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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INDO 그룹의 해외경영사례
Ⅰ. 徐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한인기업 ‘코린도그룹’에 대한 최근 뉴스와 TV신화창조에서의 소개를 접하고 글로벌경영사례에 있어 좋은 사례라고 판단하였다. 조그만 원목회사에서 시작해 연매출 8억6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코린도그룹은 3만여 명의 직원(1%가 한국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펄프와 제지, 컨테이너, 자동차, 금융, 등 30여개의 기업을 거느린 인도네시아 20대기업으로 손꼽힌다.
지난 1998년 5월 인도네시아 대폭동 당시 중국인 등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공격의 표적이 됐는데 화교들과 일본계 기업들이 대부분 철수하였는데 당시 한국의 코린도 직원들은 현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인도네시아 상권을 휩쓴 중국 상인과 달리 코린도그룹은 현지인을 위한 지역사업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강한 신뢰를 받음으로서 현재까지 한국기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기업이다. 인도네시아의 여러 정치, 환경, 문화적요소의 악 조건하에서도 굴지의 기업을 일으킨 코린도는 글로벌경영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Ⅱ 本
1. 회사명과 회장에 대하여
회사명은 ‘코린도(KORINDO 코리아+인도네시아 합성어)’ 인니동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코린도그룹의 회장은 승은호(1942년 만주출생, 서울고 연세대 행정학과 졸업) 1969년 인도네시아 진출, 1970년대 초반 원목개발 사업을 토대로 대기업으로 성장, 1976년 코린도그룹을 세운 뒤 지금까지 현지 주민과의 동화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인 기업인들 중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을 수 있으며 인도네시아 한인회장을 맡고 있다.
2. 기업역사 및 사업현황
본사는 자카르타, 직원 3만 여명, 이 중 99%가 현지인, 1%가 한국인, 연매출 8200억 원이다. 목재, 제지, 컨테이너공장, 화학공장, 신발공장, 밧데리 부품생산, 파이프 코팅, 종합물류, 부동산, 금융, 증권, 보험, 장학재단 등 30여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인도네시아 재계 20위권의 대기업이다.
코린도그룹의 주 업종은 합판 생산업이다. 연간 70만∼80만㎥의 합판을 생산, 3억 달러 이상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있다. 이 나라 전체 합판 생산량의 10분의 1을 점하고 있으며 합판생산에 필요한 원목도 절반가량은 직접 생산하여 조달하고 있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제지공장 역시 합판사업과 더불어 코린도를 지탱하고 있는 주력 공장이다. 신문용지만 생산하는 이 제지공장에서는 연간 43만t의 종이를 생산, 1999년도의 경우 1억7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미국, 대만, 인도, 스리랑카 등지에 수출할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국내 신문용지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역시 자바 섬 안에 있는 컨테이너 공장은 월 4000 박스의 철 컨테이너를 생산하여 미국, 독일, 중국 등지에 전량 수출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의 동양화학과 합작 설립한 화학공장이 있고, 육로 및 해상 운송회사, ‘이글(EAGLE)’이라는 독자 브랜드를 가진 신발공장에다 파이낸싱, 증권, 보험 회사 등 금융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승은호 회장의 부친은 목재회사 ‘동화기업’을 창업했던 승상배씨(承相培·80세)다. 평안도 정주 출신인 그는 광복 후 월남, 미군의 군납공사 등으로 돈을 벌어 1951년에 동화기업을 세웠다. 60년대에 원목수입으로 재미를 본 그는 이왕이면 인도네시아 밀림에서 원목을 직접 생산하기로 결심하고 1970년에 ‘인니동화’라는 회사를 현지에 설립한다. 한국남방개발, 경남기업에 이어 세 번째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셈이다.
현지인으로부터 벌채권을 사들인 인니동화는 한국인 기술자들(주로 서울농대 임학과 출신)을 파견해 본격적인 벌목사업을 벌인다. 원목들은 원목 운반선을 통해 인천 저목장으로 운송되었고, 그곳에서 합판이나 가구의 재료로 변모했다.
