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송심씨/"삼한갑족 제1호"의 긍지!
1, 청송심씨, 700년 명가의 창업주 심덕부
----------------------------------------
생졸년; 1328년-1401년. 자는 득지, 호는 노당. 첫벼슬로 2군6위의 하나인 좌우위의 녹사가 되어 국왕의 행
차 때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거나 외국 사신의 송별, 영접 때 경호 업무 등을 봤다.
1364년 수원부의 수령이 되고 중서문하성의 정3품 우산기상시를 거쳐 예의사의 우두머리 관직인 예의판서
가 되었다. 그뒤 강계도만호, 의주부원수, 서해도원수를 지냈다.
1378년[우왕4]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최고 정무기관 문하부의 종2품 관직인 지문하부사가 되어 서
해도원수를 겸하여 자주 출몰하는 왜구토벌에 앞장 섰다.
오늘날 로켓 무기 일종인 화포를 고려말에 최무선이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화약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초
석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 고심하던 최무선은 드디어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원나라 사람 이원으로부터 초
석 제조방법을 간난신고 끝에 알아내서 이 화약을 이용한 18가지 화기를 만들었다. 오늘로 말하면 김정일
이 핵무기를 만들어 내는 성과에 버금가는 개가라 할 수 있다.
1380년[우왕6] 500여 척의 대선단을 거느린 왜구가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금강 하구로 겁없이 쳐들어 왔
다.
이 왜구는 상륙하자 말자 가옥을 불태우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학살을 했다. 심지어 두서너 살짜리 아기를
잡아 배를 갈라 씻어낸 뒤 쌀을 집어 넣어 제단에 올리고 술을 부어 하늘에 고하기까지 했다. 왜구가 지나
는 곳은 시체가 가을걷이한 논밭의 농작물처럼 쌓이고 마을의 웅덩이나 어구의 실개울은 선지피로 붉게 물
들었다.
왜구 침입 소식을 접한 심덕부는 해도 원수 나세와 함께 최무선이 제조한 각종 화약 무기를 최초로 실전
에 사용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 당시 신예 무기인 각종 화포를 탑재한 100여 척의 선단을 이끌고 나가 왜구
의 본진이 주둔하는 500여 척 함선에 포를 퍼부어 적선들을 불태웠다. 노략질을 하던 왜구의 패거리들은
혼비백산해서 옥주, 영천 등지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들이 노략질한 쌀이 강원도 산간의 초가를 뒤덮은 폭
설 만큼이나 쌓여 있었고 그 때 붉게 물든 실개울의 선혈이 6,7일이 지나도 붉었다고 한다.
1385년 문하찬성사 겸 동북면상원수로 북청에 침략한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같은
해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청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우왕이 최영의 말을 따라 요동정벌의 명을 내렸다. 최영을 8도 도통사에 창성부원군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에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에 임명했다. 이 때 심덕부는 서경도원수로 조민수와 함께 좌군에 속했다.
좌우군의 병력이 4만에 가까웠고 말이 2만필이 넘었다. 1388년 4월 18일 서경을 출발하여 의주의 압록강
근처 위화도에 이르렀다. 우왕이 최영만은 붙잡고 못가게 하였다.
요동 정벌군은 장마를 만나 압록강을 건너는데 떠내려 가는 군졸이 부지기수이며 군량미 소모가 너무 컸
다. 이미 요동정벌 4불가론을 밝혔던 이성계는 마침내 조민수, 심덕부 등 제장과 협의하여 회군을 단행했
다.
회군한 이성계는 숭인문 밖에 진을 치고 회의를 열었다. 이 때 참석했던 심덕부는 이화, 조인벽 등과 함께
궁궐로 들어가 병장, 안마 등을 거둬 나오면서 우왕의 제2비이며 최영의 딸인 영비를 내줄것을 왕에게 요구
했다.
그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운 지 9년만에 심덕부는 조준, 박위, 정도전, 정몽주, 설장수 등과 함께 이
성계를 도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391년 왕세자가 하정사로 명나라에 가기로 하였다. 그간 국왕을 폐위하고 옹립한 문제에 대해 명나라의
반응이 나올 수 있는 미묘한 시기이므로 왕세자를 수행하는 사절단의 인선에 고려 조정의 촉각이 곤두서
있었다.
