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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의 삶과 성공원리
박 만 규(교육수련원 원장)
머 리 말
도산 안창호(1878 - 1036)는 개항 무렵 평양 근교의 한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오늘 우리에게는 비범한 인물로 기억된다. 시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갖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이룩한 그의 인격과 사상과 업적은 실로 범인이 도달하기 어려운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산이 한 인간으로서도 과연 성공적인 삶을 살았는가 하는 점은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수 있다. 그의 생애에서 소년 시절을 빼면 아늑하고 평온한 시절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항일투쟁 과정에서 그는 세 차례 옥고를 치루어야 했고 그 속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만년에는 갖가지 병고에 시달렸다. 가정적으로도 오랜 시간 집을 떠나 활동해야 했고 안정된 수입이 없었으므로 가장으로서 늘 미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였다. 사회적으로는 그를 전적으로 이해하고 헌신적으로 따라준 동지들도 많았지만 한편으로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심한 비방과 모함을 감수해야 했다. 이렇게 보면 도산은 평온한 시대인 오늘의 소유와 향유 중심의 가치관으로 볼 때 결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 초기 민족의 대수난기에 살다간 도산 역시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찍부터 일신의 안일을 초월해 민족과 나라를 위해 생명을 바치기로 서원하였다. 말하자면 그도 당대의 많은 인물들과 같이 사명적 인생을 살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삶의 목적과 가치 기준 자체가 도산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그의 가치관과 삶을 직접적인 모범으로 삼아 따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려는 점은 당대의 그 수많았던 사명적 인물들 속에서 도산이야말로 가장 크게 기억되는 성공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도산처럼 그의 인격과 업적에 대해 개인적 조직적으로 추앙받고 그의 비전과 사상이 현재에도 살아 계승되고 있는 민족운동가는 달리 또 없다.
무엇이 그를 수많은 민족운동가들 가운데 그처럼 가장 큰 성공자로 만들었는가. 이 점을 밝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인생과 성취에 있어 참고가 될 수 있는 성공원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비록 자신이 직접 말을 통해 성공철학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거나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자체가 현재 각 분야에서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교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도산의 60년 생애 속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특징적인 성공 요인을 발견하게 된다.
1) 명확한 목표 -民族改造와 民國建設
나라와 겨레 사랑의 표본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도산에게는 크고 강력한 하나의 염원이 있었다. <새 나라 새 겨레>를 만드는 일, 곧 신민신국(新民新國)의 비전이었다. 그것은 한때 스쳐가는 바람이 아니라 실로 일생을 관통해 변함없이 간직하며 가꾸어 나갔던 염원이었다.
1894년 가을 17세 소년 안창호는 평양성에서 청일전쟁의 참상을 직접 바라보면서 나라와 백성의 힘없음을 통절히 아파하였다. 외국 군대가 마음대로 우리 땅에 들어와 전쟁판을 벌려 아무 죄 없는 동포들을 죽고 다치게 하는 사태 앞에서 힘없는 나라와 겨레의 불행에 대한 뼈아픈 각성이 싹텄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과 가족을 넘어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점차 힘없는 백성과 나라를 힘 있는 새로운 민족과 국가로 혁신하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면 도산이 말하는 새로운 민족은 과연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이룰 수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그는 수천 년 동안 스스로를 군주의 소유물로 여겨온 나약한 신민(臣民)들이 대각성하여 나라의 주인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민주주의 시대를 맞아 나라의 주인임을 새롭게 자각한 인민들 곧 신민(新民)이란 국민(國民) 바로 그것이었다.
전근대적 신민(臣民)에서 근대적 국민으로의 전환을 위한 신민운동(新民運動)은 인민들이 국가에 대해 스스로를 단지 노예에서 주인으로 여기는 의식 차원의 일만이 아니었다. 노예에게는 노예에게 알맞은 덕목과 자격이 있듯이 주인은 주인에게 걸맞는 덕목과 자격을 갖춰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신민운동은 단지 몇몇 선각자들의 대중에 대한 의식 계몽운동으로 끝날 수는 없고 2천만 겨레 각자 각자가 스스로 주인다운 정신과 역량을 갖추는 자각과 수련을 병행하는 실천운동으로 연결되어야만 했다. 그가 일생을 통해 민족개조운동을 힘써 전개한 이유였으니 도산은 지난 20세기 초부터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신민사상(新民思想)을 전파하고 신민운동(新民運動)을 전개한 민족개조운동의 대선각자였다.