1975년, 승상배 당시 동화기업 사장은 사정기관으로부터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받다가 결국 탈세혐의(후에 무혐의 판결)로 구속되고, 그의 회사는 부도를 맞는다. 인도네시아의 인니동화도 현지의 외환은행 관리로 넘어가게 된다. 여기까지가 코린도그룹의 전사(前史)다.
그의 아들 승은호는 부사장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사업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해보려 해도 비빌 언덕이 없었다. 이때 승은호로 하여금 새로 시작해볼 수 있도록 원군이 되어준 것은 일본 기업이었다. 승은호가 동화기업 미국 지사장으로 근무할 당시 후세라는 한 일본인과 가깝게 지냈다. 그가 나고야에 근거를 둔 ‘고아’라는 회사 관계자를 연결시켜준 것이다.
“고아 그룹에 목재가공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의 원목담당자에게 1원 한 푼 조달할 수 없는 회사 형편을 얘기하고, 만일 나한테 원목 생산에 필요한 장비 구입비만 빌려준다면 나무를 베어서 갚겠다고 했지요. 원목 장비를 구비하자면 100만 달러 이상이 소요되는데 그런 거액을 담보 하나 없이, 더구나 남의 나라 사람한테 빌려달라는 건 무모한 요구였지요.”
그런데, 그 무모한 요구가 통했다. 일본 기업이 승은호의 신용을 담보로 100만 달러의 벌채장비 구입자금을 빌려준 것이다. 물론 ‘고아’측도 빌려준 장비 구입자금을 원목으로 상환 받는다면 싼값에 나무를 살 수 있다는 이점을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야 빈 손바닥뿐인 사람에게 그런 거액을 지원하겠노라고 나섰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인니동화와는 별개 사업이므로 회사 이름을 새로 지어야 했어요. 처음엔 ‘코리아-인도네시아’라 할까 생각했는데 그건 너무 단순 나열하는 것 같아서 제외했고, 그 다음에 ‘인도코’가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한국에서 ‘코’는 안 좋은 얘기에 쓰이는 수가 많잖아요.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 코가 석 자나 나왔다. 등등. 그래서 궁리 끝에 얻어낸 이름이 코리아-인도네시아를 합성한 코린도(KORINDO)였어요.”
그러니까 명색만 ‘동화기업 창업주 2세’였지 승은호가 코린도를 창업할 때 종자로 삼았던 돈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빌린 장비구입자금이 전부였던 셈이다. 흔히 “빈손으로 시작했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코린도야말로 승은호가 완벽하게 빈손으로 이국땅에 세운 기업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본 기업의 지원으로 130만 달러어치의 벌목장비가 인도네시아로 들어갔고, 장비만으로 원목을 생산할 수 없어 추가로 30만 달러의 운영 자금까지 지원받았다. 당시 인니동화에 있던 기술자들을 확보하여 원목 벌채에 나섰는데, 승은호 회장은 이 무렵의 코린도를 ‘망명기업’이었다고 회상한다.
말이 쉬워 ‘원목생산’이지 인도네시아 밀림에서의 원목 벌채작업은 장난이 아니다. 대학 임학과를 나온 한국인 기술자와 현지인 길잡이로 구성된 임상조사팀이 밀림에 들어가 어느 지점에 어떤 크기, 어떤 종류의 나무가 얼마나 있는지, 벌채를 한다면 도로를 어떻게 내면 좋은지 따위를 일일이 지도에 표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를 분석하여 채산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 벌채권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 벌채권 매매협상을 벌인다.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는 군벌(軍閥) 등 권력 실세들이 벌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벌채권을 확보하면 임상조사 보고서에 따라 도로를 내고, 본격적인 벌목에 들어간다. 벌목 생산팀은 불도저 석 대와 톱질하는 세 사람이 한 팀이 된다. 불도저는 나무를 운반할 길을 닦거나 베어낸 나무들을 도로까지 옮기는 일을 담당한다.