이 사절단의 책임자로 시중 심덕부가 뽑혔으며 찬성사 설장수, 밀직부사 민개 등이 수행했다. 사절단 일행
은 6개월 만에 임무를 마치고 돌아 왔을 때 공양왕과 이성계에 의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392년 7월 개경 수창궁에서 이성계가 즉위식을 올렸다. 이 때 심덕부는 판문하부사로 조선 개국을 맞았으
며 1393년 회군공신1등이 되고 청성백에 봉해졌다. 이미 지난해부터 수도를 개경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
는 의견들이 있어오다가 1393년 태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계룡산을 살펴 본 뒤 권중화 등의 제의를 받아들
여 공주 계룡산으로 천도를 서둘러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경기좌우도 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은 새 도읍지로 옳지 않다고 상소했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
이 많으므로 1393년 12월에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천도에 관해 성명을 발표했다. " 과인은 깊이 생각해 본
결과 계룡산 천도를 백지화하기로 하였소. 한나라의 도읍은 그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일이요.
계룡산은 강이 없고 남쪽으로 치우쳐 교통마져 불편하여 적지가 아니오. 그래서 오늘 신도읍지 역사를 즉
각 중지하도록 명하였소" 계룡산 천도를 주장하던 진보파 세력과 충청도 천도를 반대하는 수구 골동파에
해당하는 양대 세력이 오늘날과 같이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 나온 임금의 성명은 헌법제판소 결정과 같은
성명이었다.
두 세력의 갈등을 안타갑게 지켜보던 오늘날의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중도 완충 세력을 자임하는 심덕부
가 자기 견해를 밝혔다. "전하, 참으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조선의 중심지를 벗어나 외진 충청도
로 도읍을 정한 뒤 인천을 비롯한 경기도 도민들이 전전 긍긍하며 충청도와 경기도 간의 대립을 불러오려
던 판에 내리신 용단이라 8도의 백성들이 쌍수로 환영할 것입니다. 이제 새도읍지는 천만년 흥성지기의 곳
을 물색하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청성백께서는 마치 좋은 도읍지를 알고 계신 듯 말하는 것 같구료. 어디로 새도읍을
하는 것이 좋을지 한번 말해 보구료."
중국 진나라 때부터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해서 사회 현상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일이 비롯되어 후한
때 아주 성행했다. 우리 나라도 고려시대에 이런 예언이 유행했다. 고려 건국을 정확히 예언하여 그대로 맞
아 떨어져 신승으로 알려진 도선의 비기가 천변지이가 있을 때마다 늘 화제가 되었다.
청성백 심덕부는 "전하! [도선 비기]에 의하면 `왕씨를 대신할 자는 이씨이니 한양에 도읍할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목자씨가 임금되네, 한양 땅에 새나라를 세우네.`라는 동요가 민가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래서 고려 조정에서 한양에 오얏나무를 심어 크게 자라면 잘라내어 그 기운을 억눌러 왔습
니다. 소신은 이 나라 도읍지야 말로 한양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고 아뢰었다.
이에 정도전, 무학대사의 견해를 대폭 수용하여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한양에 설
치했다. 심덕부는 그 조성도감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하는 일을 총괄하였으며, 이어 도
성 축조도감도 설치되어 11만이 넘는 장정이 동원된 신도 건설 대역사에 크게 공헌했다.
1397년 판문하부사,1398년 영삼사사, 1399년 좌정승을 지내고 그 이듬해 73세로 치사했다. 처음 시호는 공
정이며, 나중에 정안으로 고쳤다.
청성백 심덕부는 태조 이 성계가 가장 믿고 중히 여기는 인물로 신왕조 건설에 크게 한몫을 했을 뿐만 아니
라 아들 일곱을 낳아 다섯째 아들[온]이 세종의 장인이 되게 하고, 여섯째 아들[종]이 태조의 부마가 되
게 하여 조선조의 "삼한갑족 제1호"로 향후 700년을 한결 같이 쇠하지 않는 명문 거족으로 탄생시켰다.