그러면 다음으로 그가 염원하였던 새로운 나라는 과연 또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20세 무렵의 도산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을 표방하는 독립협회운동에 투신하여 처음으로 정치사회운동에 참여한 바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개화파 인물들처럼 그도 제한군주제의 정치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미국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교민지도에 헌신했던 그의 20대 후반 동안에는 낡은 군주국가 의식을 완전히 벗어나 공화주의 민국사상가로 전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교민지도 활동을 끝내고 귀국하여 국내에서 신민회를 조직한 다음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선, 30세 되던 1907년 이후에는 낡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수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공화국가를 건설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 특히 일제의 침략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된 근본 원인이 군주국가라는 국가제도 자체에 있음을 설파하였다. 백성을 단지 군주의 사유물로 여기는 군주국가의 낡은 틀 속에서는 인민들로부터 진정한 애국심이 우러나올 수 없고 따라서 외세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민력의 배양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귀국하자마자 그가 신민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던 것은 이천만 한민족을 국가의 주인들로 새롭게 혁신하고 이들을 총결집하여 한반도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을 건설하기 위한 대장정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 구체적 계획 - 5단계 民族運動方略
안창호는 민족개조와 민국건설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함과 동시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매우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였다. 그 결실이 지금은 널리 알려진 이른바 그의 <민족운동 방략도>에 잘 드러나 있는데 시기적으로는 적어도 미국에서의 공립협회 활동 시기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 그가 신민회운동의 구상을 갖고 귀국을 결심했을 때는 일제로부터의 국권회복과 새로운 근대국가 건설을 향한 한국근대민족운동의 명확한 목표와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민족운동 방략은 크게는 기초 - 준비 - 운동의 3단계로, 보다 상세히는 기초 - 진행준비 -완전준비 - 진행결과 - 완전결과라는 5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요약하면 민족운동의 간부 양성, 교육과 산업의 진흥, 독립운동에 필요한 각 분야 전문 인재와 재정의 마련, 독립전쟁을 통한 국권회복, 문명부강한 근대국가의 건설이라는 일련의 종합적인 청사진을 담은 것이었다. 이 구상 속에는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전 과정이 담겨 있다.
우선 2천만에 가까운 하나의 민족을 새롭게 혁신하여 거듭나게 한다는 것은 실로 거대한 과제였다. 이와 병행하여 낡고 무력한 나라를 혁신하여 문명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한다는 것 또한 참으로 거창한 사업이었다. 수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고 엄청난 재원이 소요될 뿐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내다보아야 하는 그야말로 <민족 전도 대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도산에게는 이 거대한 민족 대업을 추진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 국가 차원의 제도화된 정책적 지원 체계가 없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자발적인 민간 지지세력 또한 미미하였다. 오히려 쓰러져가는 무력한 대한제국은 간과한다 치더라도 한반도를 통째로 삼키려드는 거대한 일제 침략세력의 탄압에 맞서면서 그나마 미약한 민간 세력을 결집해 계도해 가며 추진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는 굳이 비교해 말한다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당시 조정으로부터 제대로 지원을 받지도 못한 채 병력과 함선은 물론 식량 의복 등 군수물자를 손수 마련해 가며 왜군의 침략을 막아내야 했던 상황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는 처지였다.
그런 속에서도 민족개조와 민국건설을 향한 도산의 간절한 소망은 결코 꺾이거나 위축되지 않았다. 단지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면서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전체 과정을 설계하고 당면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다. <긴 날이 맞도록 깊은 밤 들도록> 그는 오로지 민족개조와 민국건설을 염원하면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는데 온 맘을 바쳤고 그 결과가 <5단계 민족운동 방략>으로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당시의 여러 민족운동론들과 비교할 때 그의 방안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체계적이고 종합적이라는 점이었다. 민족의 개조에서부터 민국의 건설에 이르는 전 과정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다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갖고 있었다. 그의 방안에 따르면 심지어 나 하나의 인격을 건전하게 만드는 일 조차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민족지도자들이 특정의 노선만을 선택적으로 강조하면서 자기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배척했던 것과는 달리 그의 민족운동 방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따라서 그의 민족운동 방략은 언제나 여러 동지들과 민족 구성원들 간의 협의와 합의가 중시되었고 자발적 동의에 입각한 역할의 분담과 협력, 즉 분공합작(分工合作)의 협동 원칙이 전제되어 있었다.
3) 꾸준한 실천 - 漸進과 協同
도산은 민족개조와 민국건설의 간절한 뜻을 품고 있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세밀한 추진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절실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 해도 마침내 하나의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직접 실행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도산은 한 사람의 이론가나 사상가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실천가이고 운동가였다. 그가 가장 강조하였던 덕목 중의 하나가 공리공론(空理空論)과 허언장담(虛言壯談)이 아닌 무실역행(務實力行)이고 실천궁행(實踐躬行)이었다. 실제로 도산은 스스로가 실천 역행의 화신이었다. 단적으로 상해 임정시기에 쓴 일기를 보면 말 그대로 불철주야 쉴 새 없이 온 몸과 온 맘을 다 바쳐 민족운동에 헌신하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도산의 실천 방식에 대해 특히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가지 큰 특징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점진주의(漸進主義)와 분공합작(分工合作)의 원칙이 그것이다.