일정 규격으로 자른 나무는 도로로 옮겨져 수 십대의 트럭에 실어 운반한다. 한국의 트럭 운전수들 사이에서 “인도네시아로 돈벌이 가자”는 말이 유행하던 때가 이 무렵이다.
나무 중에는 물에 뜨지 않고 가라앉는 나무가 있는데 이것들은 트럭에 실어 원목을 선적할 수 있는 항구나 합판공장으로 직접 운송하고, 물에 뜨는 나무는 강물에 띄워 뗏목으로 묶은 다음 모터보트가 끌고 강을 따라 내려간다.
코린도의 임직원 중 상당수는 이 무렵부터 산판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역전의 용사들이다. 밀림 속 임시 숙소인 나무 캠프에 머물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맞는 것은 예사고, 사슴을 삼킬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뱀의 먹이가 될 뻔했던 직원도 있다. 밤중에 도로로 튀어나온 호랑이가 목재운반 트럭에 치여 죽었는데, 한국인 인부들이 호피를 벗겨 말리고 호랑이뼈를 드럼통에 고아 환(丸)으로 만들어 귀국했다는 일화는 코린도 직원들 사이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승은호 회장이 코린도를 설립하면서부터 원목경기가 되살아났다. 그는 일본 회사로부터 빌린 장비구입자금을 3년 만에 모두 상환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70년대 말부터 원목수출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잡아나가다가 85년도에 시행에 들어갔다. 합판 등으로 가공수출해서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목적이었다. 예고된 정책이었는데도 85년이 되자 수많은 원목 생산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승은호 회장은 79년도에 한국의 합판공장 기술자들을 영입하여 현지에서 합판사업을 벌였다. 국내 업체로는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세워진 합판공장이었다.
주력인 목재사업과 전혀 관계없는 사업도 벌였다. ‘이글’ 상표의 신발 공장이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와 고용증진 정책에 부응해, 1985년에 설립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신발산업이 사양길에 있었다. 승 회장은 경험 많은 부산의 신발공장 기술자 80여 명을 데려가 신발생산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나이키나 리복 등과 주문생산계약을 맺어 납품했으나, 지금은 이글이라는 자체 브랜드로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에만 공급하고 있다.
3. 현지화노력
코린도의 ‘역전의 용사들’은 “더위나 말라리아나 맹수보다 훨씬 무서웠던 것이 현지 일꾼들이다”고 입을 모은다. 회교도인 이들은 오른손을 신성하게 여기는데, 만일, 아무생각 없이 왼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날에는 금세 전투자세로 돌진해오기 일쑤였다. 종교와 관련해서 초기에 겪었던 애로사항 중 하나는, 그들의 기도습관이었다.
“합판공장에서 한창 일하던 현지 직공들이 작업을 하다 말고 갑자기 알라신께 기도 올릴 시간이라면서 작업장을 빠져나가서는, 바깥 한적한 곳에서 물로 손을 씻고 엎드려버리는 겁니다. 합판공장의 경우 라인별로 작업이 분담돼 있기 때문에 갑자기 몇 명이 빠지면 가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거기서 외국진출 기업의 현지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달았지요.”
승은호 회장은 궁리 끝에 작업장 곳곳에 기도실을 따로 만들어 직공들이 교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승회장의 현지화 노력은 신입사원들의 채용과 수련과정에도 잘 나타난다. 현지인들과 의사소통이 중요한 만큼 코린도에는 한국외국어대 인니-말레이어과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신입사원들은 사무직일지라도 일정기간 현장 근무 경험을 쌓아야 한다. 생산현장에서 현지인들과 맞부딪치는 것 이상으로 현지화의 효율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사건은 곳곳에서 터졌다. 결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작업시간에도 말썽만 부리는 한 현지인을 노동청 지부를 통해 절차를 거쳐 해고한 적이 있었다. 해고 통지를 한 다음 날 아침, 노무를 담당하는 한국인 총무가 일찌감치 출근해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뒷목 근처가 서늘하더란다. 돌아보니 해고당한 그 인도네시아 남자가 나무 자르는 톱을 가지고 자신의 뒷목을 ‘썰고’ 있더라는 것. 피투성이가 된 총무는 황급히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이제 중견 사원이 된 이 사람은 흉터 때문에 무더위에도 뒷머리를 기르고 다닌다.