흔히들 조선조 명문을 논하는 자리에서 청송심씨가 단골 메뉴로 손꼽히는 이유는 심덕부로 시작한 3대 상
신 배출 덕분이다. 심덕부에서 심온, 심회에 이르는 [3대 연속 상신]은 조선조에서 딱 세 번이 있었을 뿐이
다. 대구 약봉 가문의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로 내려오는 3대 상신, 청풍김씨 관복재 김구 가문의 김구, 김
재로, 김치인에 이르는 3대 상신이 바로 그것이다. 3대 상신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3대 대제학은 부자 문묘 앞에서는 큰 소리를 못치는 것이 그 당시 사회 분위기이다. 부자 문묘 배향은 아무
도 도전을 할 수 없는 조선 사회의 영원한 영광이다. 그 당시 광산김씨 부자 문묘 배향을 중세기 로마 카톨
릭 전성기에 비유하면 부자 교황을 낸 영광보다 그것을 더 대단하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명예의 일종일 뿐이고 조선의 3대 상신은 그 당시 그 사회에서는 오늘날 부시가 미국 대통령에 삼선되는 영
광보다 훨씬 더 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실익이 있는 영광이었다.
그런데 청송심씨는 이 세 집의 영광 중에서도 혼자 노른자위를 차지했다. 왜냐하면 다른 두 집은 3대 상신
이라도 3대가 다 수상이 아니고 부수상이 한 명씩 끼여 있기 때문이다. 약봉 집은 서명균이 좌의정이고, 관
복재 집은 관복재 김구 자신이 우의정에 머물렀다. 오직 청송심씨만이 3대 수상을 냈다. 이것은 심씨가 조
선조 "삼한갑족 제1호"라는 긍지를 가질만한 것으로 조선조에 있어 전무후무한 기록이며 조선 보학사에 영
원히 남는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3대 상신 가문/청송심씨 하늘이 도왔는가, 인물이 잘 났는가?
1,한양사류의 영수 심의겸
심의겸은 1535년[중종30]에 태어나 1587년[선조20]에 졸했다. 자는 방숙,호는 손암,간암,황재이다. 영의
정 심온의 6대손이며, 영의정 연원의 손자이고, 명종 국구 강의 둘째 아들이다. 5대조 영의정 회의 아들 한
의 증손이 무후하여 홍의 아들로 입양계대 하였다. 또한 명종의 비 인순왕후의 동생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55년[명종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검상을 지냈다.
그는 의정부 정4품 관직인 사인으로 일할 때 공무로 윤원형의 집에 들렀다. 세도가 원형의 집에 김효원이
식객 노릇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그때 김효원은 이미 문장에 뛰어나 그 이름이 있었다. 의겸은 그가 세
도가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아주 곱지 않은 눈으로 봤다. 그런 효원이 장원 급제를 하자 의겸은 효원에 대
해 [세도가 윤원형 집에서 자란 사람]이라 하였다.
의겸이 1572년 이조참의로 있을 때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권신에 아부했다하여 이를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오르고 영남 출신의 사류가 대거 진출하여 김효원의 명성이 높아졌다.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우 충겸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직분이 척신의 사유물일 수 없
다.]고 반대했다.
한양의 선배 사류는 심의겸을 중히 하고 연소한 남도 출신 사류는 김효원을 받들었다. 대사간 허엽은 나이
는 심의겸에 가까우나 김효원에게 사간을 시켜 연소한 사류의 종주가 되고 중앙 원로측 박순을 비롯한 정
철. 신응시 등은 심의겸을 옹호했다. 오늘날 보수 원로 세력과 386 신진 세력 간 힘겨루기 양상의 표본인 셈
이다.
김계휘를 평안감사로 내보내고 이조참판 유희춘을 사직시켜 고향으로 보냈으며 이후백을 함경감사로 내보
냈다. 이것은 허엽의 아들 봉이 이조좌랑으로 있으면서 참판 박근원과 모의해서 취한 조치로 김효원 일당
의 책략이라고 비난을 받은 사건이다.
율곡 이이는 붕당을 우려하여 우의정 노수신에게 [조정이 시끄러우니 그들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면 다소
진정될 것이라.] 제의했다. 노수신은 섣불리 그랬다가 조정이 더 시끄러워질 수 있다며 신중론을 폈다. 이
때 대사간 정지연이 이이의 말을 좇아서 참판 박근원, 좌랑 이 성중, 허봉 등 김효원 일당을 이조에서 일시
에 몰아내 버렸다.
