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정희성
바둑판을 무겁게 만든 건 이유가 있어서일 게다. 장기를 잘 두던 앞집 친구 일남이와 마주 앉으면 저녁 먹으라고 부르러 올 때까지 일어설 줄을 몰랐는데, 그걸 늘 못마땅히 여기던 아버지가 하루는 장기판 앞에 나를 불러앉혔다. 열 판이면 열판 아버지는 외통수에 몰려 쩔쩔 매었고 일수불퇴인지라 물려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내가 오줌 누러 갔다 와도 얼굴이 벌개진 채 그냥 그 자리에 앉아 끙끙 앓으며 장기알만 만지작거리시는 것이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남들이 늘 하는 대로 따먹은 象이나 馬 따위를 딸그락거리며, 장기 두는 사람 어디 갔나, 하고 약을 올렸던 것인데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장기판이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이놈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나중에 혼자 있을 때 가만히 생각해보니 장기판이 너무 가벼워서 장기를 오래 두다보면 사람도 그렇게 경망스러워지는가보다 싶어, 그다음부터는 아버지하고 장기는 안 두고 바둑만 두기로 마음에 다짐을 두었던 것이다.
- 시집『돌아보면 문득』(창비, 2008)
.........................................................
실은 대체로 그렇다는 얘기지 바둑판보다 무거운 장기판이나 장기판보다 가벼운 바둑판이 왜 없겠나. 심심했던 아버지는 실력을 얕잡아보았는지 아니면 맞수가 될 성 싶어서였는지 놀이상대로 아들을 장기판 앞에 불러 앉혔건만 두는 판판이 깨지고 만다. 반드시 이겨보겠다며 열판까지 갔음에도 단 한번 이기지 못했으니 은근히 자존심이 상했을 터이다. 그런 참에 아들 녀석은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고서 약까지 올려대니 순간 화딱지의 뚜껑이 열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지용의 시 ‘장수산’에 나오는 여섯 판에 여섯 번 내리 지고도 털털 웃을 수 있는 스님의 경지 아니고는 감정조절이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경망스러움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장기판의 가벼움 탓일 거라고 애써 핑계를 만들어 아버지를 두둔한다.
시인은 이렇게 웃음과 재미를 동반하여 생의 감각을 드러내는 시를 즐겨 쓰곤 한다. 오늘날엔 대표적인 두뇌스포츠로 자리 잡은 바둑이 예전엔 장기와 더불어 잡기 취급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조선시대 성균관 학생들에게도 공부에 방해가 될 것이란 염려 때문에 장기와 바둑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바둑은 장기와는 사뭇 다른 대접을 받아왔다. 옛날 객주방에서 한 나그네가 초면의 다른 동숙자에게 “바둑 한 판 두시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물었다. 그가 못 둔다고 하니 “그럼 장기는 어떤가?”라고 되물었다. 그것도 못 배웠다고 대꾸하니 “에이, 오목이나 둬!”라고 했다지 않은가. 이렇듯 바둑은 점잖은 사람들의 놀이로 여겨왔으며 격도 장기에 비하여 윗길로 쳤다.
바둑은 중국의 고대 농경사회에서 별들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한 도구로서 처음 발명되었다는 설이 과학적인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밖에 여러 기원설이 있으나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2천여 년 전 중국의 문학작품에 바둑을 언급하고 있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바둑이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고구려 승려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등의 기록을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바둑이 널리 보급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고려에 와서는 바둑 잘 두는 사람을 ‘國手’라고 하였다, ‘영원한 국수’라고 불리는 조훈현의 여당 비례대표 신청은 이래저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알파고를 상대로 한 이세돌의 귀중한 1승은 우리 국민들뿐 아니라 인류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최근 미니바둑판 등 관련용품의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진작 드라마 ‘응8’의 영향으로 바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데다가 이세돌이 불을 붙인 현상이다. 미니 바둑판은 무거운 나무판에 비해 가볍고 보관이 쉬울 뿐 아니라 바둑알이 자석이라 야외에서도 바둑을 간편히 즐길 수 있는 제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둑을 두는 사람이라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발동해 바둑판을 뒤집거나 공중으로 날리는 일은 없으리라. 더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답답해서 바둑을 한 번도 둬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바둑 열풍이 거세다 해도 그 연세와 성격에 새삼 바둑을 배울 일은 만무하겠으나 바둑교훈이나마 좀 공부하시길 권한다. 특히 지금은 ‘공격할 때는 자기 돌을 먼저 돌아보라’는 바둑의 제3교훈 ‘攻彼顧我(공피고아)’를 새겨들으실 때가 아닌가.
권순진
Song For A New Beginning - Secret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