인도네시아 노동청이나 상공부에서는 되도록 현지인들의 고용기회를 늘리기 위해 한국인 직원들의 비자연장에 대단히 까다롭다. 기술을 인도네시아인에게 빨리 이전해주고 한국인들은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것이다. 승회장이 코린도의 한국인 직원들에게 인도네시아의 생활문화를 터득하여 그들과 원만하게 지내라고 채근하는 것이 ‘현지화’를 위한 것이라면, 인도네시아 정부가 코린도 같은 외국기업에 요구하는 것은 ‘현지인화’다.
그런데 문제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요구대로 현지인화를 하고 싶어도 그것이 쉽지 않다. “제지공장에 대졸 출신 현지인 셋을 고용한 적이 있어요. 그 친구들을 초기에 현장에 투입했더니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다 나가버렸어요. 나는 펜대 굴리면서 사무 보기 위해 회사에 들어왔지 고등학교 졸업자들하고 기름때 묻히면서 일하러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거지요. 나중에 공장장이 되더라도 현장을 알아야 직공들을 관리할 수 있을 것 아니냐, 한국에서 일류 대학인 서울농대 출신도 처음에는 현장에 가서 일하지 않느냐. 이런 식으로 아무리 설득해도 안 들어먹습디다.”
그래서 한국근로자의 비자연장 시기가 되면 코린도측과 노동청 관리 사이에 한바탕 설전이 벌어진다. 노동청 관리는 “왜 우리 나라 사람에게 기술이전 안 시키고 한국인을 계속 눌러 있게 만드느냐”고 시비를 걸고, 코린도측은 “아니, 임업과 나온 사람이 산판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고 사무실에서 펜대만 잡겠다니 그걸 어디다 쓰겠느냐”고 항변한다.
인도네시아 동부의 이리안자야에도 코린도의 합판공장이 있는데, 그곳 주민 대부분이 기독교도다. 이곳은 문명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아 ‘어떤 곳에 출근한다’는 개념이 없다. 월급을 받은 다음날이면 상당수 직공이 결근해버린다. 돈이 생겼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논 다음에, 돈이 떨어지면 나가서 일하면 될 것 아니냐는 식이다.
또한 이들은 동티모르의 영향을 받아서 자치독립을 요구하며 ‘투쟁’을 하고 있어, 승 회장은 현지 합판공장에 투자를 늘리고 싶어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처음 우리 합판공장이 이리안자야에 들어섰을 때 그곳 독립군 사령관이라는 사람이 회사로 찾아와서 돈을 내라는 겁니다. 얼마를 주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20억 달러를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20억 달러는 너무 많으니 200달러로 깎아달라니까 두말없이 그렇게 하자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2조 몇 천억 원을 요구했다가 이십 몇 만원으로 깎아 준 것이다. 그만큼 돈에 대한 인식도, 수(數)에 대한 개념도 없는 사람들이다.
코린도그룹의 직원 비중을 보면 현지 직원이 월등 높다. 따라서 현지인들의 문화와 마인드를 이해하는 것은 사업의 중요한 과제였다. 더욱이 외지에 세워진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찾아든 근로자들은 자기 가족을 데리고 공장 주변에 삶터를 일구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도 ‘코린도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에 코린도는 현지 직원들의 삶이 보다 윤택해질 수 있도록 주변 마을까지 아우르면 전기와 수도를 공급했고, 이슬람 사원을 건립하는 등 다양한 현지화 노력을 추구해왔다. 코린도에서는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학교도 지어주고 교회도 짓는다. 물론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도 회사에서 채용하고 월급도 코린도측에서 지급한다. 승 회장의 철저한 현지화 노력의 일환이다.