이로써 심의겸 세력이 갑자기 커져서 그 기세가 도도했다. 이에 놀란 우의정 노수신은 이이의 지난 말을 들
어 김효원을 삼척부사에 심의겸을 개성부 유수로 내보내게 하였다.
이때부터 경서[정릉방]에 집이 있는 심의겸의 원로 사류를 서인, 경동[건천동]에 집이 있는 김효원의 후
배 사류를 동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이, 성혼의 친구나 문인은 거의 서인 계열이었고 이황,조식의 문인
은 거의 동인 계열이었다.
서인 측 윤현과 동인 측 김성일이 함께 일하며 의견이 대립했다. 윤현은 그의 숙부[두수, 근수]가 다 요직
에 있으면서 서인을 옹호했고 동인을 배척헀다. 동인은 이 3윤[두수,근수, 현]을 논핵하며 좇아내려 했다.
정철이 서인 편을 들고 이발이 동인 편을 들었다.
대사간 김계휘가 나서서 3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후배 사류들이 들고 일어나 김계휘를 논핵하여 전라
감사로 내보내고 김계휘 편을 든 심의겸의 동생 충겸도 좇아냈다.
이이, 백인걸,김우옹 등은 동,서를 타파하고 사류를 규합해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으며 동서
분쟁은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왕은 정2품 이상 관원을 선정전으로 불러놓고 동서 분란의 책임을 물어 심의겸과 김효원을 처벌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처벌을 반대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동서 분당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고의적으로 양당 대립을 부추겨 악화일로를 걷게 한 원흉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
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라도 활과 활시위 역할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화살을 시위에 얹어 당기
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심의겸이 활이요, 김효원이 시위라면 활시위를 당긴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동,서 분쟁은 불특정 다수의 횡포다. 개인의 이기가 군중의 힘을 빌어 일으킨 집단 히스테리다. 이것은 조
선 유교 사회에서 유일하게 생긴 현상만은 아니다. 언제든지 있는 현상이다. 박정희 정권 때는 1000여 건
이상, 김대중 정권 때는 300건 정도 있었다고 한다면 노무현 정권 때는 300건이 진행될 모양이다. 오늘날
에 이처럼 흔한 이런 사건은 원시 시대부터 있어 온 텃세에 연유한 사회 현상이다.
한양 중앙의 기존 사류의 세력과 남도로부터 서울에 진입해온 신진 세력 간의 몇차례 텃세 싸움을 너무 과
대 포장하여 호들갑을 떤 듯하다. 오늘로 말하면 주간지에 [가십]으로 실릴 1회용 정치 기사를 마치 미국
의 남북 전쟁보다 더 큰 사건으로 둔갑시킨 감이 없지 않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동방에 조용한 나라! 아침 해가 산뜻하게 뜨는 나라! 2천만
동포가 함께 어울려 정답게 사는 나라이기에 조정에서 누가 정무를 보다가 {방귀}만 뀌도 놀라서 귀양 보
내는 사회다. 우리는 툭하면 역사적인 사소한 사건도 모두 "난리"라고 기술한다. 중국은 사건을 어지간하
면 "난리"라 하지 않고 "변"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난리로 보고 중국은 사회의 변화하는 현상으로
서 "변"으로 보는 것이다.
이 별것 아닌 사건을 우리 조선조 중기 역사상 초대형 사건 제1호로 기술해 놓았다. 이름도 거창한 동,서 당
쟁이다. 미국 사람들이 들으면 동방의 나라 조선에도 미국과 같이 남북 전쟁이 있었는가 보다 지레 짐작
할 것이다.
이 조그마한 인간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율곡이 한걱정을 하고 임금이 노심초사했다. 우리 조정 대신들이
모두 안절부절 못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자애가 너무 지극한 탓이다. 60 먹은 아들이 길을 떠나면 80
먹은 노모가 그 아들이 나가 길 거리에서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깊은 사랑에서 이런 현상이 유발된 것
이다.우리 역사는 이런 지극한 사랑의 역사다. 우리 역사 기록도 이런 사랑의 눈으로 적어 놓았다.
