리가 사망하면서 그 자리를 승계함
정치국과 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포함해, 그는 형식적으로는
헹 삼린 다음가는 2인자로 보였다.
1986년 베트남이 최초로 절군계획을 발표함.
소련이 자국의 문제로 이 지역에 대한 지원을 서서히 줄이자 베트남으로서는 최대 25만에 이른 점령군을 유지하기 벅차짐. 또한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상당한 부담을 느낌.
1989년 4월 베트남군 철수 이후의 정치적 일정을 위해, 이미지 개선의 일환으로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을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 SOC)으로 국호 개정.
이는 훈 센 총리의 위상을 기술적으로 더욱 상승시키는 효과. 한편 이 시기에 훈 센은 크메르 루즈를 제외한 다른 정파들을 정권에 참여시키는 "국가화합" 정책을 발표. 이미 1988년 7월 부터 분쟁 4파 간에 UN이 중재하는 국제회의가 진행중이었다.
1991년 10월 제5차 CPP 당대회 당중앙위 부의장,
1991년 10월 "파리평화협정" 조인됨.
이로써 내전은 종식되고, 4파의 대표들로 구성된 "캄보디아 국가최고평의회"(SNC)가 결성되었고, "국제연합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UNTAC)가 1993년의 총선거 시까지 치안과 조정을 담당함.
1991년 "캄보디아 국가최고평의회"(SNC) 위원.
1993년 9월 공동의장 1993년 5월 총선에서 2당으로, 제2총리 취임 (연립정부구성)
(캄보디아 헌법은 3분의 2 이상 의석 정당만이 독자 정권 구성 가능. 총선에서 제2당이 됨. 제1당인 노로돔 라나릿[노로돔 라나리드] 왕자가 이끄는 푼신펙당[FUNCINFEC]과 연립정부 구성)
1997년 7월 쿱테타를 일으켜 제1총리인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를 국외로 추방)
- 라나릿 제1총리와 다음해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계속적인 소규모 무력충돌이 발생하던 중이었다.
1998년 총선승리 및 단일총리 취임 (연립정부구성)
(과반인 64석 달성, 그러나 3분의 2가 안 되어 라나릿 왕자 계열의 FU당과 다시 연립)
1999년 4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가입을 달성하고, 외국기업체의 투자유치를 통한 경제발전과 크메르루주 괴멸을 통한 사회안정에 주력.
2003년 7월 제3차 총선승리
2004년 7월 총리 재 취임
(73석 달성. 오랜 난항 끝에 다시 FU와 연립정부 구성)
2008년 7월 총선에서 123석 중 CPP가 90석 확보 압승
-단독 정부 구성. (개헌도 가능한 의석임)
-현재 최고의 권력기반 (종신총리를 공언한 상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