이 과정에서 ‘코리아’와 인도네시아 합성어인 코린도라는 회사명이 더욱 빛을 발한다. 이렇듯 코린도는 수출 위주의 제조업 중심 그룹으로 성장하여 인도네시아의 산업 발전, 수출 증대, 고용 증대, 지역 발전에 기여함으로서 교민 사회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국민으로부터도 성공한 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
“벌목을 한다니까 산을 아예 다 깎아내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쓸모 있는 나무만 베어내고 또 베어낸 자리에는 의무 조림을 하게 돼 있습니다. 물론 어떤 원목회사들은 눈속임으로 대강 심고 마는데 우리 코린도는 철저합니다. 그리고 이건 학자들의 조사로 이미 밝혀진 내용인데, 수령이 오래된 나무는 새로 심어서 자라나는 나무에 비해 산소배출량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승 회장은 그 정도로는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아니다 싶었는지 코린도가 대대적으로 펼치는 조림사업을 소개했다. 별도 회사가 진행해오고 있는 이 조림사업은, 나무 벤 자리에 의무 조림하는 것과는 별도로, 중부 칼리만탄 지역의 9만㏊를 허가받아 유카리투스라는 개량 씨앗을 뿌렸다. 식물이 금방금방 자라는 열대성 기후 지역이라 2년 전에 심은 나무가 벌써 10∼15m로 자랐다는 것이다. 이제 머잖아 조림목으로 합판공장의 자재를 댈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더불어 조림업자에게는 나무 한 그루가 배출할 수 있는 산소량을 계산하여 환경기여기금을 받을 수 있는 국제협약이 준비되고 있다고 소개한다.
4. 코린도그룹의 위상
“우리 코린도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들에 현지 사정에 밝은 인재를 공급해주는 논산훈련소입니다.”
승 회장의 얘기다. 처음 진출해서 사업을 벌이는 기업은 현지경험을 쌓은 직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때문에 코린도 직원을 뽑아 가는데, 승회장도 협조차원에서 그들을 붙잡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에서 코린도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해준 사건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는 연간 300만t을 생산하는 국영 제철소가 있었는데,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의 제철회사와 합작으로 제2제철소 건설을 추진했다. 합작 파트너가 되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다. 일본의 신일본제철과 오스트레일리아의 BHT 등 세계 굴지의 제철회사들이 눈독을 들였고, 한국의 포항제철도 경쟁대열에 뛰어들었다. 애당초 포항제철은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승은호 회장이 수하르토 당시 대통령의 측근 실세를 만난 후 판세가 역전되어 포항제철로 낙찰되었다.
결국 건설공사 중에 IMF라는 복병을 만나 현재는 지지부진한 상태지만, 앞의 사례는 코린도와 승은호 회장 같은 선구적인 기업과 기업가가 현지에 버티고 있는 것이 후속진출을 꾀하는 업체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증명하는 사례라 하겠다.
승은호 회장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인도네시아 민요 ‘붕가왕 솔로’와 ‘할로할로 반둥’이다. 현지 인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그 노래를 부르면 인도네시아의 고관대작들이 기립박수를 보낸다고 한다. 그의 이런 현지화 노력이야말로 코린도 성공에 가장 중요한 열쇠가 아닐까 싶다.
98년 인도네시아 폭동 때 현지인들은 중국계 주민들의 가게를 약탈하고 주택을 불 지르고 길거리에서 차량을 부셨다. 한국인들도 그곳에 많이 진출하여 상공업에 진출하여 부유하게 살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상점이나 공장은 한 곳도 습격 받은 곳이 없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중국인으로 오인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차량에 태극기를 달고 다니며 당당하게 다니니 일부 중국인들도 차에 태극기를 달고 한국인인척 하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몇몇 공장은 현지인들이 중국계 공장인줄 알고 쳐들어오자 직원들이 나서서 한국기업임을 설명하고 직장을 지켜냈다는 일화가 있다.
국가는 하나의 공동체이다. 부자는 자신의 부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배려를 가난한 이들에게 해줄 의무가 있다. 그러나 그곳의 중국인들은 50만 달러짜리 주택에 살면서 자신의 경제적 성공에만 만족했지, 가난한 이들은 멸시해왔었다.