자애에 가득찬 사관은 온통 걱정 투성이다. 왠 장마가 그렇게 많은지 역사서를 장마로 도배해 놓은 것 같
다. 그 기록만 봐서는 조선은 장마가 져서 홍수로 2000만 동포가 다 떠내려가 씨가 마른 민족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슨 놈의 화재가 그렇게도 심한지 화재의 기록을 보면 조선 민족이 불에 다 타 죽
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천둥만 쳐도 걱정이 태산인 우리 어머니 같은 고운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역사를 쓰다 보니 우리 역사
는 자애로운 노모의 역사요, 노파의 호들갑 역사가 되었고 별것 아닌 사건을 난리요, 전쟁이라 대서 특필했
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오늘날 못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다. 오죽하면 이웃 나라가 우리를 보고 당쟁으로 날
을 세운 나라요, 당쟁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우리를 짓밟겠는가? 그것도 모르고 자라는 젊은 세대들이 조상
을 원수 같이 대하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어쨌든 그 일련의 사건으로 나라로서는 국력의 소모가 컸고 심씨 문중으로는 큰 인물 하나를 잃어 버렸다.
심의겸은 동서 분당의 희생양이다. 동,서 분쟁이 격화되지 않았다면 그는 마땅히 조정의 영수로 큰 역할
을 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그 보잘것 없는 사건을 동서 분당으로 확대 해석하는 바람에 심의겸이 가장 큰
해를 입었다.
심의겸은 빼어난 인물이다. 1-200년에 큰 인물을 하나씩 내는 심씨 문중에 점지된 인물이 심의겸이다. 한
양 사류의 핵심 세력을 이끄는 영도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세력이 있어야 하며, 학문이 있어야 하
고, 덕망이 있어야 한다. 심의겸은 이 세가지 조건을 다 갖춘 큰 재목이다. 그는 소장 시절부터 중앙 사류
의 명망을 얻어 차차 그 세력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여 은연 중에 그들의 영수가 되었다.
2,심의겸과 외숙 이량
-------------------
심의겸을 이해하려면 이량과의 관계를 알아볼 만하다. 이량은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5대손으로 1519년에 태
어나 1552년 문과하여 도승지를 지내고 공조,이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후손에 5-6명의 판서를 냈
고 현대 와서 초대 국회의장 이기붕을 냈다. 이기붕의 아들 강석을 양녕대군파의 이승만 대통령 양자로 준
집이다.
이량은 심강의 딸,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 심비의 외삼촌이다. 이 때 대비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조정의 기강
을 흐려 놓았다. 명종은 조정의 혁신을 위해 윤원형에 대항할만한 사람을 물색하다가 중전의 외삼촌인 이
양을 가까이 했다.
임금은 이량을 동부승지로 삼아 무슨 일이든 그와 상의하였다. 이 소문이 나자 그의 옆에 이감, 이영, 권
신, 김백균, 김명륜 등이 몰려 들어 세를 이루었다. 또한 자기 아버지 윤원로를 죽인 윤원형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는 윤백원[윤원형의 조카, 김안로 손녀의 남편]도 그 옆에 왔다. 이량은 임금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윤원형을 누르고 말았다.
이제는 이량이 방자해졌다. 이감,윤백원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키우면서 정치를 농단했다. 축재를 하여 대
저택을 금은 보화로 채웠다.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신진 사류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조판서 밑에 있
는 신진 사류인 이조정랑 박소립을 파직시키고 이량의 아들을 좋은 자리로 옮겨 주라는 청을 거역한 윤두
수도 몰아냈다. 동부승지 허엽이 경연관으로 임금 앞에서 이량에게 불리한 야기를 했다하여 그도 몰아냈
다.
이량이 이감,윤백원,이영,권신 등 6간이라 불리는 심복들을 모아놓고 사류를 해치려는 음모를 획책했다.
이 사실을 알아낸 심의겸은 처가로 인척이 되는 부제학 기대항에게 이 음모를 알렸으며 누이인 중전과 아
버지 청릉부원군의 힘을 빌려 이량을 귀양 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로써 박순을 비롯한 많은 사류를 구
제하여 칭송을 크게 들었다.