먼저, 도산은 그의 사고에서 드러나는 선구적 혁신성과는 달리 실행에서는 점진주의적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산에게 점진주의란 단순히 급진주의나 혁명주의에 대한 반대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에게 점진(漸進)이란 말 그대로 조금씩 나아가되 쉬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었다. 가까운 데서 먼 곳으로, 작은 데서 큰 곳으로 목적을 달할 때까지 쉬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 점진이었다.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큰 것을 이루어 낸다는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원칙을 도산은 굳게 믿으며 간직하고 있었다.
아울러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고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린다>고 쉽게 요약하고 있듯이 도산은 일에 관한 한 철저히 인과의 법칙을 믿는 합리주의자였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이든지 인과율(因果律)에 근거하여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른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시대에 앞선 선구적 이상과 목표를 간직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흔히 보듯 호언장담으로 대중을 일시적으로 선동하거나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이는 결코 성공에 이르는 길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신용을 실추시켜 오랫동안 악영향만을 끼칠 뿐이었다. 따라서 오로지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 일단 방침을 결정하고 나면 다 함께 온 정성을 기울여 끊임없이 실천을 계속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때문에 그는 민족개조와 민국건설이라는 위대한 사업의 성공을 허(虛와) 위(僞)에 기초하지 말고 진(眞) 과 정(正)의 기초 위에 세우자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우리의 목적이 옳고 바른 것이라면 비록 우리 당대에 성공을 보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먼 후대에라도 끝끝내 성공하고야 말 것이라는 게 그의 바위 같은 신념이었다. 그의 점진주의 실천방식에는 이 같은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다음, 도산의 실천에는 늘 조직적 협력의 중요성이 전제되어 있었다는 점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어떤 조직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떠한 결과를 지어내겠다는 명확한 계획 아래 그 목적을 다 이루기까지 뜻을 옮기지 않고 성심을 다해 노력할 것을 강조하였다. 실제로 그의 민족운동의 전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민족개조와 민국건설이라는 큰 목표에 일관되게 수렴되고 있지만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양한 조직을 만들거나 이끌며 대응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누구보다도 조직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민족운동의 고위 지도자였던 그의 실천은 언제나 동지들과의 조직적 협력과 역할분담, 즉 분공합작의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 그래서 그는 민족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일에서부터 교육과 산업을 통한 실력배양,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일, 그리하여 적절한 기회에 독립전쟁을 결행하여 광복을 쟁취하고 이상적인 선진국가를 건설하는 일까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전방위의 협동적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맺 음 말
우리는 모두 성공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를 성공했다고 여기기보다는 그렇지 못하다고 실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래서 보다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한 조언을 담은 자기계발의 이론들을 이른바 성공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따라 배우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선 무엇이 성공인가 하는 물음에서부터 답은 갈린다. 성공의 잣대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흔히 큰 권력을 갖거나 많은 재산을 쌓았거나 이름을 널리 드러낸 사람들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선망한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한 삶이라 할 때 권력과 재산 명예 등의 소유와 향유는 우리에게 큰 만족감을 주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들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어떤 과정을 통해 얻은 성공의 결과이지 성공의 요인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민족 수난의 시기에 평범하게 태어나 우리의 근현대 역사 속에서 가장 성공한 민족운동가로 평가되는 도산의 삶을 통해 시공간을 뛰어 넘어 오늘날 어느 분야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일반적인 성공원리를 되새겨 보고자 하였다. 도산의 성공 요인을 현대적인 성공철학의 이론에 비추어 재구성해 보면 다음 세 가지 핵심 사항으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목표와 비전>이다. 민족운동 지도자로서 그가 성공한 데에는 가장 먼저 강열한 염원이 밑받침 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미래 속에서만 실현 가능한 모습을 현재에 앞당겨 보여주는 비전이 되고 마침내 시간 속에서 그것을 점차 현실화 시켜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도산에게는 한국민족의 번영과 행복이라는 위대한 비전 속에 민족개조와 민국건설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일생을 관통하고 있었다.
둘째, <추진 전략과 계획>이다. 그가 민족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정신에 맞는 가치 있는 목표와 함께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주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추진 전략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설계했던 민족운동 방략은 당대의 여러 운동론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이면서도 합리적이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의와 참여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 <시스템화 된 실천>이다. 무엇보다 도산이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론가나 사상가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실천에 앞장서면서 많은 지지 세력을 조직해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시스템화 된 실천이야말로 가슴 속의 소망과 비전 그리고 머리 속의 추진 전략과 계획을 끝내 현실로 이끌어 내는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기 때문이다.
한국근대민족운동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도산의 장대한 생애를 조감하면서 우리는 분명한 목표와 비전, 구체적인 추진전략, 시스템적인 실천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시공을 초월해 오늘 우리들 현대인의 삶에도 널리 응용될 수 있는 성공원리로서 충분한 내용이 아니겠는가.(2009. 2.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