반면 한국인들은 물론 나쁜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체적 이미지는 현지인들에 상당히 좋다. 한국계 대기업인 코린도나 PT 미원 인도네시아는 인니에서도 대졸자들이 가장 입사하기 원하는 회사들이며 진출 초기부터 다양한 지역주민을 위한 프로그램, 장학사업, 오지 빈곤층 지원 사업 등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이런 찬사는 하루 이틀 좋은 일 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98년의 폭동 당시 현지 토착 인도네시아인은 그 소외감을 폭력으로 복수했다. 그 후에 그곳의 중국계가 도출해낸 결론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지아로 재산을 빼돌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사회공동체와 공존하는 방법이 아닌 타인을 배척하고 자신의 고립화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인니의 부자들은 98년의 폭동에서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 것이다. 다시 98년과 같은 폭동이 일어난다면 그 집들은 다 불타 없어질 것이다.
한국 코린도그룹, 세계 최장 파이프라인 공사 참여 [연합]
발틱해를 관통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스 파이프 라인 공사의 주요 공정을 인도네시아의 한국계 업체가 수주해 화제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본사를 둔 코린도 그룹(KORINDO.회장 승은호)은 28일 자회사인 유펙(EUPEC)이 노드 스트림(Nord Stream)사와 '노드 스트림 파이프 라인 프로젝트'의 콘크리트 중량 코팅 및 물류서비스 공급에 관한 의향서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세계 최장 가스 파이프 라인 공사가 될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서유럽 지역에 공급하기 위해 러시아 비보르크(Vyborg)에서 발틱해를 가로질러 독일 그라이프스발트(Greifswald)에 이르는 1천220㎞ 구간에 걸쳐 가스 파이프 라인을 설치하는 공사이다.
노드 스트림사는 러시아 국영가스회사인 가즈프롬과 독일 바스프 등이 합작한 회사로, 2011년까지 50억유로(약 7조원)를 투입해 발틱해 해저에 두 개의 병렬 가스 파이프 라인을 매설할 계획이다.
코린도가 100% 투자한 유펙은 해저에 매설되는 가스 파이프 라인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6억5천만유로(약 9천300억원) 규모의 콘크리트 중량 코팅 공사와 물류서비스를 독점 공급하는 업체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유펙은 이를 위해 독일 무크란(Mukran)과 핀란드 코트카(Kotka)에 파이프 코팅 공장을 신규 건설할 예정이다. 코린도 그룹의 파이프 코팅 사업부 이원우 본부장은 "사상 최대 규모의 가스 파이프 라인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연간 50억달러 규모의 파이프 코팅업계의 선두기업이 되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Ⅲ 結
코린도그룹의 성공적인 경영의 핵심은 철저한 현지화 노력의 일환이다. 코린도그룹의 사례는 새롭게 변화되는 국제무역환경과 글로벌금융환경, 각국의 상이한 정치적, 문화적 환경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가 전제되어야함을 깨닫게 된 기회였다.
참고)
인도네시아
적도부근의 1만8108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섬나라이며 인도네시아 말은 ‘많은 섬들의 모임’(인도지역의 군도)이란 뜻임. 인구 2억 4545만 명으로 세계 4위, 면적이 한반도의 4배, 88%가 회교도이다. 삼림, 석유, 천연가스 등의 자원대국이며 우리에게는 일찍부터 목재의 수입원이었고 이를 이용한 합판공업은 한 때 우리의 주력 수출산업기도 하다. 천연가스는 최대 수출국으로 세계 전체 20%를 수출하고 있다. 동남아 유일한 OPEC회원국이다.
7세기경부터 자바와 수마트라 섬을 중심으로 중국과 인도를 잇는 중계무역의 기지역할을 하면서 번성한 나라이기도 하다. 2005년 이 나라의 GDP는 공식 환율로 2700억 달러, 1인당 1200달러 수준이며 실업률은 11.7% 공공채무는 GDP의 49.9% 빈곤인구비율은 16.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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