심강의 아들 7형제 중에서 의겸이 심씨 가문의 3대 상신인 덕부.온, 강으로 이어지는 대인의 기풍을 가장
크게 받았다. 그가 없었으면 조선 상반기에 떨치던 심씨 가문의 성세를 후반기에 잇지를 못했을 것이다. 조
선 후반기의 번성은 오로지 의겸의 복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심강의 맏집 인겸의 후를 자기 아들 엄으
로 잇게 하였고 손자 광세가 5자를 낳아 그 후손들이 조선 후반기에 번성하였다. 영의정이 3명이 나오고 판
서와 참판이 각각 여남은 명이 나왔다. 그 이외도 인물이 수두룩했다. 의겸의 후손이 심씨가 벌인 명문 잔
치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조선조 전기간을 통해 명문으로 성가를 올리는 것은 몇손가락 꼽을 정도로 아주 드문 일이다. 청송심씨가
한결같이 명문이 된 것은 의겸 집을 밑바탕으로 한 네 차례의 아들 복 덕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심덕부가
일곱 아들을 낳아 조선 개국 초기를 휩쓸더니 심온이 다섯 아들을 낳아 세종 시대를 주름잡았고 심강이 또
다시 일곱 아들을 낳아 명종조를 울렸으며 심의겸의 손자 광세가 또다시 다섯 아들을 낳아 조선 후반기를
풍성하게 했다. 이것이 어찌 인력으로 된 일이라 하겠는가? 이로 보면 심씨 가문은 하늘이 도왔다 하지 않
을 수 없다.
그렇다고 청송심씨가 전적으로 하늘 덕에 명문되었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것은 그 선조들이 남모르는
노력을 한 덕이겠지만 그 중에서 무엇보다 심온과 심의겸의 희생 덕이 컷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명나라
로 피신하여 구명도생할 절호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목숨 받쳐 조국에 충성심을 보이면서 선비
의 정신을 만천하에 떨쳤으며 후자는 한양 사류의 영수로 독한 마음 먹고 술책을 썼으면 조정 영수도 가능
한 가운데 외척의 세도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처지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겸은 그 유혹을 뿌리
치며 자신의 희생을 달게 받아드렸다. 그 뿐만 아니라 근신하며 외척의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세도
를 부리는 외숙을 꺽어 청류의 희생을 크게 막았다. 이 두 사람의 희생이 없었으면 오늘날에 어찌 심씨 문
중이 그런 명성을 들을 수 있었겠는가?
심재호
운영자님, 그런데, 심의겸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 심의겸의 아들인, 심엄(현감 증영의정
청송부원군) - 심광세(사헌부 집의, 증이조참판) - 심은(진사, 증이조참판) - 심약명(현
감, 증이조판서) - 심속(증영의정) 의 5대가, 왕의 외척 또는, 인척지간이었고, 서인 최초
의 영수 심의겸의 후손들로써, 대대로, 서인 노론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이 잘 못
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광해군과 이이첨, 정인홍의 대북파가 일으킨
여러 옥 사건과 남인과 소론파들로부터의 견제와 탄핵때문에, 잘 못 된 걸로 알고 있는
데, 운영자님의 구체적인 고견을, 한 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2004-11-16 오후 10:36:00
한국명문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래와 같이 짐작하고 있습니다. 너무 상황이 복잡하고 시간이 없어 자세히 적지 못
하고 뼈대만 말씀드리니 이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귀문 선조 존칭 생략도 양해해 주세요.]
"심의겸의 아들 엄의 시대는 서인이 세력을 잃은 시기입니다. 건저 문제로 정철이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귀양을 간 무렵으로 서인이 일망 타진되어 서인의 암흑기였습니다. 그런 관계로 의겸의 아들 엄과
손자 광세 정세는 중앙 정계 진출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심광세는 경사에 통하고 문장에 능해서 가히 조
부 의겸의 적통을 이을 만한 인물로서 1601년[선조34] 문과하여 청운의 꿈을 펼 수 있는 기회가 온 듯 했
으나 또다시 북인의 득세로 좌절되었습니다. 심씨 가문에 드리운 먹구름으로 인해 1624년에 응교 벼슬
을 끝으로 심씨 가문의 기대마 심광세는 일생을 아깝게 끝마쳤습니다.
심광세 5자[은, 억, 헌, 총, 무] 역시 그 영향을 받았으며 심택현이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1700
년 대 이전까지 또다시 노소 분열에 의해 서인이 타격을 받으므로 약 120년간 심씨 문중의 암흑기가 있
었다고 봅니다."