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제가 쓴 글에 대해 고민을 해주시니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전하고 싶습니다.
참고로 제 소개를 하자면 '청소년'은 아닙니다. 대학 다니고 있고 청소년 때부터 청소년인권운동을 해오고 있는 경험이 있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청소년을 "소수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보호주의" ㅡ보호주의가 번역된 개념인데 원어가 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ㅡ 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적으로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로서 규정되고 있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청소년의 노동을 실질적으로 '금지'시키고, 청소년들을 학교에 가두며 '가족임금제'를 통해 청소년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게 됨으로써 청소년들은 보호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위치하게 됩니다. 이러한 존재의 위치가 이데올로기의 물적 토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자라는 개념은 '정상성 이데올로기'에서 정상성의 외부적 존재로 인식되는 집단에게 붙여지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청소년 역시 청소년/비청소년이라는 비정상/정상의 굴레에 포섭되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예가, 미성년자/성년자라는 언어일 것입니다. 미성년자는 말 그대로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성숙'의 근거는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각 국가마다 미성년자에 대한 '나이규정'도 다를 뿐더러, '권리의 제한 범위'도 다릅니다. 그리고 '나이'가 성숙과 미성숙의 잣대가 된다는 것이 사실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요. 또 성숙과 미성숙 그 자체에 대한 기준이나 근거도 애매모호합니다.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가 이러한 청소년 보호주의(미성숙주의)라고 한다면, 그 반대급부로써 청소년인권운동에서 제기하는 것은 "주체"의 문제입니다.(여러 주장들이 반드시 주체라는 개념의 틀로 고민을 담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결국 '주체'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을 주체로 인식하고 바라볼 때 기존의 관념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생각들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면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에 관련해서, 노동권의 문제나 자기자본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는 당사자가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겁니다.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지만, 맑스도 당시 청소년들의 노동착취에 관한 보호는 찬성했지만, 노동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는 자가 '주체'로 설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현재 청소년들의 노동에 대해 "부모 동의서"가 있어야 한다거나, 15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노동부 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현재의 근로 기준법은 실질적으로 청소년들의 노동을 막고, 청소년들을 "가정에 예속된 존재", "부모의 보호가 필수적인 존재"로 규정되게끔 하며, 결국 "주체"일 수 없게 만듭니다.
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 가족임금제를 통해 가정에 예속되고, 노동 대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들은 노동권을 비롯한 경제적 권리들을 박탈당했기에 주체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을 하여 여성이 경제적으로 가부장에게 예속되는 것과 같이 청소년도 예속되며, 따라서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 박탈은 가부장제를 유지, 재생산하는 기제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학교에 '구속'된 청소년들은 "학습노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경제적 권리의 박탈은 필연적으로 다른 다양한 권리들의 제한을 가져옵니다.
청소년의 자기자본 자기결정권에 대한 문제 역시 지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근로 기준법에는 청소년들의 노임을 다른 사람이 대신 받을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이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할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임금을 받더라도 그것을 '빼앗아' 버리면 그만이니까 말입니다. 제 글의 리플에서 stcat님이 청소년들의 '과소비'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만, 그건 철저하게 청소년을 '비주체'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청소년들도 당연히 소비할 권리가 있지요. 청소년들의 과소비는 지적되면서 비청소년들의 과소비가 지적되지 않는 것이 바로 청소년 보호주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청소년들의 주체성과 경제적 권리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기본소득제도"라고 저는 생각하기에, 지지하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제도를 통해 청소년들이 어느정도 경제적 권리를 가진 주체가 되는 것이 현 청소년에 관한 문제들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BGEfA님은 사회적 합의를 통한 권리 제한을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기본소득은 "인권"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권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제한될 수 없는 기본적 권리"를 뜻합니다. 기본소득의 사용을 합의를 통해 제한한다는 것은 인권 역시 합의를 통해 제한가능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메이데이 때문에 청소년의 노동에 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드러난 고민들을 동어반복하는 느낌입니다.
청소년들의 경제적 권리 보장을 주장하지만, 청소년들의 "경제적 지위"에 관해서 저는 어느정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동어반복 보다는 글을 그대로 가져오는게 나을 것 같네요.
ㅡ청소년들의 경제적 지위와 권리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 위 글에서 청소년들의 경제적 지위에 대한 두 가지 모순된 입장이 존재한다. 하나는 청소년들의 노동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기본소득제도 같은 사회복지제도를 확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자는 청소년들을 주체로 인식해야 하고, 따라서 자유로운 노동의 권리 역시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인 반면, 후자는 노동할 권리는 노동해야할 빈곤청소년과 노동하지 않아도 될 부유한 청소년 사이의 계급격차를 심화시킬 수 있으므로 사회복지제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두 가지가 한꺼번에 가는 것이 맞겠지만, 문제의 초점은 청소년의 “경제적 지위”와 “경제적 권리”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사회적 논쟁의 여지가 있다. 경제적으로 스스로 노동하고 독립해서 살 정도의 지위와 권리를 허용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바람직한지, 반대로 청소년들이 노동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 공부하도록 하는 것은 옳은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이다.ㅡ
첫댓글 ; 사실 애초에 소득 이야기를 하려면, 특히 저연령 아동의 경우에는(뭐 고연령 아동도 큰 차이는 없으나) 가족 제도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전제되어야 해. 공동육아건 사회적 양육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